은해사 사적비(銀海寺事蹟碑)에 의하며, 애초 이 절의 이름은 해안사(海眼寺)였다고 한다. 신라 헌덕왕 1년이 서기 809년, 혜철 국사(慧哲國師)가 지금의 운부암 아래 해안평(海眼坪)에 대가람을 짓고 그 이름을 해안사라고 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뒤 해안사는 고려의 홍진국사(弘眞國師)에 의해 다시 크게 중창되었으나, 1545년의 대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오늘날의 은해사라는 사명은 바로 그 직후인 1546년, 천교 화상(天敎和尙)이 현재의 자리고 절을 옮겨 짓고 나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후로도 은해사는 크고작은 화재에 의해 건물이 소실되는 일이 여러번 있었으며, 그때마다 법당과 승방등의 당우를 신축하는 일도 계속되었다. 가장 최근의 중창 불사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있었던 것으로서, 오늘날의 도량 또한 당시에 있었던 불사 이후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의 사적비가 전하고 있는 내용을 크게 의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즉 앞에서 말한대로 , 1545년 조선 인종 원년에 일어난 대화재에 의해 해안사가 전소됨에 따라 이듬해 천교 화상이 해안평에서 현재의 자리로 절을 옮겨 지은 다음 그 이름을 은해사로 고쳐 불렀다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1481년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1590년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 은해사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한 ‘은해성(銀海城)이라는 사명(寺名)이 벌써 등장하고 있다.
해안사를 은해사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는 서기 1545년을 무려 50여년이나 소급해 올라가는 문헌 가운데에 이미 ‘은해’라는 절 이름이 나와 있다는 사실은, 실제로 위의 사적비가 전하는 내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볼 만한 충분한 빌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해안(海眼)이란 땅속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키며, 동시에 옥(玉)의 한 종류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은해(銀海)는 도가(道家)에서 눈[眼]을 따로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은해’하는 절 이름은 ‘해안’의 ‘안(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은해성이라는 사명이다.
다른 절은 모두 ‘사(寺)’ 또는 ‘암(庵)’으로 표기하면서 유독 은해사만은 ‘성(城)’이라는 접미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러는 은해성사(銀海城事)라는 기록도 보이는데, 은해라는 말이 도교 계통의 어휘인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역시 도가와 관계있는 말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있을 뿐, 그 의미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은해사의 가람 배치
은해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그러나 원래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 터이고, 필시 중간에 소실된 것이 분명하다. 다행스러운 일은, 늦게나마 이를 복원하기 위한 공사 계획이 올해부터 시작된 대작불사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위치는 대략 지금의 매표소 부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새롭게 일어설 일주문의 웅자를 마음 속으로 그리며 소나무 숲길을 따라서 걸음을 옮기노라면, 잘 다듬어진 맵시의 돌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은해교(銀海橋). 말 그대로 차안(比뿜)에서 피안(彼岸)으로 이르는 건널목인가? 다리 목에 쭈뼛쭈뼛 서 있는 역대 방백(方伯)의 공명비쯤이야 슬쩍 곁눈질로 비껴 보면서 바람 내음도 금세 다른듯한 피안에 첫발을 내딛는다
팔공산은해사!
도량안으로 들기 위해서는 지국천(持國天), 중장천(增長天), 광목천(廣目天),다문천(多聞天) 네 천신의 서슬퍼런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해학적이다. 건달바, 야차, 나찰 등의 고 쬐그마한 말썽구러기들을 섬돌만한 발로 지그시 눌러 밟고도 모자라, 곧 튀어나올 듯이 부릅뜬 저 화등잔 같은 눈하며 입하며.....
은해사는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는 호지문(護持門)과, 설법전인 보화루(寶華樓), 그리고 대웅전 이 세 건물을 동일 축선(軸線) 위에 올려놓고 그 좌우로 설검당(說劍堂)과 심검당(尋劍堂)을 마주보게 배치하여, 전 도량이 장방형의 중정식(中庭式) 가람구조로 얽혀져 있다. 그러나 대지가 거의 평지에 가까운 까닭에, 동일 형식의 가람구조를 가진 여늬 사찰과 달리
대웅전과 같은 높이의 지반 위에 누각인 보화루를 축조하였다.
지금은 올해 완공한 새로운 누각이 아직 단청도 받지 않은 채 옛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지만, 그 전까지는 이곳에 2층으로 된 다락집이 있어서 일제 때에는 오산불교학교의 교사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정(中庭먼)은 길이가 깊어 장방형인데, 중간 부분에 계단식 축대를 조성하여 법당 쪽에서 내려다 보면 정방형으로 보이도록 배려하였다.
