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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타바루경(布咤婆樓經)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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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89년 12월 94호
모든 존재는 곧 공(空)이요 공은 곧 모든 존재라고 반야심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여 허무주의자가 되고 만 이들이 있다. 공이란 대립적 개념의 초월임을 알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초월성에 집착함으로써 상대적인 대립으로 다시 끌어내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대립의 현상을 없애기 위하여 불이(不二)라는 관형어를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의 이상을 착각하여 아무 것도 없어진 세계가 열반인 것으로 생각하는 결과로 말미암아 인생을 포기하고 대립의 세계인 현실을 살아나갈 방법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인생의 방관자가 되고 말았다.

부처님께서 사위 (舍衛) 나라 기수급고독(祇樹給孤獨) 동산에 계시면서 어느 날 포타바루 범지의 숲에 나아가셨다.
그 때 포타바루 바라문은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곧 일어나 맞이하면서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사문 고오타마시여 오랫동안 여기 오시지 않았는데 이제 무슨 인연으로 굽히어 오시나이까. 자리에 앉으소서.”
그때 세존은 자리에 앉으사 포타바루에게 말씀하셨다.
“ 그대들은 여기에 모여 무슨 일을 하며 무엇을 강설하는가.”
범지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제 많은 범지와 사문과 바라문이 당(堂)에 모여 이와 같이 다투어 토론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인 (因)도 없고 연 (緣)도 없이 상(想)이 생기고 인도 없고 연도 없이 상이 멸한다. 상에는 오고 감이 있어서 그것이 오면 곧 상이 생기고 가면 곧 상이 멸한다 ‘
또 어떤 범지는
‘명(命)으로 말미암아 상이 생기고 명으로 말미암아 상이 멸한다. 저 상(想)에는 오고 감이 있으나 오면 곧 상이 생기고 가면 상이 멸한다.’
또 어떤 범지는
‘이제 말한 것들은 그렇지 않다. 큰 귀신이 위력이 있다. 그것이 상을 가지고 오고 상을 가지고 가기도 한다. 그것이 상을 가지고 오면 상이 생기고 그것이 가지고 가면 상이 멸한
다’고들 하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말을 듣고 염 (念)을 내었습니다. 사문 고오타마시여, 먼저 이 뜻을 알면 반드시 능히 상지멸정 (想知滅定)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생상멸(想生想滅)의 논(論)을 폈다. 그러자 세존은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저 모든 논자들은 다 허물이 있다. 말하기를 ‘인도 없고 연도 없이 상이 오고 감에 따라 상이 생기고 멸하고, 혹은 명으로 말미암아 상이 생기고 멸하고 또 귀신의 위력이 있어 상이 상하고 멸한다’는 것은 허물이 있다. 무슨 까닭인가?
인연이 있어 상이 멸하는 것이다. 만일 여래가 세상에 태어나서 지진 등정각의 십호를 구족할 때 어떤 사람이 불법 중에 집을 나와 도를 행하여 마음을 덮는 오개 (五蓋)를 멸하고 욕심내고 악한 착하지 못한 법을 제거하여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어 여윔으로써 희락이 생겨 초선 (初神)에 들어간다. 먼저 욕상(欲想)을 멸하고 희락상(喜樂想)을 낸다.
범지여, 이처럼 인연이 있어 상이 생기고 인연이 있어 상이 멸함을 안다.”
부처님께서는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각과 관을 멸하고 속의 기쁨 한마음으로 각도 없고 관도 없어 정(定)에서 생기는 희락으로 제이선 (第二禪)에 틀어간다.
다음은 기쁨을 버리고 닦고 보존하여 생각을 오로지 해 한 마음으로 스스로 몸의 즐거움을 알며 현성의 구하는 바로 생각을 보호하여 청정한 제삼선 (第三神)에 틀어간다.
그 마음 괴로움도 버리고 즐거움도 버려 먼저 걱정과 기쁨을 멸하고 생각을 보호하고 청정하여 제사선에 들어간다.
일체외 색상(色想)을 버리고 성 내는 마음을 멸하고 다른 생각을 생각하지 않아 공처 (空處)에 들어간다.
일체의 공처를 뛰어나 식처 (識處)에 들어간다. 일체의 식처를 뛰어넘어 불용처 (不用處)에 들어간다. 불용처를 버리고 유상무상처 (有想無想處)로 들어간다. 범지여, 저 공처의 상이 멸함으로부터 차례대로 유상무상처의 상이 생긴다. 이럼으로써 인연이 있어 상이 멸하고 인연이 있어 상이 생김을 안다. 저 유상무상처를 버리고 상지멸정 (想知滅定)에 들어간다. 이럼으로써 인연이 있어 상이 생기고 인연이 있어 상이 멸함을 안다.
