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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을 모신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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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큰스님을 생각하며 - 원소 1993년 12월 142호
십육 년 전에 해인사 큰절에 입산하여 여섯 달 동안 행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백련암의 스님 가운데에 한 분이 방위병으로 복무하는 바람에 일손이 부족해서 필자가 대신 암자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 때 처음 뵈온 성철스님은 눈빛 형형한 호랑이 상이었다. 인사를 드리니 젊은 놈이 머리가 훌렁 까졌다고 놀리며 크게 웃으셨다.
그 다음 날부터 백련암에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큰스님들은 모두 대자대비한 줄 알았는데, 성철스님은 일상생활이 한 점 흐뜨러짐 없이 철저히 사는 분이었다. 우리 행자들에게도 모든 일에 철저함을 강요하였다. 혼난 기억만도 몇 가지 있다. 전날 울력을 만히 해서 피곤이 겹쳐 새벽 예불을 두 번 빠졌다가 불벼락을 맞은 일과 감자를 두껍게 깎다가 신도들이 갖다 주는 시주물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다고 혼난 일, 물건을 제자리에 반듯하게 정돈하지 못한다고 암자 대중 모두가 크게 꾸지람을 들은 일들이 떠오른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큰스님 방의 온도를 겨울에는 섭씨 이십 도를 맞추어야 하는데 어림짐작으로 장작을 조금 많이 넣었더니 “야, 이눔 자석아 볶아 지길래(죽일래)”하고 호통을 치셨다. 그 다음날 주눅이 들어서 장작을 적게 넣었더니 냉방이 되어 버렸다. “이눔 자석아, 얼카 지길래” 하며 또 다시 호통을 치셨다. 이렇게 몇 번 꾸지람을 듣다 보니 장작불로 방 온도를 맞추는 데는 도사가 되었다. 하도 오고 가며 터지다보니 큰스님 표정만 봐도 나를 부르겠다 하는 정도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하루는 큰스님이 마당에 계시는데 금방 부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큰스님께 합장하고 그 앞에 갔더니, “이 녀석이 타심통을 했나. 안 그래도 일 시키려고 부르려던 참이다”하셨다.
큰스님은 상좌들에게 칭찬을 하는 법이 없었다. 꾸지람 듣지 않으면 그것이 칭찬인 줄 알아야 한다. 큰스님은 공부뿐 아니라 모든 일상 생활을 정신 바짝 차리고 성심성의껏 할 것을 늘 강조하였다.
백련암에서 일 년 동안의 행자 생활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기 며칠 전 일이다. 독신으로 평생 승려 생활을 할 자신이 도무지 서지 않아서 하산하여 재가 불자가 되는게 좋지 않나 하고 망설이던 중이었다. 부엌에서 군불을 지피고 있으니까 큰스님이 지나가시면서, “인생의 일대사를 해결하는 승려 생활처럼 보람 있는 일은 없다. 우리들 인생이란 너무 짧은 것이다. 쓸데없는 망상 말아라”하고 던지듯이 말씀하는 것이 아닌가. 큰스님의 격려에 힘입어 다시 마음을 고쳐 먹고 사미계를 받아 지금까지 승려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십육 년이 되는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천성이나 취향이 승려 생활에 딱 맞는 것 같고 공부가 잘 될 때는 하산하지 말라던 큰스님의 암시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큰스님의 일상 생활은 서양의 철학자 칸트처럼 시계 초침과 같이 정확하고 규칙적이었다. 새벽 두 시쯤 일어나서 세시에 백팔참회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무염식의 소식으로 공양을 드셨다. 물론 간식은 조금도 하지 않으셨다. 하루 두 번 산책하고 채전밭을 돌보는 시간 말고는 밤 열 시까지 하루 종일 참선과 독서로 소일하셨다. 우리들에게 “수행자는 절대 게을러서는 안 된다. 시간을 자기의 생명처럼 여기고 아껴 써라”하고 늘 당부하셨다. 그리고 승려는 신도들이 갖다 주는 시주물로 살아가니 언제나 검소하고 절약하며 살라고 강조하셨는데, 큰스님 스스로 평생 회색 광목옷만 입으셨고 양말과 내복도 손수 기워 입으셨다. 겉에 입는 누더기 두 벌은 오십 년 이상을 기워 입으신 것이다. 상좌들의 성화에 못 이겨 고급 화장지를 쓰기 전에는 시장에서 멸치 싸는 재생지를 화장지로 사용하였다. 또 젊은 보살들이 삼천배를 하러 오거나 젊은 비구니 스님들이 친견하러 오면 절대 혼자는 못 오게 하고 두 명 이상 짝을 지어 오게 해서 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백련암에 들어올 수 없게 했다.
