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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 이야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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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강좌 - 여연 1982년 10월 8호
* 물의 선택과 저장
인간이 생을 영위해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없어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소중한 물은, 자연이 베풀어 주는 복덕 가운데 가장 신비스러운 조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물은 차의 근본인 체(體)가 되는 것이며, 차는 물에 있어서 신(神)이 되어지는 것이다. 다신전(茶神傳)에서는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비스런 차의 영정(靈精)한 기(氣)가 나타나지 않고, 정미로운 차가 아니면 그 물의 참된 체성을 엿볼 수 없다고 했다. 다소(茶統)에서도 황하의 물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며, 물빛의 품성은 현상적으로는 탁하고 맑고 하지만, 물의 본성에 있어서는 분별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땅의 산천이 맑고 고운 곳에는 반드시 물맛이 싱그럽고 감미로운 법인데, 거기에 더하여 어질고 순한 백성이 사는 우리의 땅은, 산천 어느 곳을 헤아려 봐도 물맛 가릴 곳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을 더욱 섬세하게 선택했던 초의스님은 품천(品泉)의 절목(節目)에서 말하길, 산정(山頂)의 샘물은 맑으나 가볍고, 수하(水下)의 샘물은 맑으면서 무겁고, 석중(石中)의 샘물은 맑으며 달고, 사중(妙中)의 샘물은 맑고 차며, 토중(土中)의 샘물은 담백하며, 황석(黃石)으로 흐르는 물은 쓸만하나 청석(責石)에서 나는 물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흐르는 물은 고여 있는 물보다 더 좋고, 그늘의 물은 햇빛을 받은 물보다 좋다고 하며, 순수한 물은 맛이 없고 향기가 나지 않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당나라 장우신(張又新)의 전다수기(前茶水記)에서는, 양자강 남영(南零)의 물을 제일로 하여, 혜산사(惠山寺)의 석수(石水), 소주(蘇州)의 호구(虎丘), 단양(丹陽) 관음사(觀音寺)의 물, 양천(揚川)의 대명(大明), 오송강(貝松江), 회수(淮水)의 물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여러 등급으로 물을 분별하는 현란스러움을 비롯하여, 당나라 소익(蘇廙)의 십륙탕품(十六編品), 명나라 자천소품(煮泉小品)에는 별스런 물의 얘기가 쓰여져 있다. 일제 때 출판된 가입일웅(家入一雄)의 저서 「조선의 차와 선」에서도 우러나라 각 곳의 물과 우물물의 좋고 나쁨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물에 있어서 까지도 까다롭고 복잡한 것을 서구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을 단순히 대상 즉 사물을 구성하는 질료의 하나로서, 맥주나 포도주를 만드는 용수(用水) 정도로 밖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코카 콜라를 만드는 미국인들이 어떻게 우리가 자연을 우리의 생명과 일여(一如)하게 받아들이며, 사물하나 하나까지도 전체화 하는 우주적 사고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연 속의 사물들을 포괄하여 인식하는 동양인의 자연관을 생각할 때, 자연을 단순히 대상으로 인식하고 분석하려는 이원론적인 가치구조, 즉 객관적으로 분별하여 자연을 획득하려는 그들의 논리가 이 땅에 들어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사고와 의식을 혼란시키고, 그로 인해 생긴 갖가지 구조적 모순을 어찌 다 얘기할 수 있겠는가!
각설하고 앞에서 얘기한 물의 그 미묘하고 신비스런 품성을 얻어 길러 저장하는 데에는 세심한 주의와 용기(用器)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처럼 공해에 혼탁해진 우리의 산천, 특히 산업화로 모든 강물은 오염되어 상하고 썩어가며, 더구나 황폐해진 산과 숲들로 맑은 물들이 살지 못하는 수원(水原)을 본다면 더욱 좋은 물을 선택하고 여과하여서 저장하지 않으면 좋은 차를 달여 마시기가 힘드는 것이다.
집안에 좋은 샘물이 있는 가정. 혹은 사찰처럼 맑고 고운 감천(甘泉)이 있는 곳이라면, 찻물을 그때 그 때 길어 쓸 수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도시에서 수도물에 의지하여 살지 않으면 안되니 만큼, 먼저 물을 저장하는 적당한 그릇 즉 항아리나 물동이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물의 성품은 까다로워서 금방 변하고 상하며 순수한 물을 만나기가 힘드니, 어린애처럼 잘 이루어 보살펴야 한다. 그래서 나무그릇이나 플라스틱, 양은 그릇은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고, 새로운 그릇도 냄새 때문에 물맛을 잃게 된다.
옛날에는 매우(梅雨)를 담는 항아리를 그늘진 뜰에 놓고 베로 덮어, 별빛과 이슬을 받아 찻물을 얻었으며, 또한 선인(先人) 들은 더욱 신령스런 물을 만나기 위해 대추나무 밑에 항아리를 놓고 삼배로 덮어, 흐르는 성운의 눈물(정기)과 밤이 베푸는 온갖 어둠과 은하의 정경을 스며 젖게 했다지 않은가.
황하의 범람한 물을 건강상 여과하여 마시던 중국인들, 베나레스의 혼탁한 강물을 맑게 마시고자 했던 인도인들, 그리고 물이 귀한 몽고 유목민들의 어둡고 피로한 유랑의 목마른 삶 속에서는, 물은 여간한 주의로 선택되지 않으면 그들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힘든 물의 선택은, 현실의 복잡하고 기계화된 생활 속에서는 너무나 사치스런 먼 환상이고 보면, 수도물이라도 잘 가라앉혀서 앙금을 제거하고 클로르칼키의 그 소독약 냄새를 없애주는 게 좋겠다. 즉 물을 끓이는 포트나 주전자의 뚜껑을 비등점에서 열어 냄새를 날아가게 하면, 그래도 쓸만한 찻물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물을 저장한 수반에 맥반석이나 수정을 넣고 물을 맑힐 수도 있는 것이다.
차에 있어서 물만은 절대로 주의하지 않으면 차의 색과 향과 맛을 얻을 수가 없다. 아무렇게나 할 바에야 보리차를 펄펄 끓여 마시면 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차인(茶人)들은 말로 차를 마시려 들고, 차가 지니는 본질적 정신을 멀리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훤소(喧騷)하게 하여 차도의 모임을 여러 갈래로 조성하려 들고 있다. 아니해도 가난한 민중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는데, 적어도 문화의 향락으로서 전통을 운위하지 말고, 개인의 맑은 삶이 전체로 통일될 수 있는 에너지를 축적해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