또 이 상을 얻은 뒤에 이렇게 생각한다. ‘염 (念)이 있는 것은 악이요, 염이 없는 것은 선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할 때 그는 미묘한 상을 멸하지 않고 다시 추(慶)한 상이 생긴다. 그는 또 생각한다. ‘나는 이제 차라리 염행(念行)도 하지 않고 사유(思推)도 일으키지 않으리라’ 고. 그는 염행도 하지 않고 사유도 일으키지 않으므로 미묘한 상도 멸하지 않고 추한 상도 생기지 않는다. 그가 염행도 하지 않고 사유도 일으키지 않아 미묘한 상도 멸하고 추한 상도 생기지 않았을 때 곧 상지멸정에 들어간다.

어떤가, 범지여, 그대는 본시부터 일찍 차례대로 상을 멸하는 인연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이러한 법을 우리 불법의 현성법 중 차제상멸상징 (次第想滅想定)이라 한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하나에 하나를 더해도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 있다. 하나를 쥐고 있다가 다를 것을 잡으려면 그 하나를 놓아버리고 하나를 잡아야 바로 잡히는 경우도 있다. 물(水)은 한 방울 한 방울이 합쳐져도 역시 한 개의 물방
울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물방울이 모여도 여전히 하나일 뿐이다.
하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 있어서의 시간의 연장선상에 놓인 수많은 인식과 상황들도 모두 용해되어 하나의 경험으로 삶으로 인격으로 해서 결국 큰 합일체(合一體) 속에 용해되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사회의 풍조 내지는 가치관에 많이 물들어 있는 오늘의 시대상처럼 내가 아니면 남이요, 우리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 때문에 둘로 갈라서고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 속에서는 공감각(共感覺) 인들 존재할 리가 없다.
이런 슬픈 바람의 이야기가 한두 가지에 그치랴. 슬픔의 종자를 몰고 와서 치받치는 갈구와 욕망의 꽃잎들을 나부끼며 유혹하던 바람이 잦아들자 이제는 밤을 지새우며 하나씩 떨어지는 나뭇잎의 작은 소리에도 무심할 수 없는 섬세한 감수의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가을이면, 건조한 의지가 차갑고도 무거운 관념을 몰고와서 아무데고 산이란 산을 고운 단풍으로 수놓을 때면 사람은 참지 못하고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설익은 관념의 숙취를 앓는다. 감상의 밑둥을 뿌리채 뽑아내어 밤을 가로지르는 만남이며 불볕 같은 사막을 건너가는 바람. 그뿐인가 태평양 인도양의 오대양과 육대주를 넘나드는 상념의 바람은 분명 신(神)에 의한 것이 아닌 인과 연에 의한 것임을 현성법에서는 말하고 있다.
어떤 결합도 자신을 끌어올리고 상대를 일으켜 세우려는 정력이 없이는 영위 되 지 않는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려놓고 관계를 엮어 가는 것이 인연이다.
이 지구상에서 누구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오직 일회적인 것이라는 운명의 규정 아래 살아간다. 현재의 상태를 늘 불만스럽게 짜증내면서 스스로 비참하게 하고 그 날카로운 이빨로 주변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상처 입혀가는 불행한 주인공일수록 인연의 법을 모르는 혼미 속에 뛰어들어 있다. 이러한 어둠의 부 자유에서 밝은 지혜로 들어서는 것이 인연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어느시대, 어느사회에서든 공감대와 합일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평화나 자유는 발 붙일수 없었다.
흔히 첫출발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모처럼의 소중한 믿음을 알차게 영글도록 노력해나가는 일이다. 부처님이 인과 연을 나누어서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생각(想)이나 숙명(命)이나 큰 귀신에 있어서 다분히 저들의 오고 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라는 범지의 생각은 불법에서는 부정되고 있다. 우리의 현성법에서는 인과 연에 의하여 차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질이 가지는 범주이거나 시간이 가지는 종횡적인 것이 어떻게 보면 공식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만남이 최상의 것이 되리라는 것도 영원히 정답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수행의 차제를 따라 상올 멸하고 염을 없음으로써 상지상멸정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게 불어오네 어디론가 사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바람은 담길 곳이 없는 세상 끝까지 달려간다. 바람은 여러 가지 뉘앙스도 가지고 있다. 희망의 뜻으로 쓰이는 바램도 ‘바람’ 이 목적을 가진 ‘임’ 이라는 의미 일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정치 바람의 열기가 식어 가는가 싶을 때는 노사분규의 직장에 바람, 외제바람에서부터 학원가의 치맛바람이며, 고추 파동이다 보리나 쌀 수매가 문제다 하는 농촌바람, 도시바람 할 것 없이 그 많은 바람들이 한결같이 끝 닿는데가 없이 허공 중에 스쳐가는 바람처럼 메아리되어 오는 일 없이 언젠가 모르게, 어디선가도 모르게 그냥 잦아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