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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사 광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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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9년 12월 94호
목동 청소년회관에 들어서면 신바람이 난다. 물론 목동 신시가지 고충아파트사이에서 나부끼는 불교기가 반가와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갈하게 꾸며진 건물 안에, 꼭 놓일 곳에 놓인 듯싶은 벽화며 도자기 하나하나가
우리 스님들의 손끝에서 빚어진 것들이며, 층층이 운영되는 각종 시설이 전국 비구니회 소속 스님들이 흘린 땀내음을 대번에 느낄 수 있게 꾸며져 있음에서 더 그렇다. 종종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는 스님들이나, 스치고 지나면서 합장배례 잊지 않는 직원들의 모습도 봄날의 부산함처럼 신선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제 불교 집안에서도 뭔가 제대로 일하고 있다’고 하는 안도감 섞인 환희심 때문이 아니던가.
그곳에서 행해지는 어떤 행사이건 법복 입은 스님들이 운영한다는 것은, 입으로 부처를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포교가 아닐 수 없다.
시 (市)에서야 여타의 종교활동은 엄금한다고 했다지만, 성직자의 대화가 어째 불교 이야기만 쑥 빼놓고 이루어질 수 있으랴.
목동 청소년회관은 서울시에서 지어 전국 비구니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불교계 휴일의 복지기관이다.
개관한 지 일년 남짓한 이즈음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꽤나 인기있는 명소가 되어버렸다.
이 회관의 하나뿐인 수익사업은 수영장의 운영인데, 값싸고 시설 좋은 이곳을 예약하기 위해 접수 하루 전 날 초저녁부터 이불보따리를 젊어진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마치 귀성열차 예매를 위해 서울역에 나앉은 귀성 인파의 행렬 같기도 하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여건은 어렵기만 하다. 삼백 석이 넘는 독서실의 입장료가 백원이고 보면 냉난방비만도 크나큰 적자가 아닐 수 없다. 넉넉하지 못한 자금 때문에 용기 있게 다양한 계획을 세우는 데 압박을 받기도 하고, 지역 내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사업도 쉽사리 진행할 수 없는 악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초기에 단 세 사람만 모여 공부하던 ‘경전교실’ 이 이제는 삼십여 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고, 공부를 시작할 때에 독경과 찬불가도 할 만큼 자리를 잡았다. 자원봉사자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직원들도 이젠 모두 명실상부한 불자가 되어 월요일 여덟시 반이면 미륵보살님 사진 앞에서 예불을 올린다.
얼마 전부터는 아동심리를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원스님을 중심으로 상담실을 운영하여, 지역 내 청소년과 학부모, 어린이를 가진 부모들의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고 있으니, 이쯤 되면 굳이 목동회관 앞에 가지 않고서도 신 바람이 날 만하다.
광우(t雨)스님은 이곳에서 관장직을 맡고 계시다. 이 일을 맡은지가 불과 넉달째인지라, 잘된 일은 모두 전임 관장 스님의 다대한 노력 덕분이라며 얼굴을 붉히지만 부처님의 자비 사상으로 이 나라 사회복지 정착에 앞장서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옹골찬 프로그램 개발에 열과 성의를 쏟는 불교계의 큰 어른이신지라, 이곳의 발전에 대한 기대치는 높기만 하다.

부친이 혜봉 큰스님이셨다.
불가와의 인연은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국민학교를 마치자 상급 학교 진학 준비를 하라고 부친이 상주 남장사로 보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서 비구니 스님들 참선수행 모습을 지켜보려니 스스로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속가 나이 열다섯에 광우스님이 되었고, 직지사에서 은사 스님 모시고, 강원 공부를 마쳤다.
광우스님은 잊혀지지 않는 당시의 일화 한 편을 들려주신다.
“열아홉인가 스물이 되던 해인가, 동화사에서 만인기도 동참 회향이 있기 하루 전이었지. 은사 스님이 법상을 차려 놓으시더니 신도들 앞에서 법문을 해보라는 게야.
