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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 송운(松雲)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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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9년 12월 94호
계묘년(1603)에 명령을 받고 서울에 와서 갑진년에 국서(國書)를 받들고 일본으로 가니 모든 왜인들이 서로 이르기를 「이분이 보배를 말하던 대사인가」 하였다.
대마도에서 대판(大阪)에 이르니 모든 대장들이 다 신앙하여 약속을 받고 일본 승려들이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매 스님이 일일이 불법을 가르쳐 주니 즉시 모두 예배하고 생불(生佛)이라 일컬었다.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만나자 말하기를 「두 나라 생령이 오랫동안 도탄에 빠졌으므로 내가 건지기 위하여 왔소」 하니 덕천 또한 불교를 신양하는 자이라 듣고는 신심을 발하여 공경하기를 부처님같이 하였다. 화호(和好)를 잘 맺고 사로잡혀 간 남녀 3천5백명을 찾아 돌아올 때 스스로 양곡을 주선하여 먹이면서 도로 바다를 건너와서 을사년(1605 )에 복병하니 임금이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가의(嘉義)의 계자로 올려 주고 어마(篽馬)와 저사표리(紵妙表裏)를 주어 표창하였다. 이 때 이미 청허노사가 열반에 들었으므로 묘향산에 들어가 그의 진영(眞影)과 탑에 예배하고 보현사에서 상주 노릇을 하였다.
병오년(1606) 봄에 영선할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 역사에 달려와서 삼강동에 초막을 매고 거처하였다. 정미년(1607) 가을에는 글을 올려 사퇴하고 치악산에 들어갔다가 무신년(1608)에 선조(宣祖)의 부고를 듣고 서울에 들어와 절하며 곡하고 인(因)하여 병을 얻어 심히 괴로워하였다. 그래서 광해주(光海主)가 명령하여 서쪽 국경이 오랑캐를 방비하고자 하였으나 명령에 따르지 못하고 가야산에 들어가 치료하니 임금이 여러번 약을 내려 주었다. 경술년(1610) 가을에 임금이 염려하여 그를 경산(京山)에 와서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하여 감사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였다. 8월 26일에 스님께서 모든 문도를 불러모으고 말하기를 「사대가 인연으로 뭉쳐서 몸이 되었더니 지금 장차 진(眞)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어찌 번거롭게 왕래하여 이 환신(幻身)을 괴롭히랴. 나는 장차 열반에 들어서 조화에 순응하리라」 하고 드디어 가부좌를 하여 고요히 돌아갔다. 11월 20일에 문도들이 유골을 모시어 절 서쪽 기슭에 화장하니 서기 (瑞氣)가 하늘에 뻗치고 나는 새가 놀래어 지저귀었다.
이에 정골사리 하나를 모사어다가 새로 만든 석종(石鐘)에 간직하여 탑을 그 자리에 세웠다.
스님은 속성은 임씨(任氏)로서 풍천의 명문이었다. 증조부 효곤은 문과에 올라 장악원정의 벼슬을 하였는데 일찍이 대구에 벼슬을 지냈으므로 그러므로 밀양에 살았다. 그가 유학(幼學) 종원을 낳았고 종원이 교생(校生) 수성(守成)을 낳았다. 수성이 달성 서씨에게 장가들어 갑진년 10월 l7일에 사(師)를 낳았으니 인간의 나이가 67이요 승랍이 57이었다. 조정에서 시호를 내려 자통홍제존자(慧通弘濟尊者)라 하였다. 스님은 젊어서부터 저술한 것이 많았는데 나의 중씨(仲民) 하곡(荷谷)에게 있었더니 난리에 잃어 버리고 문도들이 그 전하여 외운 것을 모아 일곱권을 만들어 전하니 알아보는 이들은 그 청하하고 풍성한 것을 칭찬한다.
아, 스님께서 태어난 것이 전란의 세상을 당하여 군중에 분주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강한 적을 막노라고 선법(禪法)을 선양하여 미혹한 무리들을 일깨우는 데에는 대개 겨를이 없었다. 스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자가 혹 그가 불법을 전하는 데는 부족하고 하갓 구구히 세상을 구하기만 한 것을 결점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마(魔)를 베어 액난을 건져 주는 것이 바로 불가의 공덕임을 알 수 있겠는가 유마거사는 말없이 불어법문(不語法門)에 바로 들어갔는데 또 지껄여서 교훈을 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겠는가 나는 비록 유가에 속하나 형체의 교분으로 사를 알기를 가장 깊이 한다. 시험삼아 묻노라 지금 세상에서 목우∙강월의 도맥을 이은 분이 우리 스님을 두고 그 누구인가 후세에 반드시 분별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명(銘)을 짓는다.

