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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이며 어떻게 믿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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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정진홍 1986년 03월 49호
해가 지면 잠자리에 눕는다. 아침이 되어 해가 뜨고 하루가 비롯한다. 먹고 마시고 만나고 헤어지고 일을 벌리고 다듬고 다투고 웃고 슬프고 흐뭇한 세월이 흐른다. 그러다가 땅거미가 지고 그렇듯 삶이 크게 끝나는 벼랑에 선다. 마침내 우리는 아침도 저녁도 없는 끝을 맞아 그 끝을 살며 없음에 이른다.
삶이란 이러하다. 거기 그 흐름에 어떤 마디가 있다해도 그것이 그리 큰 거침일 까닭이 없고, 그 흐름에 소용돌이 있어 온통 삼켜지는 여울에 이르러도 그것이 지닌 짧은 날들 이사 그래지지 않을 까닭이 없으니 그것이 대수로울 수가 없다. 온갖 굽이와 높낮이를 겪으며, 비롯한 흐름에 실린 삶은 어차피 이렇게 흘러 물결 위의 자국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삶이란 참으로 이러한 것이다. 그 비롯함이 흐름에 씌어진 글씨같이 그렇게 이루어졌었고 그 같남이 또한 흐름에 씌어진 글씨처럼 그렇게 지워진다. 그러나 삶은 그러한지 몰라도 삶의 겪음을 그러하지를 않다. 겪음은 그윽한 바라봄을 담지 않는다. 그래서 삶의 처음과 끝이 그 긴 흐름을 가운 데 삼아 이어진 모두를 보여주지 않는다. 겪음은 지금 여기와 딱붙어 있어 처음과 끝이 없는 어떤 절대를 살게 해줄 뿐이다. 흐름의 지금 여가의 한 마디가 그저 온통 그것인 양, 그것 밖에 없는 양 절실한 것이다.
삶은 그것이 그윽히 한꺼번에 보이지 않을 때 이처럼 답답하고 한스러워진다. 아픔이 일고, 솟구치는 미움이 걷잡을 수 없어지고 벽에 머리를 사뭇 부닥쳐야 하는 막힘을 겪는다. 무의미라고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역겨운 삶의 모습만이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겪음이 지닌 지금 여기가 꼭 이렇게만 되어져 펼쳐지는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도 즐거움이 있고 뿌듯한 만족이 있고 간지럽고 따스한 사랑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것들일컬어 긍정적이라고도 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도 할 그런 쪽은 오래지를 않는다. 오래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속임수를 담은 듯 겪어진다. 그것은 아무래도 바탕, 그 밑바닥의 참 모습은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
삶의 겪음, 그 현실성이란 그렇게 지녀진다. 그것을 옛부터 사람들은 고(苦)라 부르기도 했고 죄(罪)라 일컫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골 삶의 모두가 아님을 사람들은 안다.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런 터득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처음과 끝을 아울러 꿰뚫어 보면서 고통이 고통이되 고통이 아님을, 그러나 고통이 아니되 여전히 고통임을 깨우쳤고, 죄가 죄이니 죄「아님의 현실이 이루어지고, 죄아니게 죄일 수 있는 현실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터득, 그 깨달음, 그것이 아주 투명하게 내게 지녀질 수 있는 문화를 살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라 이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종교란 삶의 본디 모습에 대한 터득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삶에 대한 희회덕거리는 낙관도 아니고, 삶의 현실에 대해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어야 견디는 비관도 아니다. 그 모두를 다 이겨 넘어 삶을 삶으로 그윽히 보고 안는 삶 그것 자체이다. 때문에 종교는 어떤 때, 어떤 곳에서 이리 저리한 까닭이 있어 비로소 생긴 현상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종교가 사회라고 하는 인간의 삶에 뿌리를 둔 것 이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의 심성이 지닌 어떤 요소에 종교가 비롯할 씨앗이 심겨진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아예 종교를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련해 놓은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물이란 보는 이의 자리가 있고 또 그 눈길이 서로 꼭 같지 않을 테니까 그런 여러 생각들이 종교를 향해 말해지는 것을 탓할 까닮은 없다. 또 생각해 보면 그런 눈길들이 아주 그릇된 것도 아니다. 어떤 쪽에서 보면 그런 모습이 뚜렷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란 처음부터 삶의 본디 모습을 이루는 것이었지 언제 어디서 어떤 일 때문에 삶에 덧붙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인간의 의식의 현상이지 역사적 단계의 어느 특정한 문화현상은 아니라고 하는 주장을 귀하게 받아드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처음부터 사람들이 종교를 「종교」래 했을 리는 없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종교라는 말흠 삶의 본디 모습을 터득하여 그 참된 삶을 살려는 온갖 삶에 대하여 두루 쓰는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불교라는 것만이, 또는 기독교나 유대교나 에스람이라는 것이 제각기 어떤 상대적인 관련을 담지 않고 그대로 쓰여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특정한 종교들이 받아드려지는 문화 속에서는 이를 메면 불교나 기독교라는 이름조차 없었을 것이다. 