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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  )의 노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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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종림 1986년 03월 49호
2. 이데올로기라는 환상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관념형태 또는 의식형태라는 뭇으로 쓰인다. 그러나 이맘은 경우에 따라 개념의 범위나 내용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보통 정치체제에 대한 이념(理念)의 뭇으로 이해되고, 넓은 의미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념들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를 세계관 또는 총체적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고, 이 말은 안간과 세계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위한 이론체계 즉 체계화된 논리를 말한다.
정치체계에 대한 이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능력을 과시했던 계몽주의(啓蒙主義) 철학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사회적인 문제로 재기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문제삼은 마르크스에 의해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우리들에게 미래의 이상적인 사회상을 제시해 주고 행동의 방향이나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가진 이상과 행위에 따르는 신념이 인간과 그 사회로 하여금 위대한 행동을 가능하게 했지만 여기에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문제성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유토피아적인 성격 그리고 존재의 피제약성(彼制約性)으로 인한 당파적 성격은 현대철학에서 독단적 세계관이라고 비판받고 없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성격이라는 것은 인간이 현실의 존재에서보다는 현실을 초월해 있는 어떤 것에 방향을 설정하고 생활질서를 실현시켜 나가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 주창자들은 그 추종자들에게 신념과 용기를 불어넣기 위하여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말로서 그들의 목표를 강조하고 선명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나 러시아의 혁명파정에서 권력을 잡았던 것은 행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했던 지롱드(Girond :온건파공화당)나 멘세비키(Mensbevil이:소수파사회민렴노동당)가 아니고,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극단적인 목표를 주장했던 샤코뱅(Jacobin:파격파 공화당)이나 볼세비키(Bolskevil‘:다수 과격파 공산당)였다. 그리고 기존의 사회질서나 체제를 파괴하기 위하여 폭력에 호소하게 되었고, 그 폭력의 사용은 또 다른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사회의 구조나 질서 또는 정치제도의 변혁으로서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역사의 경험으로 비추어 본다면 정치적 이상만을 우리에게 남겨두고 인간과 사회를 구원하는데는 실마리인 것 같다. 인간 존재의 문제는 유토피아적인 사고(혼란기의 민중이 바라는 통일만 되면 아니면 혁명만 성공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가 가지는 그런 최종적인 해결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제도의 개혁만으로 해결될 그렇게 단순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지 제도의 문제만이 아니다. 제도의 변화는 제도의 개혁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 변화만이 제도의 변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조건에 제약받는 존재이고 관계로서의 존재라고 본다면 제도 역시 인간의 문제이다. 제도 또는 외재화된 사회적 조건은 현상 자체로서 볼 때는 필연의 법에 의해서 움직인다. 인간 역시 인과로서의 업(業:karma)이라는 필연의 법이 적용되지만, 실천이 성이나 사유의 직관형식으로서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은 과거의 업이라는 필연의 법이지만, 업이라는 존재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실천이성에 의한 의지적인 행위로서의 윤리적인 면이나 사유의 직관형식으로서 깨달음의 법이었다.
단순한 제도의 개혁은 업이라는 무의식적인 욕망의 변형에 불과하고 문제는 인간자신에 있는 것이다. 필연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외재된 제도의 개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 법(윤리적인 행위나 깨달음에 의한)에 인간의 개혁만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사회나 정치를 지배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라고 말하는 것은,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산업사회의 특정이라고 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 (technology :기술)가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대신하여 현대의 사회나 생활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데올로기 주창자로서의 자유지식인층이 쇠퇴하고 가치나 이상과는 관계없이 일정하게 정해진 목적을 위하여 일하는 기술자 관료충의 성장과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과 대중매개 수단을 이용하여 개인이나 사회의식을 조작할 수 있는 관리사회(管理화會)로 규정되는 사회적 상황을 듣고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종말에 대한 징조들을 하버마스(J Ha-rberms:독일의 사학학자)는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를 의미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실패로 보기도 한다. 탈 이데올로기적인 경향으로 철학이 이성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감각이나 감정에 기반으로 하는 반 문화운동을 들 수 있다. 현대철학은 이데올로기의 비판과 다원화된 이데올로기를 인정하면서 변증법(辯證法) 적인 발전을 통하여 통일적인 세계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또 인간의 직판에 바탕을 한 신지학牌智學)이나 명상(莫想) 선鷹)동의 동양의 문화적 전통에 의지한 종교들이다. 이러한 직관에 바탕을 둔 방법들은 이데올로기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초 이데올로기라고 이름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이성에 근거한 힘의 원천이라면 감정이나 직관에 근거하는 또 다른 힘의 원천도 있다.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은 본능적이고 정적인 전(前) 이데올로기적인 힘의 원천이라면 선陣)이나 명상은 직관에 근거하는 초 이데올로기적인 힘의 원천이다. 프롬에 의하면 본능적인 관계는 일차적인 관계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이차적인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신적인 관계를 삼차적 관계라고 하는데 이러한 삼차적인 정신적 관계로서 인간상호간의 이해를 통한 사랑만이 인간과 사회의 문체를 해결할 수 었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역사가 낳았던 병폐에 대한 쓰라린 경험들, 그리고 이데올로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에 대한 현대철학의 비판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회적인 상황에서 현대는 전체주의적인 정치이데올로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탈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다원적(多元的)이고 개방적(開放的)인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독단적 세계관은 만하임(K. MaImime:독일의 사회학자)이 말하는 사유의 존재제약성(存在制約性)에 근거하고 있다. 사유는 그의 사회적인 존재양식에 의해서 제약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당파적이고 계급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언제나 주관적이고 현실에 대한 인식을 왜곡되게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초(超)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고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인 계급과 집단들이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내세우는 이념들과 세계관이라고 비판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집단적 당파적 성격을 가진 독단적 세계관에 와해서 사회적인 계획을 수행하는데 취하는 독선적 태도는 대화에 있어서도 타협이나 모색이 아니라 설득의 논리를 전개하게 되고 정치적 입장에서 적 아니면 동지라는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이다. 논리를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사회적 기능으로서 신화적 역할에 대하여 긍정적 명가와 부정적인 견해를 함께 볼 수 있다. 정치적 신화를 긍정적으로 본 소렐(Sorel:프랑스의 사회사상가)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내적인 감정과 관념을 외적인 사회적 상황에 투사한 환상적 표상 즉 신화는 사회적 힘을 일청한 목적에 집중시켜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웰의 견해는 국가사회주의의 길을 열어주고 파시즘의 폭력지배에 공헌했을 뿔이다.
