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경전읽기 모임과 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돈연 1989년 12월 94호
우리는 그 십년 동안 무엇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서 완성이 가능하도록 토대를 쌓아 주는 역할로 만족하리라는 서원이다. 경전읽기 모임은 서두르지 않는다라는 것은 분명하다. 경전읽기 모임의 정신은 ‘먼저 깨달으라. 그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라’이다.
이 정신은 부처님의 일생을 꿰뚫고 있는 삶의 태도이다.

수중에 백오십만원이 있었다. 여론조사를 하기 위해 금산사를 가다가 교통사고를 만나 병원 신세로 그리고 투병생활로 일년을 보냈다. 그 사이 함께 일하자고 출발했던 도반들은 다 빠지고 혼자가 되었다. 그래도 시작했다. 속가 제자 두 사람이 함께 거들었다. 창덕여고 앞, 라면집 하다 그만둔 조그만 두평 반의 가게는 전세금 백오십만원에 월세가 칠만원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그 질 좋은 삼양라면을 식량 삼아 줄창 먹으며 일하고 도 일했다. 경전읽기 모임이라는 이름을 만들고 훈민정음에서 글자를 뽇아다가 제호를 싸고 「깨달음」을 편집하고 그리고 발간하였다.
법정스님은 긴가 민가 하면서 도와 주셨고 지현스님과 무비스님 영조스님은 부산 송도 앞바다 모래사장에까지 끌려내려가 뜨거운 햇빛 아래서 토론을 하고 그리고 태준이네 집에서 밤 새워 토론을 했다. 김인수 거사도 댓바람에 불려나와 이것 저석 거들었다. 처음에는 돈도 없고 원고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품어 오던 생각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빈 책을 만들었다. 그것을 천권쯤 만들어 싸드록 다니며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꼬시기 시작했다. 설명서도 만들고 엽서도 만들었다. 몹시 짬진 두 제자들 덕분에 만들어지는 안내서들이 신선하고 깔끔했다. 신문들이 뭘 잘못 봤는지 덩달아서 기사를 쓰는 바람에 8월인가 한달 동안은 매일 백여 통 이상의 전화를 받았다. 주소를 불러주는 대로 써 놓았다가 나중에 일년 동안 책을 보내주었는데 그 수효가 팔백 명이었다. 일년 후 회비 만원을 내라는 독촉을 했더니 그중 한 칠백 명쯤이 떨어져 나갔다. 확실히 호기심만으로 불교 지방ㄴ에서 공부해 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안 것도 그 때였다.
봄부터 준비했는데 그해 9월에 「깨달음」1호를 냈다. 변형 국판 35쪽이었다. 처음엔 1,500부를 펴냈다. 내자마자 다시 내고 또 내야 했다. 원고료도 처음엔 삼천원씩 하다가 홧김에 오천원으로 올려버렸다. 왜냐하면 원고에 투자하는 것이 출판문화를 건전하게 하는 것이라는 평소의 신념을 실행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일년에 지나갔다. 무비스님의 말씀에 따라 회원이라 부르지 않고 가족이라 부르기로 했다. 가족이 삼천 명으로 늘고 발행부수도 사천부 정도 늘었다. 88년 온 나라가 올림픽 열기로 들떠 있을 때 우리는 편집실이 철거되어 이사를 해야 했다. 올림픽을 위한 도로정비사업 때문이었다. 재동 시대가 끝나고 사간동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어떤 분의 호의로 19명의 저택(?)을 오년 동안 빌려 쓰기로 했다. 그분들은 미국에 계시는 분들이었다. 여기서 다시 일년이 지났다. 가족은 삼천삼백 명으로 늘었고 발행부수는 육천 부로 늘었다. 가족들 말고 군 법당과 교도소에 무료로 보내고 또 절에서도 단체로 구입을 해 교재로 쓰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일년에 열 번 발행한다. 일년에 두 달은 편집실이나 가족 모두가 쉬기 위한 것이다. 「깨달음」은 일년에 한번씩 합본을 낸다. 서울에서는 한국일보 강당에서 합본출간기념 법회를 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법정스님을 모셨다. 스님은 11월 7일 법회를 봐 주시고 인도로 떠나셨다. 삼십년 승려생활의 또 다른 계기를 맞이하기 위해 부처님의 나라로 성지순례를 떠나신 것이다.
「깨달음」은 합본을 낼 때마다 뒤에 50쪽 정도의 사전을 편집한다. 그 사전은 우리말로 한다. 괄호 안에 한문을 넣지 안기 때문에 불편한 점도 있지만 눈여겨 보면 좋은 점이 많다.
이것도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큰 일의 어떤 기초 작업이라 여겨져 힘들지만 계속할 계획이다. 「깨달음」을 한 이십년 정도 만들고 나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경전의 체계있는 번역 작업이 마무리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 때가면 그 작업을 토대로 여러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여러 교재가 유일하게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십년 동안 무엇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완성이 가능하도록 토대를 쌓아주는 역할로 만족하리라는 서원이다. 단지 우리의 삶이 그것을 위해 쓰여졌다. 할지라도 충분하고 넉넉할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
경전읽기 모임은 서두르지 않는다라는 것은 분명하다. 경전읽기 모임의 정신은 ‘먼저 깨달으라. 그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라’이다. 이 정신은 부처님의 일생을 꿰뚫고 있는 삶의 태도이다. 부처님은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 가신 분이다. 태

어나신 룸비니도 이름없는 한적한 시골이고 돌아가신 쿠시나가라도 궁벽한 마을이다. 살고 죽는 것이 도무지 삶의 끝과 시작이 아니라는 철저하게 열려진 삶은 모두가 내 집이고 어디든 내 땅이라는 것이다. 열린 정신은 소유에 집착이 없다. 때문에 전도 여행중 한적한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신 부처님의 일생이야말로 구도자에게는 뜻깊은 삶의 표본이 아닐수 없다. 나그네로 살아가면서도 행복한, 돌아다니면서도 늘 가득한 삶의 내부 그것이 구도자요 수행자의 참된 면목일 수도 있다. 산중에 오래 앉아 수행하다 보면 타성에 젖을 수도 있다.
산중 수행은 수행의 구경일 수가 없다.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잠시 들린 어떤 기간의 한도량일 뿐이다. 경전읽기 모임을 도우면서 나는 내 공부가 가마득히 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 공부는 이미 산중으로 돌아갈 만큼 용기를 잃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나는 여전히 경전 잃기 모임을 위해 일할 것이고 그리고 때가 되면 또 실 없이 훌쩍 떠날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내 삶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또 얼마나 요동치며 흥분할 것인가. 참 재미있을 것 이다.
그러나 올해는 저 영원한 청춘의 도시 광주의 열린 신자들이 그토록 촉구했던, 「깨달음」을 쉽게 펴내기 에 전력을 투구 할 생각이다. 솔직히 말해 편집에 소홀했으니까. 광주의 불자들이여 90년의 「깨달음」은 쉬워질 것이다.
그 뜨거운 태양 아래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순례를 끝내고 저문 쿠시나가라에서 나는 이 원력을 부처님께 드렸다. 천성이 게으른 저는 다른 것은 못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한가지 일만은 하겠습니다. 부처님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