다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길만이 이들의 문화속에 지녀져 있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좁아지고 온통 서 다른 것이 뒤섞일 수밖에 없게 되면서 그 다름을 다름으로 확인하는 필요가 생기게 되어, 그 문화나 지배적인 특성에 맞추어 제각기 다른 이름들이 불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보면 종교가 많고, 또 옳은 종교, 그런 종교가 있다고 서로 말들이 많지만 있는 것은 따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는 뜻이 사람의 삶 속에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사실 뿐이다. 서로 다르다 하는 것은 그 하나의 문화적 표상의 다름뿐인 것법을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불교라 하든, 기독교라 하든 간 무슨 무슨 종교라 하든 끝내 그 종교들이 가 닿는 곳 색다른 자리가 아니다. 한결같이 그곳은 사람이 사람답게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자리이다. 다시 말하면 삶의 처음과 끝이 한꺼번에 그윽히 꿰뚫어 보여지면서 부처도, 긍정도 모두가 의미의 실체로 지녀지는 그러한 삶 그러한 삶의 표상을 지난 문화인 것이다.
종교가 이런 것이라면 종교를 지녔다고 “」 종교인의 삶의 모습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러한 물음은 줌 어색하다. 왜냐하면 종교란 처옴부터 터득이고 그 터득한 삶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떠해야 하리라는 규범을 마다하는 것은 그 터득다움을 아예 뭉게 버리는 일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삶의 겪음이란 아주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터득의 바램이 그대로 종교로 불리워 지는 현실에서 보면 종교란 실은 터득의 완결된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 완결에의 지향이 응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인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리라는 규범을 그런대로 마련할 수 있고, 또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그 규범일법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종교인은 종교를 삶 전부로 살아야 한다.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종교를 그 가르침의 오묘한 뭇과 풀리어 가는 논리를 쫓아 이해 할 뿐 그밖에는 아무 것도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다. 지성적인 태도만으로 종교를 살려고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내 삶의 슬픔과 즐거움이라고 할 어떤 정서적인 쪽에서만 종교를 받아드리려 한다. 그래서 종교는 처음부터 느낌이지 배움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저 믿기만 하면 다된다고 하는 의지적인 절규만으로 종교를 지니려 하기도 한다. 믿음을 위해서는 지성도 침묵해야 하고 감성도 잠을 자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자리가 제각기 일리가 있지만 삶이 그렇게 나누어질 수 없듯이 종교도 그것이 아주 구체적인 삶자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뉘어진 어떤 하나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사랑이란 지적인 판단도 아니고 감성적인 환회도 아니며 의지적인 소유일 수도 없다. 그 하나 하나가 사량일 수도 있지만 그 셋이 모두 하나로 살아 숨쉬는 사랑이 아닐 때면 그 사랑은 온전한 것일 수가 없다. 사랑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신앙은 이른바 전인격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편리한 환상만을 쫓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생각해보자. 신통력이란 것이 없을 수 없고 기적이란것이 때로 일어나는 것이 삶의 현실이다. 아직 설명을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런 현상이 있다는 것은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글쩨 언제 껄명이 다 이루어질런지는 알 수 없어도 아무튼 기이한 어떤 힘의 실현이 인간의 삶 속에서 종교적인 후광을 입고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별로 부정하고 싶지가 않다. 부정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려 감나무 밑에 앉아 있듯이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의미있는 삶을 터득해 살고 싶으면 그러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이념일 때도, 생활일 때도, 내 질병의 고통일 때도 다르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종교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를 빙자한 게으름이고, 신앙을 구실로 삼은 아주 어리석은 꾀에 지나지 않는다. 맹목적인 몰입이나 자기를 통어하지 못하는 들먹임이나, 광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독선적 태도는 도대체 종교가 아니다. 차근하게,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노력하고 살면서 배우고 느끼고 주장하는 가운데 터득을, 살게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그것이 종교인 것이다.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그런 신앙을 싫어해서가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삶의 꼴이 아니기 때문에 못된 것이다.