큰스님께서 정치인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스님은 우리나라 정치인들 가운데는 입으로는 애국애족과 민주주의를 부르짖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나라나 국민이야 어떻게 되든 오로지 사리사욕만 채우는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다. 그래도 큰스님께서는 박정희 대통령은 좀 낫게 평가하는 편이었다. 독재는 했지만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국민들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오천 년 가난을 물리친 대통령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해인사 큰절에 참배하러 왔을 때도 백련암에서 두문불출하여 내려가지 않으셨고, 오공화국 때 청와대에서 몇 번 초청했지만 그 때마다 종교인과 정치인은 길이 서로 다르니 만날 필요가 없다하시고 응하지 않으셨다. 그 때 상좌들에게 말씀하시길, 역사적으로 볼 때 수행을 하는 종교인이 정치인과 너무 밀착하면 필요에 따라 서로 이용해 먹게 되어 결국 타락하게 된다고 하셨다.
큰스님을 모시고 산책하는 길에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중에 나타나는 “동정일여의 경지는 어떤 것입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스님께선 상세히 설명을 해 주시면서, 스님 자신은 참선을 시작한 지 일 주일 만에 동정일여의 경지가 나타났다고 말슴하셨다. 큰스님은 어떤 목표를 정해 놓으면 반드시 성취하고 마는 분이다. 큰스님은 불교 이론에 대해서도 해박한 분이지만 평생 주장하신 돈오돈수설은 절대로 이론은 아니며 스님 자신의 수행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호랑이 같은 큰스님께서도 어린애들을 보면 얼마나 좋아하신는지, 완전히 동심으로 돌아가곤 하셨다. 그리고 수행을 옳게 하고 바르게 사는 스님들이 큰스님을 친견하고 돌아갈 때는 수행력이 높든지 낮든지, 유명하든지 유명하지 않든지 꼭 몸소 스님을 손수 대문까지 전송하셨다. 큰스님께서 연세가 드시고 건강이 악화 된 뒤로는 지나칠 정도로 신도 접견을 제한하시는 것과 정치가 경직되던 오공화국 때 시국에 대한 발언을 하셔서 정치인들을 각성케 하고 국민들 속 좀 시원하게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몇 차례 진언을 드리자 “이눔이, 제 앞길도 못 치루면서 나한테 충고한다.”하시고는 나를 백련암에서 내쫓았다. 그런데 그 뒤에 필자가 일본 교오또에 있는 화원대학 국제선학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할 때 상좌들을 시켜 송금을 해 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은 일이 있다.
가까이 모셨을 때는 너무나 엄한 분이라서 그다지 인간적인 정을 느낄 수 없었는데, 다른 회상會上에 가서 살아보니 오늘날 그런 스승이 다시 없음을 알았다.
이젠 앞으로 수행하면서 장벽에 부딪칠 때마다 스승을 잃은 허전함은 더욱 깊을 것 같다. 그러나 가까이 모시면서 눈여겨보았던 큰스님의 훌륭했던 모든 점들을 내 생활에 잘 받들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데 더욱 매진함이 제자된 도리임을 굳게 믿는다.

원소스님은 해인사로 출가하였고 성철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해인사 강원과 율원,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제방 선원에서 정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