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三圖史記)가정통 역사서이면서도 주관적인 자기 폐쇄와 독단적인 임의 삭제와 유가(橋家)의 눈으로 헤아리고 한학(漢字)의 입장에서 서술한데 비해 삼국유사의 책 내용은 저자가 승려였던 만큼 대부분이 불교에 관한 내용이 많은데 이것은 단순히 저자의 개인적인 필요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고 실은 본사인 삼국사기가 특히 이 부분에 소흘했음으로 보충하려함이었으며 본사와 유사가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은 첫째 한쪽은 전범(典範)을 좋아하는 유학자이고 다른 한쪽은 명담을 주로 하는 승려였다는 사상적 배경이 서로 다
른 점에서 온 것이기도 하려니와 다음으로는 본사가 그때의 관념에 의한 국사(圖史)라는 체제를 갖추기에만 급급한 의식적인 저작이었던데 비해 유사는 야인野A)의 한만록(漫錄)에 불과했던 데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유사에는 본사에 빠진 고전(古傳)이 많이 채록되어 있고 또 그것이 대개 원형 수록되어있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유사가 지닌 불후의 가치인 동시에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참 행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삼국유사 이야기」는 제3권 「홍법제삼」부터 끝까지의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엮어 갈까 한다.
이는 일연 스님께서 불교를 널리 펴시고자 했던 그 간절한 발원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다. 면이 「삼국유사 이야기」는 그것보다 더 큰 다행이 없을 것이고, 또한 이는 편집자의 간절한 염원이기도하며, 이 시대의 요청이기도 함을 이 글의 서두(序頭)에 밝히는 바이다.
백제본기(百濟本記) 에 의하면 제l5대 침류왕(沈流王) 이 즉위한 갑신년 (甲申年) 서기 384년에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7}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백제로 들어 왔다.ii
·순도(順道)화상 고램에 불교를 전하다.
우리 근역(僅或)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최초로 들어온 것은 고구려 본기(本記)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王申)년이다.
이 해는 동진庫音)의 함안 간문제(簡文帝) 2년이며 또한 효문제(孝文帝) 즉위년인 서기 372년이되는 해이다. 전진(前奉)의 왕 부견(符堅)은 불심이 돈독하고 어진 임금이었다.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가 태평해지자 이웃나라인 고구려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친히 사신을 보내고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보내면서 또한 순도스님을 포교사로 보내었다.
소수림왕 4년에는 아도(阿道)라는 스님이 진나라에서 왔으므로 그 이듬해 그 달에 한국의 최초의 사원인 초문사(며門풍)를 창건하여 순도스님을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伊뼈蘭품)를 창건하여 아도스님을 머물러 계시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에서의 불교의 시작이자 한국 불교의 시원(始源)이 된다.
흔히 각훈(宜訓)스님이 쓴 해동고숭전(海東高承傳)에는 순도스님과 아도스님이 위나라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확실히 그 스님들은 전진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또 고숭전에 초문사는 지금의 흥국사(興택師)요 이불란사는 홍복사(興福좋)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기록이다.
살펴볼진대 고구려 때에는 안시성(安市城)에 도착하였는데 안시성은 다른 이름으로 안정흘(安丁忽)인데 요수(遺水)의 북쪽에 위치해있었고 요수는 다른 이름으로 압록강으로 지금의 안민강皮民江)이라 하거늘 어찌 송경(지금의 개성)의 홍국사나 홍복사가 어찌 그곳에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 땅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들어오니 그것을 기뻐하여 찬(護)한다.
압록강에 봄이 깊어
저 물가에 풀빛이 곱고
모래벌에 갈매기
한가로이 졸 때
흘연히 뱃소리 멀리서 들려오니
어디서 뱃사공 손님 싣고 오는가
·마라탄라(摩羅難院)스님 백제에 불교를 전하다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는 일찍부터 이웃 중국으로부터 직접 온갖 문물과 함께 불교문화를 받아들였으나 한반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백제는 바다를 사이에 둔 중국으로부터 바다 길을 통하여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객제본기(펌濟本記)에 의하면 제 15대 침류왕(沈流王)이 즉위한 갑신년(甲申年) 서기 384년에 인도의 고숭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로 들어 왔다.
이 때에 침류왕은 마란난타스님을 크게 환영하고 그를 궁중에 모시고 공경하였다.
처음으로 혼자 건너온 외국의 스님을 크게 환영하고 또 대궐에 모시고 공경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불교문화를 받아들인 백제의 적극적인 자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백제가 중국의 불교문화를 접하고 있었다는점을 유추할 수 있는데 즉 백제인이 전혀 불교에 관하여 전혀 모르고서 어찌 국왕이 낯선 일개의 외국 승려를 그토록 환영하고 또 도에 지나철 만큼 대접을 하였겠는가 하는 점이다.
다음해 올유년(Z西年)인 385년에는 그 당시 수도였던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배출시켰다. 마라란타는 외국인이지만 10명은 백제 사람의 승려인 것으로 보아 마라란타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불상(佛像)과 불경 (佛經)을 가지고 와서 백제에 새로운 문화인 불교문화를 심었다고 보아진다.
그 다음 왕인 제l7대 아신왕(阿훌王)은 왕으로 즉위한 서기 392년 2월에 왕이 하교rF敎)하여 불법을 만 백성이 높이 받들어 믿게 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였다.
마라란타라는 이릅은 범어健語)인데 그 뜻은 학동(좋童)이다.
백제에 부처님 법이 들어옴을 기뻐하여 일연 스님은 이렇게 찬(護)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무엇을 이룰려면
그 얼마나 어려웠으리
노래하고 춤출줄 안다면
옆사람 권하여서
구경이야 못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