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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내 속에 머물러 있는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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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을 위한 사색 - 현기 1989년 12월 94호
내 살아오는 동안 무수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건만 정작 써 보내야 할 그대에게 이제사 소식을 보냄은 나의 큰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네. 아니 차리리 어리석음 때문이었다면 오늘 그대를 만나는 것이 새로운 깨달음과 기쁨이겠지만,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욕락에 탐닉되어 내 안에 그대 있음을 보지 못함이었겠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그대와 나는 언제나 함께 있었지. 내가 갓난 아기였을 때 그대는 그 갓난 아기의 울음만큼 내 속에 숨어 있었고 내 육체가 성장할수록 그대도 뒤질세라, 그만큼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네. 그 어느 때인가, 내가 출가하고자 하였을 때, 나에게 너는 중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도 제일 기뻐한 것은 그대였지.
마치 나의 출가하고자 하는 마음 뒤편에는 끊임없는 망설임과 회의가 있었듯이. 아무튼 그대가 그렇게 기뻐하였던 것은, 내가 수행을 잘하면 그대의 실체를 볼 수 있어 그대와 내가 한 덩어리로 어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었겠지. 그러나, 나는 또 다시 언제부터인가 그대를 버렸었고, 오늘에서야 다시 그대를 만나러 왔네, 그래 지금 그대가 보는 나의 모습이 어떠한가. 백장(百丈)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항상 ‘똥’을 치우라고 하셨는데 그대가 보기에 나의 온 몸이 그대로 똥통이지는 아니한가. 끊임없이 똥을 퍼내는 일이 수행이라면, 지금, 내가 오히려 퍼먹고 있는 똥은 누가 버린 똥인가. (똥-분별심, 집착심) 부처가 버린 똥인가, 조사가 버린 똥인가. 내가 지금 분별심이 있다면 부처의 말도, 조사의 말도 모두가 다 똥이니, 그대, 다시 나보고 어떠한 똥을 먹으라 할 것인가.
분별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떤 똥이든지 먹겠네. 그것이 소똥이든, 개똥이든, 그러나 그대여 나만이 분별심을 없앤다고 이 세상 사람들이 똥을 다 갖다 버릴 수 있겠는가. 그들이 먹는 똥은 배고픈 똥이요, 핵 똥이요, 공해 똥이요, 산재 똥이다. 부처 똥, 예수 똥이 아무리 좋아보았자 그들에게는 차라리 돈 똥이 제일일 것이다. 내가 아무리 분별심을 없애고 똥을 안 먹는다 할지라도, 청정한 일심(一心)을 이룬다 할지라도, 저들이 똥을 먹고 있으니 어찌 그 구린내가 나지 않을 것이며, 세계가 온통 똥통이니 그 위를 떠도는 나 똥 냄새 안날 것인가. 어차피 똥 먹는 사람들의 똥 먹는 노력 때문에 나 이 땅에 살고 있으니 어찌 홀로 청정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차라리 더욱 더 열심히 민중들의 똥을 먹는 일이 오늘의 나의 분별심을 없애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여, 내가 오늘 서글퍼하는 것은 그대를 만나지 못함이 아니라 민중의 똥을 더욱 열심히 퍼먹지 못함이 큰 아픔이라네. 민중의 똥 가운데서 그대를 만나지 못함도 슬픔이겠지.
그대를 만나지도 못하고 민중의 중심에 있지도 못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칠흙같은 절망이라네.
백장스님께서는 어느 주지와의 대화 가운데 이런 말을 하였지. “주지께서는 강의하실 때 어떻게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마치 금쟁반에 구슬 굴리듯 합니다 하였네, 그러자 배장스님이 금쟁반을 들어 없애면 구슬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재차 물으니 주지가 대답을 못하였다”고 하였네, 이 문답은 백장스님의 권선사 주지의 경계를 헐어버리고자 하는 데에 그 진의가 있으나, 나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네, 금쟁반은 지금 현실에서 무엇이며, 구슬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였네. 결국 나의 결론은 그대나 나나 불교나 기독교나 철학이나 예수나 부처나 구슬과 같은 존재이며, 우리의 현실적 상황이 바로 금쟁반이라는 점이네, 금쟁반이라는 현실이 가정될 때, 구슬은 움직일 수도 구를 수도 없을 것이네 만약 구슬을 굴리고자 한다면 똥을 금쟁반으로 만들든지 구슬이 똥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물질로 바뀌든지 해야 될 것이라 생각되네, 나의 이야기가 너무 억지인가. 그대가 만약 구슬이 쟁반이 없이 허공중에 뿌려지든지 땅에 떨어지든지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느냐, 구슬은 구슬로서 존재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나에게 반문한다면 석가모니는 저 혼자 깨달았으면 되었지 무엇 때문에 깨달음을 억지로 전해 세상 사람들을 망쳐 놓았는가고 되물어 보겠네. 결국 그대에게 하고픈 말은 똥 속에서 그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고 똥을 떠나 그대를 만난다는 것은 쟁반 없는 구슬과 같은 것이라는 점이네. 백장스님께서 말씀하신 똥을 치우는 일 곧 번뇌, 분별심 등은 민중에 대한 사랑, 민중의 똥을 치우고자 하는 거대한 표현이며, 그것은 민중의 똥을 열심히 먹자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나의 분별심을 없애는 길이라 생각하네.