카시이러(E. Cassiror:독일의 철학자)는 국가의 신화에서 정치에 있어서 신화적 사고가 낳았던 병폐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신화적 사고방식은 전논리적(前論理的) 사고라고 말하고 더욱이 정치적 신화는 자유로이 발생한 무의식적인 신화가 아니라 솜씨있고 교활한 기술자들이 계획적으로 만든 인공의 신화로 절망적인 정세속에서 취하는 절망적인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삶에 의미를 주고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지만, 객관화된 제도의 우상화와 이데올로기 자체의 절대화로 인해 원시의 암우(暗愚)라고 말하는 신화의 늪에 인간을 몰아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신화의 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기 인식의 적극적인 새로운 힘을 발견하여 발전시키고 인간의 본성을 신화의 빛 아래서보다는 오히려 윤리적인 빛 아래서 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것이다. 신화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만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남냉(有非無)이면서 또한 있고 또한 없음(佈有亦無)이니 그것이 중도다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부처님은 생명의 망견(亡見), 분별심을 떠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성취하여 무분 법지에서 묘한 있음(妙有)을 보는 것을 바른 견해(正見)빠 하시며 그 내용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납(非有非無)〉이면서 〈또한 있고 또한 없음(亦有亦無)〉예니 그것이 중도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 중도를 연기로서 표현한 것이니 중도가 연기의 근본입니다. I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차익 비구를 내가 열반한 후에 불법에의지케 하여 다스려 만약 마음이 조복되어지면 마땅히 가천연경을 가르치면 곧 도를 얻을 것이니라』

佛告阿難하사대 車置比표를 我훨칭훌後에 i 如寶法治하야 苦心橋tt이어든 應敎迎梅延흩이면 RP可1得道니라〔大智度論 第二卷〕 (대지도론 제2권)

이 말씀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싸난 혼자에게한 부탁 말씀입니다.
차익 비구는 다름 아닌 부처님께서 유씩 출가(城出家) 하실 때에 말을 몰고간 바로 그 마부(馬夫)입니다. 아주 성질이 고약하고 타이르기 어려웠읍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말씀도 잘 안 듣고 깨치지도 못하고 행동을 바로 하지 못하니 부처님께서도 그것이 걱정이 되셨읍니다. 내가 있을 때는 저 사람을 억제하여 데리고 살았지만 내가 가고 난 뒤에는 누가 내 맙도 잘 안들은 저 사람을 데리고 살 것인가 처 사람을 어찌해야 하겠나 하고 심려가 많았읍니다. 그래서 바난존자에게 특별 부탁해서 저 사람이 마음이 좀 잡히때든 중도를 말한 가전연경을 가르쳐라 가전연경을 가르치면 결국에 저 사람도 도를 얻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부처님께서도 이 가천연경에 대해서 중요하게 취급하셨던 것을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다연나계경」 에서 말씀하시되『세간에 2가지 견해가 있으니 첫째는 있다는 견해요 둘째는 없다는 견해이니라』
迎多術那횟經中에 說호대 世有二見이나 |--者有見이요 二者無見이니라〔大뽑婆沙論〕대비바사론(大뿔婆沙論)이란, 가전연(遊빼延)이 발지론(훌智論)을 지었는데 오백명 비구가 모여서 발지론에 의거해서 만든 것이니, 오백권으로 되어 있읍니다.. 발지론을 지은 가전연은 부처님 당시의 가전연이 아니고 딴 가전연입니다. 이 논은 원시불교(原始佛敎)의 논장 가운데서도 아주 큰 논장인데 거기에 가전연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읍니다. 이로써 가전연경이 우리 불교 역사상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부처님이 능히 있음과 없음을 멸함은 가천연을 교화시키신 바와 같거늘 경 가운데서 말씀하선 바에 누가 있다 하며 누가 없다 하리오 佛能滅有無는 如化週施延이니 經中之所說에 誰有亦誰無리오 〔중론〕
용수(龍樹)보살은 중론(中論)을 지어 파사현정(破思願正)하여서 부파불교(部派佛敎)시대의 소숭변견을 부수어 버리고 중도 일숭(一乘)을 복구시킨 분입니다. 그 중론에 인용한 경전이라곤 오직 가전연경 한 가지 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용수보살이 가전연경을 의지하여 중론을 지은 것이 확실하다고 보는데 중론 가운데서 경 이름이 나오는 것은 이 가전연경 하나 뿐입니다. 그만치 용수보살도 근본불교의 골자로서 이 가전연경을 삼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읍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예에서 살며본 바와 같이 가전연경이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 다시 깨우쳐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