8

부처님이 인도에서 법을 창도하셨네 열반묘심을 등(燈)이 등으로 서로 전하였네. 진단(眞丹)의 동쪽멀리 떨어진 우리 삼한에서 영원한 받음을 뉘 이었나 강월이 홀로 둥글었네. 그 후세 빛을 이은 이는 서산이 가장먼저로다. 지혜의 횃불이 새벽에 밝았고 지혜의 거울이 밤에 달렸네. 높은 제자들이 그 수가 백천이로되 나루터 모르는 냇가에 떼배가 될 이는 홀로 종봉(鐘峰)을 허락하였네. 종봉의 교회는 가이없는 중생을 널리 건졌네. 온갖 착함을 갖추 닦았고 모든 인연에 물들지 않았네. 들어와 숨을 제는 정병과 발우 만이 깨끗하고 내어서 쓸 적에는 깃발과 창이 앞에 있네. 마군을 꺾어 고(苦)를 건지매 나라가 힘입어 넘어지지 않았네. 짐승 그린 조복(朝服)과 금으로 된 인장 그 영광도 뜬 연기와 같네. 아득한 고해 동쪽 왜 땅에 닿았을 때 대자비의 배를 띄워 저 완(項)한 것들을 감화시켰네. 왜인들이 둘러서기를 목마를 제 샘에 가듯 하였네. 그들이 꿇어않아 약속을 받들매 왕의 위엄이 선양되었네. 국란이 겨우 풀어지매 산으로 돌아갈 홍(興)이 더욱 나를 듯하네. 이 몸을 바쳐가며 여생(餘生)을 보내려고 생각하였네. 대궐의 역사를 도운 뒤에 병으로 인하여 한가한 데로 나아가 절에서 쉬었네. 상수(上壽)를 누리어 미묘한 법을 선양하길 바랐더니 어찌하여 쌍수(雙樹). 아래에 문득 인천(人天)이 슬퍼하는고, 단특산(權特山)이 무너지고 니련하가 말랐구나. 옥호가 채색을 감추고 금상(金相)이 고운 빛을 잃었도다. 적멸(寂滅)이 낙(樂)이 되건만, 어리석은 자들은 눈물을 흘리도다. 많은 승려들이 비단과 돈을 시주받아 탑을 세우고 묘(蘭)를 세워 스승은혜, 부처 은혜 갚으니 홍류언덕에 우뚝한 부도가 세워졌네. 넓으신 원력으로 영겁토록 넘어지지 않으리. 칭송함을 쉬지 않아 비(陣)에 다각(刻)하 도다. 가섭은 미소하고 마힐은 말이 없네. 교훈을 전함과 세상을 구제함이 둘 다 제전(歸筌)이로다 무쟁삼매가 실도 되고 권(權)도 되네 밝고 밝은 해와 달이 만고에 길이 빛나네.

백월거사(白月居士) 허균(許筠) 지음

백월거사 허균 선생의 비문이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연재할 수밖에 없었음에 대해서 먼저 양해를 구한다. 대체로 사명대사의 행장은 다른 스님들에 비하여 많은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아마도 이 비문일 것이다. 이번에 다시 사명대사의 행장과 자료를 뒤적이다가 우리 후손들이 너무 못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과 함께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대체로 지금 승려교육 과정에서 한국 불교사에 대한 강좌가 너무 없어서 선조들의 행적과 높은 이상을 거의 접할 기회가 없이 그냥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죄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는 점과, 온갖 박해 속에서도 나라를 위하고 중생을 구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했던 선조들의 그 위없는 정신이 전혀 계승되지 못하고 금력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버린 현금의 불교 교단의 모순을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민영방송 MBC-TV 드라마가운데 ‘이조왕조실록’ 이라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가운데, 특히 선조때 임진왜란을 다루는 대목에서, 그토록 구국항쟁에 앞장섰던 서산, 사명 두 분 스님의 위덕과 승군의 활약상은 한마디도 언급함이 없이 쓸데없는 외국 선교사의 십자가는 왜 그렇게 번쩍거리던지, 그리고 기껏 승려라고 나오는 것은 일본 첩자로나 나오게 하는 등의 작태를 보면서 딴 나라가 아닌 이 땅에서 진실을 호도하고 왜곡시키는 일이 종교적 편견에 의하여 자행되는 것에 대하여 분노와 함께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적 편견으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말살하려 하여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디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려보라. 가려지는가 역사적 진실은 역사적 진실인 것이다.
이 땅의 별난 이교도들이 아무리 원효를 부정하고 의상, 서산, 사명을 부정해도 그들은 원효, 의상, 서산, 사명의 후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선조를 욕보이는자 들에게 무슨 종교적 진실이 있겠는가 깊이 생각해야할 것이다.
각설하고, 이제까지 사명대사의 행적을 살펴봄에 있어 한학자 성낙훈 선생님의 번역본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