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삶의 겪음이란 아주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터득의 바램이 그대로 종교로 불리워 지는 현실에서 보면 종교란 실은 터득의 완결된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 완결에의 지향이 응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인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리라는 규범을 그런대로 마련할 수 있고, 또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그 규범일법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종교인은 종교를 삶 전부로 살아야 한다.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종교를 그 가르침의 오묘한 뭇과 풀리어 가는 논리를 쫓아 이해 할 뿐 그밖에는 아무 것도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다. 지성적인 태도만으로 종교를 살려고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내 삶의 슬픔과 즐거움이라고 할 어떤 정서적인 쪽에서만 종교를 받아드리려 한다. 그래서 종교는 처음부터 느낌이지 배움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저 믿기만 하면 다된다고 하는 의지적인 절규만으로 종교를 지니려 하기도 한다. 믿음을 위해서는 지성도 침묵해야 하고 감성도 잠을 자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자리가 제각기 일리가 있지만 삶이 그렇게 나누어질 수 없듯이 종교도 그것이 아주 구체적인 삶자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뉘어진 어떤 하나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사랑이란 지적인 판단도 아니고 감성적인 환회도 아니며 의지적인 소유일 수도 없다. 그 하나 하나가 사량일 수도 있지만 그 셋이 모두 하나로 살아 숨쉬는 사랑이 아닐 때면 그 사랑은 온전한 것일 수가 없다. 사랑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신앙은 이른바 전인격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편리한 환상만을 쫓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생각해보자. 신통력이란 것이 없을 수 없고 기적이란것이 때로 일어나는 것이 삶의 현실이다. 아직 설명을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런 현상이 있다는 것은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글쩨 언제 껄명이 다 이루어질런지는 알 수 없어도 아무튼 기이한 어떤 힘의 실현이 인간의 삶 속에서 종교적인 후광을 입고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별로 부정하고 싶지가 않다. 부정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려 감나무 밑에 앉아 있듯이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의미있는 삶을 터득해 살고 싶으면 그러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이념일 때도, 생활일 때도, 내 질병의 고통일 때도 다르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종교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를 빙자한 게으름이고, 신앙을 구실로 삼은 아주 어리석은 꾀에 지나지 않는다. 맹목적인 몰입이나 자기를 통어하지 못하는 들먹임이나, 광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독선적 태도는 도대체 종교가 아니다. 차근하게,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노력하고 살면서 배우고 느끼고 주장하는 가운데 터득을, 살게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그것이 종교인 것이다.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그런 신앙을 싫어해서가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삶의 꼴이 아니기 때문에 못된 것이다.
둘째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종교가 터득하는 삶이 나로부터 우리로 넓혀져 나와 우리가 모두 한울 안에 담길 수 있어야 그것이 제대로 종교인답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태어나기를 홀로 하고 죽기를 홀로 해야 하는 삶의 모습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실존의 처절함 때문에, 종교가 빚는 터득이 내 문제에서 비롯하여 그렇게 되돌아가는 것이 틀린 일일 수는 없다. 그러나 삶이란 홀로 그러나 여럿이서 사는 것이다. 물론 여럿이서, 그러나 홀로 사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 속에서 중요한 것은 내 터득, 곧 내 신앙은 나를 담은 우리 모두에제 미치지 않으면 그 터득이 참된 것일 수 없겠다는 사실이다.
사회적인 실폰의 문제, 역사적 상황의 문제라고도 할 온갖 커다란 삶의 덩이에다 나 자신의 실존에다 쏟는 것과 꼭 같은 마음이 기울여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를 보살행이라 하기도 하고, 이웃사랑 이라고도 하는데 이 경우에도 이러한 계율을 준수해야 하는 것은 그 종교가 그런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을 책하거나 벌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정말로 사람이 사는 참모습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를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삶을 투시하는 그옥환 자세로다 그런것 아니냐는 투의 한마디로 끝나서는 안되는 문실한 구체성을 지녀야 한다. 인구의 문제도, 사회정의의 문제도, 생태학의 문제도, 명화의 문제도 마구 불들고 씨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터득의 이름으로 자기기만을 합리화하는 위선에 빠지게되기 쉽다.
물론 우리가 그러한 구체적인 관심에서 야기되는 특정집단의 이해(利害)가 종교라는 이름의 진실에 의하여 현란하게 잭철되는 경우도 없지 않음을 겪고 있지만 그렇게 될 위험 때문에 종교를 나와 우리가 아울러 담긴 커다란 울에 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주 서글픈 일이고 종교를 스스로 버리는 일일 수 밖에 없게 된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종교인이 되어 올바르게 종교인다옵기 위한 규범으로 두 가지를 살펴보았다. 종교가 편리한 환상이어서는 안되겠다는 것, 종교가 홀로와 여렷을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것이 그것이다.
생각해 보자. 종교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한 일언가? 스스로 삶을 터득할 수 있음이 사람의 삶에 본디 스며있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삶을 겪으며 어쩔 수 없이 아픔과, 부끄러움을 되씹어야 하는 인간에게 참으로 본질적인 터득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종교인일 수 있음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가장 큰 참인 것이다.
이제 봄이 뚜렷하다. 꽃이 피고, 여름이 무성해지면 곧 가을이 풍요로울 것이다. 그러면 겨울이 회고 차게 뒤덮여질 것이고, 그리고 또 봄이 올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살만한가! 아픔이 없어서가 아니다. 아픔이 아프도록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