큰절의 비구니 스님들도 앞자리에 앉아 계신데 말이지. 덜덜 떨면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원해서 나름대로 설법을 폈더니, 뒤에 칭찬은 많이 들었어. 그런데 말야, 법상 위에 오르면 모든 대중들이 절을 하는 법인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건 큰스님들이 눈을 쿡 감고 절을 세번하던 그 장면이지.“
뒷날 문수사의 토굴에서 정진하던 때의 일이다. 방학이면 서울서 공부하는 이들이 내려와 가끔 절에 들러 불법을 묻고 또 토론하기도 했는데, 이 즈음에 현대인을 대상으로 포교하려면 현대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대학 입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주변의 많은 어른들이 진학은 곧 ‘퇴속의 지름길’ 이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승려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도 혼자 결정하였듯이 스스로를 신뢰하며 억척스레 공부에 임하였고, 그리하여 스물여넓의 나이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하였다.
‘비구니 학사 1호’ 로 말이다.

졸업후 남장사에서 ‘포교에 전념하겠다’ 는 원을 세워 백일기도를 마친 뒤 서울 삼선교에 정각사를 지었다. 기존의 사찰을 마다하고 새 절을 지은 연유도 스님다운 고집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곧 현존하는 불교의 다양한 신앙 형태를 가급적 배제하고,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시고 올바른 전법을 해보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바로 믿고 바로 행해 참사람 되자’ 는 목표 아래 운영된 정각사는 기도와 불공을 함께 하는 다른 사찰에 견주어 신도 수가 많지 않은 편이다. 아직 법회가 정착되지 않던 무렵인
오십팔년에 어린이, 중고등학생, 청년부 모임을 만들어 활발하게 불법 홍포에 주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불심을 심어야 그 심성이 옳게 자리잡을 수 있다고 믿어,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하여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여 온 광우스님은 이제 그 목적하는 바를 ‘청소년의 전당’ 목동 청소년회관에서 오롯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고 김동화 박사. 그 분은 광우스님에게 있어 또다른 의미의 어버이시다. 부친의 제자였던
김동화 박사는 대학 진학을 반대하는 어른들을 설득시켜, 광우스님의 대학생활 4년 동안 길잡이가 되어 주셨다. 광우스님이 정각사를 지은 까닭도 ‘포교의 당위성’을 강조하신 그 분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신념 때문이다.
“방대한 저서를 이루신 불교계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근세에 드문 학덕과 인품을 지니신 수행인이셨어. 모범 아닌 게 없는 일상을 이어가며 가족과 함께 예불 드리던 큰 어른이기에 존경심이 대단했지. 그래, 박사님을 기념하는 사업을 하겠노라 의지를 다졌지.”
주위에서 먹고 살기에도 벅찬 절 살림에 무슨 기념사업이냐며 한결같이 말렸지만, 김동화 학술상은 7년째 그 연륜을 더하는 동안 꾸준히 인재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권위있는 사업으로 자리잡았다.
철학과 달라 종교는 실천을 전제로 성립된다. 살림하는 주부들이 적은 월급을 이리저리 알뜰하게 쪼개어 쓰면서 억척스레 저축도 해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억척스러움으로 광우스님은 사찰 재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인재 키우기에, 통신 포교에 온 역량을 쏟느라고 정작 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정각사는 오늘에까지 별반 변화된 것이 없다. 신도들이 불사하자고
내는 성금도 학기마다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장학금으로 지급되고 있는 형편이고 보니, 절 확장에 급급한 이들 통속에서
‘인재 키우는 불사’ 에 헌신하는 스님의 뜻이 더 깊고 커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절을 짓자마자 교계 최초로 ‘통신 포교’ 를 시작했다. 불교잡지라야 월간 「법시」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던 오십년대 말에 시작된 일이고 보면, 가히 대중불교운동에 선두주자격인 일이었다. “신도들이야 절에 다녀가지만 그 가족들은 대개 ‘건성으로 불자’들이지. 남편도, 자녀도 배우고 익혀 실천하는 불교를 이루어야겠다 싶어 달마다 이십 쪽 분량의 「신행회보」를 가정으로 발송했더니, 남편들의 호용이 아주 컸지.
