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봄의 단상(斷想)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죽비의 소리 - 여연 1986년 03월 49호
1)국도(固道)의 끝
일상의 삶이 무력에 침몰될 때 우린 어느메 들녁 더북쑥이 움튼 길을 따라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흘러 머물려야할 곳이 산승에게 따로 없고 정한(情恨)을 풀며 환희스러울 그 누구도 없지만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항상 벅찬 생의 기쁨를 맛보게 한다. 이는 발길 닿는 곳마다 수천년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아름다운 국토가 거기 그대로 숨쉬고 있기 때문이요, 건강한 삶을 줄기차게 이어 가고 있는 우리네 이웃을 이 땅의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기차여행도 좋지만 국도를 따라 달리는 자동차 여행이 더 의미가 있다. 기차는 작위적인 길로 달리지만 국도는 오랜 옛날부터 이 땅에 뿌리 내려온 우리의 이웃들, 삶의 애환 그 자취로서의 역사외 길이기 때문이다. 혼들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생의 어지럼증을 갖는다. 창문을 열면 싱그러운 봄 풀냄새 노오란 산수유 꽃잎이 꿈꾸듯 풀려온다. 이 땅의 국도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미루나무가 친근한 모습으로 스쳐간다. 한순간 국도변이 허전하다. 수 십년 자란 미루나무가 다 잘려 나가고 그 자리에 속성수라는 은사시 나무가 버티고 서 있다.. 미루나무가 병충해를 많이 타고 자란 다음 목재로 써 좋지 않다는 얕은 속셈의 정책적 배려로 우리의 길, 언덕들이 정감을 잃어가고 있다. 멀리 알록달록한 스레트 지붕이 걸레처럼 펄럭이며 다가온다. 동구 밖 새로 난 농로 한가운데 수 백년 묵은 듯한 고목이 덩그마니 훌로 서 있다.. 초가집은 한 칸도 간데 없고 길이란 길은 다 시멘트로 발라 버린 새마을운동의 상혼, 그것들이 망상처럼 흘려간다. 자연이 조화로운 모습으로 숨 쉴 때 삶에 지친 우리들에게 순한 편안함을 준다. 그것이 작위적일 때 오히려 불편은 더한다. 날이 갈수록 사라져 가는 우리의 것들, 몇 년이 더 가면 우리는 정작 어떤 물결 속에서 첨벙될 것인가. 어지럽고 무거운 것은 비를 머금고 흘러가는 구름 탓만이 아니리라.

2) 홀로 가는 길
거리에 걸망을 맨 스님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띤다. 해제를 한지 한달 가량 지난 지금 도심에서 운수납자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이상스런 일은 아니다. 석 달간의 용맹정진 후에 만끽할 수 있는 만행의 법열이야 수행자가 아니고서야 도저히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세간을 초월하여 닦은 지혜의 크기를 시정에 다시 맞추어 측량해 보려는 참된 구도자의 길이 만행이리라. 지혜의 크기만큼 만행의 폭파 깊이도 다양할 때 그 닦음은 참된 자신의 생명일 것이다. 만행 중에 만나는 우리의 이웃들을 홀로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수행자와는 달리 집단적 희노애락에 젖어 산다.
내 친척, 내 가족, 우리 동네라는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군상들인 것이다. 집단적 감정이 그 집단의 이익만을 위하기 때문에 그 집단에 구속되어 버리고, 초월적 감정은 홀로 맛보는 법열이기에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집단적 감정이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그 집단 개체간의 감정과 이익을 공유하려는 공동체적 관계라면 초월적 감정은 이러한 공동체적 관계를 간과하기 쉬운 독단적 감정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만행은 초월적 감정이 공동체적 감정으로 관계 지워지는 과정이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그러한 공동체적 집단이익에 매몰되지 않는 초월적 감정을 획득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어야 한다. 만행의 길, 그것은 현실 고통에 대한 확인이다. 개인적으로 구조적으로 우리의 이웃들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가에 대한 절실한 체험의 길이며 역사적 사회현실과 만나는 현대판 사문유관인 것이다. 이렇게 만행을 통해서 얻어진 값진 체험들은 다시 홀로 가는 길을 통하여 그 지혜를 넓고 깊게 하여야 할 것이다.
.홀로 가는 길. 이것은 더불어 가는 길로서 가능해지고 더불어 가는 길은 홀로 가는 길을 통해서 또한 가능해진다. 홀로 가는 것과 더불어 가는 길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파 같이 서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되게 흘로 가는 길은 더불어 가는 삶을 통하여 그 폭을 넓히고, 참되게 더불어 가는 길은 흘로 가는 길을 통하여 그 깊이를 더욱 굳게 하는 변증법적인 지양의 길인 것이다. 홀로 첨묵속에 수많은 소리를 듣자. 그 소리의 외침이 3월의 맑은 하늘이 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