그리고 보화루 좌우에는 각각 사물대(四物臺)와 종무소가 위치하고 도량 좌측 끝 한켠으로는 승방과 요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호지문 좌측으로는 근년에 신축한 종각이 서 있다.
언젠가 지금 한창 진행중인 대작 불사가 끝나는 날, 눈 비비고 다시 도량을 둘러보리라.
백흥암 오르는 길
은해사 산내 암자는 모두 아홉이다. 서운, 기기, 백련, 묘봉, 운부, 거조, 백흥, 중암, 원효가 바로 그것이다. 그중 큰절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백련암(白蓮庵)이며, 반대로 가장 먼 곳은 거조암(居祖庵)이다. 이들은 대략 큰절 앞으로 난 주등산로 부조과 그 좌우의 골짜기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예외로 원효암(元曉庵)과 거조암만은 그 출입로가 은해사 골짜기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 추측컨대, 이들 양사는 처음에는 독립된 사찰이었다가 뒤에 은해사의 산내 암자로 편입해 들어온 듯하다
큰절 바깥마당으로 내려서서 오른쪽으로 길을 조믁 오르다 보면, 왼쪽 개울 건너 서운암(瑞雲庵)과 기기암(奇奇庵)으로 이어지는 길이 바로 눈앞에 들어온다. 늦은 가을, 산의 유혹은 정말 집요하다.
가슴이 철렁, 쏟아져내리는 갈잎이 두텁게 쌓여있는 오솔길을 애써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 가기란 정말 쉬운일이 아니다.
나중에 밝아 오르리라는 헛다짐으로 마음을 다독이며 간신히 아쉬운 눈길을 거두어들인다. 개울 옆으로 난 길은 아직 비포장이다. 모난 돌 삐죽삐죽 솟은대로 , 방구들 터억 등짝 내민 대로 바닥이 영 살갑지가 않다. 하지만 좁은 차안에서 움찔움찔 오금을 저리는 것보다, 이렇게 터덜터덜 시나브로 걷는 일은 정말 배짱 편한 일이다. 입안이 싱거울 때는 덜 아무 풀잎이나 한 줄기 뜯어 어금니로 질끈 깨물어 가면서, 발바닥에 살짝 땀이 배기 시작할 무렵, 앞을 바라보니 이 산중에 웬 망망한 저수지일까?
제철따라 산색에 물든 수면위로 선뜻 바람이 스쳐 간다.
신일지(新日池)다. 길은 다시 이곳에서 좌우로 갈라져 오른쪽으로 저수지를 끼고 돌아드는 길은 바로 옛 큰절터였던 해안평과 운부암(雲浮庵) 그리고 멀리 거조암으로 이어지고, 나는 그대로 왼쪽 큰길을 따라 팔공산을 오르는 주등로(主登路)를 계속 나아간다. 여기서부터는 제법 골이 깊어지기 시작한다.
물도 저 아래 바위 사이로 아득히 숨어 흐르고, 산그늘도 점점 울울해진다. 길바닥 위에는 도토리가 그냥 나뒹굴고 겨우살이 준비 때문인지 다람쥐의 모습도 한층 분주해 보인다. 곧추선 산등성이, 굽이도는 오르막길- 어느새 훌쩍 한 고비 올아선 느낌이더니 문득 나무 사이로 절 지붕이 보인다. 백흥암(百興庵)에 다 온 것이다. 바로 앞의 개울을 건너 바깥마당으로 들어서니, 절은 생각 밖으로 규모가 컸다. 암자 가운데에서는 전국에서도 그 짜임새가 제일이라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백흥암의 역사와 터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 혜철 국사(慧哲國師)의 발원으로 창건되었으니, 은해사 개산 이후 약 4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사찰로서 이 절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종(中宗) 무렵에 들어서였다. 다시 말해서 중종 15년인 1520년, 은해사와 백흥암의 중간쯤 되는 곳에 왕세자-후일의 인종-의 태(胎)를 봉안하고 나서부터의 일이었다.
후일 인종(仁宗)이 등극하게 되자 이곳의 태실(胎室) 경영은 더욱 새로워졌으나, 중종의 삼년상을 치르던 중 인종마저 붕어하는 바람에 얼마 못 가 그 혈기는 도로 식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다시 조정의 관심이 모아지게 된 것은 명종(明宗) 원년의 일로서, 당시 경상감사 안현(安絃) 의 주청으로 인종의 태실 경영을 새삼 두터이 하면서였다. 이후 백흥암은 ‘막중수호지처(莫重守護之處)’ 로써 국가의 보호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나아가 영조는 이 곳을 어압봉안소(御押奉安所) 로 지정하여 경상감사의 각별한 보호를 명하였다.