좋은 절에 다닌다고 보살님들 어깨도 으쓱해졌고, 교계의 반응도 뜻밖에 커서 스님네들의 격려가 쇄도하기도 했어.”
이제 잡지의 홍수 시대가 되다 보니 엄청난 불교잡지들 틈에서 전통을 자랑하는 통신포교지는 어쩌면 초라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초기의 고무판에서 지금의 사식으로 바뀐 시간 속에서, 포교지도 계간 「신행불교」로 그 모습을 새로이 바꾸어 배포되고 있다.
비단 신도 가정뿐 아니라 교도소, 군법당, 해외 불자들에게까지 무상으로 배포하고 있으며,
앉은 자리에서 쉽게 소화할 수 있게 부담없는 내용으로 금싸라기 말씀을 전하고 있다.

비구니 스님들은 어떤 일이든 시작만 하면 야무지게 해내고 있음을, 개인적으로 사찰을 운영하거나 뭉쳐서 조직적으로 일을 해내는 것도 비구니들만큼 제 역할을 잘 해내는 무리가 없음을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전국비구니협회는 몇 해 전에 뜻있는 스님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는데, 어느새 전국의 비구니들을 규합한 ‘막강한’ 단체로 그 실세를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목동 청소년회관이다. 비구니 스님들이 아니고서는, 실로 두팔 걷어붙이고 나설 이들이 없었다는 게 일반의 생각이다. 기실, 비구니회 스님들의 가슴 속에 뜨거운 불길로 타오르며 번지고 있는 서원은 ‘비구니회관의 설립’이다.
목동에 총력을 경주하느라 여력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금 정부측과 부지 문제를
상의하는 등 본격적인 ‘비구니회관의 건립’올 위해 차근차근 청사진을 펼쳐나가고 있다.
행자들의 체계적인 교육을 위한 행자교육원, 학승을 위한 기숙사 등 여러 분야에서 포교를 맡아 나갈 비구니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활력 넘치는 장소를 그 비구니회관을 중심으로 일구어볼 생각으로, 전국비구니회의 부회장을 맡고 계신 광우스님은 발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우주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만큼 발달한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건만 일상에서도 남녀간에
법과 제도와 관습에서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불교 집안 또한 그 궤를 함께 하고 있어, 비구와 비구니의 차별은 법에서나 의식에서나 지배적인 편이다.
부처님께서 ‘ 평등한 공동체’를 귀가 닮도록 설하셨는데도 말이다. 광우스님은, 비구니회에서도 이런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해결해 나갈 작정이지만 그에 앞서

비구니들 자신의 자질 향상부터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서러운 일 없이 살아오신 스님이지만 교구본사 주지는 비구여야 한다는 식의 종헌종법의 차별 문제를 비롯하여 사미가 법랍 깊은 비구니에게 절하지 않는 등의 시대착오적인 대우만큼은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아쉬운 일로 여긴다.
광우스님은 그동안 활동 폭이 적던 비구니계 에서 그 길을 넓게 닦아 온 선두주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헤쳐 나오는 세월 동안 참으로 힘겨움과 외로움을 수도 없이 느꼈으리라 짐작된다. 허나 스님은 아주 편안함이 깃든 모습으로 지난 일을 덤덤하게 들려주신다.
그동안 살아온 육십 평생이 ‘포교와 교육’ 에만 일관한 나날인 만큼, 교계의 책임 있는 어른으로서 머리 속에 가득한 욕심과 계획만큼 앞으로도 해내야 할 일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단단하게 뭉쳐 딱 부러지게 일해내는 비구니 스님들이 곁에 있는 덕에 나이 들어 돋보기를 껴야 하는 광우스님의 앞으로의 할 몫은 지나은 시간에 견주면 그리 벅찬 일들만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