나의 그대여, 중노릇 하면서 그대를 찾아보겠다고 처음은 꽤나 이곳 저곳을 기웃거려 보았네. 선지식도 만나 너를 찾아달라고 하소연도 하여 보았네. 그러나 그 누구도 너를 만나게 해주지 못했네. 그대는 언제나 내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나와 함께 하여 보지 못하였네. 처음에는 그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밤잠을 설쳐대고 꿈길에서조차 그대를 불러보았으나, 그대는 내 문밖에 그림자로 서성일 뿐 나에게 다가오질 아니했네. 그래서 어느 때인가 하도 지쳐 긴 잠이 들었더니, 너는 그림자조차 봐질 아니했네. 내 오늘 다시 그대를 불러보니 그대가 멀리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대를 부르지 아니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네. 누군가 내 속에서 오욕에 물들지 말라고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늘어놓던 것이 그대임을 이제사 알겠네.
그래, 이제는, 중도 못 되고 민중도 되어 있지 못한 나의 몰골이 그대에겐 어떻게 보이는가 어리석게 보이는가 아니 어리석음은 아닐 게야. 그렇다고 지혜롭다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울 테고. 어리석음은 어리석음 때문에 한 길로 가고자 할 것이니 아름다울 것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맘은 거울과 같은 통찰이 있어서 이름다울 것이니, 어리석음도 없고 지혜롭지도 못한 나는 또 얼마나 가련한가 그러나, 이제, 어떤 똥이든지 열심히 먹을 생각이네.
내 안에 숨쉬는 그대여.
날씨가 추워져 겨울옷을 꺼내 업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네. 사계절의 옷 중에서 가장 옷이 옷다운 역할을 허는 것이 겨울옷이라고. 여름옷 은 옷을 입어야 할 충분한 이유와 근거가 없지. 왜냐하면 아무리 더워도 옷을 벗지 못하는 이유는 옷의 필요성보다는 사람들이 몸을 가려야 한다는 속성에 맞추려 함이지. 물론 옷을 몸을 장식하고자 하는 수단으로(패션)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네. 그러나 옷의 역활이 패션에 있는 것도, 몸을 가리는 일반적 속정에 있는 것도 아닐것이네. 추위 또는 외부로부터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데에 옷의 역할과 입는 목적이 있을 것이네. 옷이 옷의 역할과 목적을 여의고 장식에 치우친다면 그 옷은 존재 가치를 잃네. 나는 사상, 철학, 종교도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하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철학 종교, 사상, 과학 따위가 오히려 옷의 패션과 같은 꼴로 서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깊네. 사계의 옷 중에서 겨울옷을 입을 때에만 내가 기뻐할 수 있고 그 기분이 상쾌함도 겨울옷이야말로 입는 의미를 나에게 확실히 전달하기 때문이요, 내가 필요하고 세상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마찬가지로 사람도 사람의 역할이 있겠지, 사람의 역할이란 바로 추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겠지. 나와 그대가 만나고자 함도 사람으로서의 본분사를 다하자는 것이요, 중이 된 것도 사람의 역할을 올바로 찾아보자는 것이었겠지. 따라서 나와 그대는 사람의 역할을 올바로 실천하였을 때, 참된 만남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네.
그 오랜 시절을 나와 함께 하여주고 죽을 때까지 내 안에 머물 그대여, 그대 나를 사람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나 이 세상을 통하여 그대를 만날 수 있도록 우리 언제나 서로 탁마하면서 사바의 끝을 걸어가세. 그리하여, 마침내, 너와 나 하나가 되어 보세.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그대여, 사람들은 그대를 보고 진아(眞我)라고 하고 마음〔心〕이라고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나, 그대는 나의 절대 그리움이요, 법화이요, 세계이며, 수호신이네. 비록 그대가 머무는 방-육체의 나-이 병들었고 온갖 거미줄과 똥으로 가득 싸여 있을지라도 나를 위해 항상 그 안에 머물러 주게.

날씨가 춥네.
날씨가 추운 것인가, 내가 추운 것인가,
그대가 추운 것인가.
아! 세상이 춥구나.

내 안의 한 무더기 똥. 그 똥을 치우러 세상 속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똥에 관한 이야기는 백장록에 있다. 백장스님께서 말씀하신 똥은 깨달음의 경계를 표현한 말이다. 사물을 어느 경지에서 인식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비유한 똥은 어느 경지에서 인식하느냐의 문제보다도 왜 그러한 경지에 있느냐 혹은 경계를 얻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