그후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원문(完文)을 작성하여 현액으로 내걸고, 대소관원에게 이를 널리 알려 예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조처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백홍암에는 명종 당시에 간행된 여러가지 불서와 문서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은, 근처에 잣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이를 따라 백지사(栢旨寺) 라고 불렀다 한다. 백흥암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은 조선조 명종 원년, 위의 천교대사에 의해서였다. 즉, 팔공산의 산세가 마치 승천하는 용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대사가, 저 아래 운부암의 서운(瑞雲) 이 더욱 세차게 일어나 그 여세를 타고 용이 수월하게 승천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바램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 도량이 남서향으로 터를 잡고앉은 백흥암은, 정면에는 2층 누각인 보화루(寶華樓) 를, 북방에는 마당보다 높게 극락전을 배치하여 이를 사찰의 중심축으로 삼고, 각각 그 동면에 선방인 심검당, 서편에 진영각(眞影閣)을 두어 사면이 온통 건물로 둘러싸인, 문자 그대로 중정식 가람 배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나아가 진영각 뒤의 축대 윗쪽으로는 요사채와 명부전이, 다시 명부전 뒤 왼쪽으로는 영산전과 산신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심검당 뒤로는 근년에 신축한 또 다른 요사와 2층으로 된 다락집이 위치해 있어 사찰 내의 건물배치선으로 도량 전체를 삼등분한 꼴을 보여주고 있다.
도량의 각 면모
백흥암의 주건물인 극락전을 정면 3간, 측면 3간의 평면형으로 불단 뒤쪽 모서리에 내진주(內陣柱)를 세우고 불벽(佛壁) 을 만들어 내부 공간을 구성하였다. 건물 전면의 어간에는 네 쪽으로 된 문짝을 달았고, 좌우의 협간(夾間) 에는 각각 같은 무늬의 세쪽 문을 달았다. 원래 측면 벽에도 문을 달았던 듯 문얼굴이 남아 있으며, 내부 바닥에는 우물 마루를 깔고 그 위에 수미단을 조성하였다.
단청은 안팎 모두 고색창연한 금단청을 올렸으며, 조선 중기의 문양 및 색조를 오늘날까지잘 보존하고 있다.
백흥암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극락전 주불인 미타삼존상(彌院三尊像)을 떠받치고 있는 수미단(須彌壇) 이라는 이름의 불단이다. 보물 제 486호인 수미단은 그 조각 수법과 구성이 아주 걸출한 목각 부조로서, 5단으로 구성된 각 단마다 천녀와 동자 그리고 갖가지 동물을 입체적으로 조각해 넣은 명품이다. 그 조화로운 배열이며 나무를 투조한 기법은 실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불교 미술의 정수임에 틀림 없다.
선방채인 심검당 맞은편의 진영각은 혼허 대사(混虛大師) 의 영정과 판본 그리고 현판 등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어간 마루를 중심으로 그 우측은 전통간(全通間) 으로 우물 마루를 깔았고, 좌측에는 온돌방을 들여 주지실로 사용하고 있다.
‘십홀방장(十笏方丈)’, ‘화엄실(華嚴室)’ 등의 편액이 운치가 있는 무단청의 백골집이다.
따로이 천왕문 따위가 있을 리 없는 백흥암에서 주출입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보화루 하부의 중간 통로이다. 양쪽의 고방과 창고 등은 근년에 개조한 것인 듯한데, 좁고 어두컴컴한 누각 밑을 지나 가파른 돌사다리를 오르노라면 문득 훤출하게 눈위로 솟아오르는 극락전이 제법 아찔하다. 백흥암 보화루는 한 면이 마당 쪽으로 완전히 개방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루 바닥 또한 마당과 그 높이가 똑같아서, 덕분에 가뜩이나 좁은 마당의 넓이가 배로 커 보이도록 재주를 부렸다.
추사(秋史)가 남겼다는 ‘산해숭심(山海崇深)’ 이라는 어구는 실로 백흥의 지세를 잘 드러낸 말인 것 같다.
보화루에 올라 보라.
그리고 작지만 결코 어느 대찰도 넘볼 수 없는, 백흥난야(百興蘭若) 의 깊고 높은 정취를
마음껏 심호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