둘째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종교가 터득하는 삶이 나로부터 우리로 넓혀져 나와 우리가 모두 한울 안에 담길 수 있어야 그것이 제대로 종교인답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태어나기를 홀로 하고 죽기를 홀로 해야 하는 삶의 모습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실존의 처절함 때문에, 종교가 빚는 터득이 내 문제에서 비롯하여 그렇게 되돌아가는 것이 틀린 일일 수는 없다. 그러나 삶이란 홀로 그러나 여럿이서 사는 것이다. 물론 여럿이서, 그러나 홀로 사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 속에서 중요한 것은 내 터득, 곧 내 신앙은 나를 담은 우리 모두에제 미치지 않으면 그 터득이 참된 것일 수 없겠다는 사실이다.

사회적인 실폰의 문제, 역사적 상황의 문제라고도 할 온갖 커다란 삶의 덩이에다 나 자신의 실존에다 쏟는 것과 꼭 같은 마음이 기울여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를 보살행이라 하기도 하고, 이웃사랑 이라고도 하는데 이 경우에도 이러한 계율을 준수해야 하는 것은 그 종교가 그런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을 책하거나 벌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정말로 사람이 사는 참모습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를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삶을 투시하는 그옥환 자세로다 그런것 아니냐는 투의 한마디로 끝나서는 안되는 문실한 구체성을 지녀야 한다. 인구의 문제도, 사회정의의 문제도, 생태학의 문제도, 명화의 문제도 마구 불들고 씨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터득의 이름으로 자기기만을 합리화하는 위선에 빠지게되기 쉽다.
물론 우리가 그러한 구체적인 관심에서 야기되는 특정집단의 이해(利害)가 종교라는 이름의 진실에 의하여 현란하게 잭철되는 경우도 없지 않음을 겪고 있지만 그렇게 될 위험 때문에 종교를 나와 우리가 아울러 담긴 커다란 울에 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주 서글픈 일이고 종교를 스스로 버리는 일일 수 밖에 없게 된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종교인이 되어 올바르게 종교인다옵기 위한 규범으로 두 가지를 살펴보았다. 종교가 편리한 환상이어서는 안되겠다는 것, 종교가 홀로와 여렷을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것이 그것이다.
생각해 보자. 종교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한 일언가? 스스로 삶을 터득할 수 있음이 사람의 삶에 본디 스며있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삶을 겪으며 어쩔 수 없이 아픔과, 부끄러움을 되씹어야 하는 인간에게 참으로 본질적인 터득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종교인일 수 있음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가장 큰 참인 것이다.
이제 봄이 뚜렷하다. 꽃이 피고, 여름이 무성해지면 곧 가을이 풍요로울 것이다. 그러면 겨울이 회고 차게 뒤덮여질 것이고, 그리고 또 봄이 올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살만한가! 아픔이 없어서가 아니다. 아픔이 아프도록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