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릿말
지금까지 전통 불교 강원에 대하여 발표된 논문은모두 5편이다. 이 논문들은 대부분이 교과과정에 관한 고찰이었다. 이제 강원교육의 학제 성립의 사적 고찰을 하기 위하여서는 많은 문헌과 금석문 경전의 서(序), 발문(歐文)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것-동을 중심으로 해야 하므로 방대한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 문헌만을 살펴 볼 수 밖에 없는 시간적인 여유와 자료는 알고 있으나 아직 입수하지 못한 것도 있어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2. 강원의 확제 성립 과정
1) 강당(講堂)과 강경(講經)
강당파 강원은(불교사전:이 운허 지음) 강당조에 “경교經敎)를 강의하는 집”이라 하였고 ①불(佛) 재세시(在世時) 능엄경을 중각강당에서 껄했다 하며 또 녹자모강당퉁이 경전상에 보이는 것은 큰 집회는 거의 강당에 모여 처리했던 것이다. ②불조통기 제38권에 넓
고 큰 강당을 새롭게 짓는다는 말이 있고, 고숭전 색언에는 강의실을 새롭게 꾸민다고도 되어 있다. ③삼국유사 4권 자장용사조에는 강의하는데 운무가 강당을 자욱하게 덮는다고도 했고 고려 영통사 대각국사 비에는 선원을 강원으로 바꾸었다. 또 대법거다라니경 법문을 하는데 마구니가 방해하므로 강당에 불상을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국의 현장법사는 나란타 사에 많은 스님들이 공부했다고 하여 현대의 종합대학과 같은 성격의 강환어1 대하여 대당서역기 구법고승전에 밝히고 있다.
강경(講經)에 대한 것은 선견율(善見律) 비바사(뽑婆沙) 2권에 아쇼카왕 때에 전도사가 와서 사비유경(앓警隔옳), 천사경(天使經)외 13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밝혀진 바학자들의주장은 경전의 성립은 아쇼카왕 멸후 200년경에 스리랑카에서 문자화되었다고 한다. 불멸후 30년경 바이살리에서 부파불교로 나뉘어지기 시작하여 2~300년 사이 30여개 부파(部派)로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시작온 교리문제로서 경전에 대하여 강의하고 논셜했으리라고 보며 문자화되기 이전에는 구전송경(口傳調經) 했으리라고 추측한다.
4분율(四分律)에는 “불상(佛像)을 아랫충에 모시고 윗 방에서 자지 말라”고 하였는데 불상(佛像)의 기원을 A.D 1001건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면 을장도 가감(加減)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워 짐작되는 바이다.
또한 남방에서는 비구계목이 227덕목이나 북방에서는 250덕목이다. 오분율(五分律)에서는 「비륙 내가 제정한 바라도 청정함을 얻지 못한 자는 쓸 수 없으며 비록 내가 제정한 바가 아니라도 청정함을 얻은 자는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雖是我所制 餘方不寫淸律者 不可得用 雖非我所制 餘方得흙淸擇者不可不用)하고 있다.
그러나 불상의 기원이 처음 보리수 신앙에서 불상의 형태로 변화되어 왔다고 하여 또는 경전의 문자화가 늦은 것을 미루워서 경전의 강론이 없었다고 할 수가 없다. 중국의 위나라에서 주사경 도행반야경을 강의했다고 석씨요람 대송숭사략에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 탑상조(搭像條)에 고려 영탑사조에 「보덕(普德)은 열반경 40여부를 원광은 대승경론을 항상 강의했고 자장은 강 대승론 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대각국사 비문에는 해인사에서 경을 강의할 때 집이 갑자기 혼들려 대중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러한 첨들로 미루어 보아 경의 강의는 아쇼카왕시대 이전은 구전(口傳)에 의하여 송경(調經) 하였던 것으로 본다.
2) 학제(字制)의 성립과정
지금까지는 월담셜제(月置雪露 l632~1704)와 월저도안(月짧道安 1638~1715) 시기를(약200년 전후) 전후해서 교과과정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거의 지배적인 견해였으나 4집(四集)은 벽송지엄團松智嚴1464~1534) 때로 지금부터 약 450여년 전에 확정되었다.
벽송당야로행록(훨松堂흉老行錄)에 처옴 초심학인(初心좋A)을 가르치는데 먼저 선원제전집도서 (輝源諸꿇棄都序)와 법집별행록(法集別行銀)을 의지하여 여실(如實)한 지견빼見)을 세우게 하고 다음에는고봉션요(흉뿔輝要)와 대혜어록(大慧語錄)으로써 지해앉n離)의 병폐를 소제케 하여 수행하는 활로(活路)를 지시하였다고 하여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l
사교(四敎)는 세조때 농엄, 반야, 원각, 획엄경둥이언해(讀解)되어 수십부가 인경(印옳) 반포되고 기신론(起信論)도 세조가 발문(載文)을 붙여 간행하였고 그 이전에 의천대각국사(1055~l101)가 송의 정띔선사(홉源輝師)에게 기신, 농엄 원각경을 배우고, 귀국한 뒤에 위 3경(三뚫)을 강의하였고 「대각국사문집」에 병든 자를 위하여 금강경을 독송하였는데 업에셔 광명이 나와 병자가 쾌유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사교과목의 루섹서가많이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대각국사때 부터 보조지눌(普照知詢 1158~1210) 이후 위의 4경론이 강의되어 오다가 세조가 친히 4경을 번역 깐행하였다. 세조 이후 선종영가집購宗永嘉集)과 농엄, 금강, 원각, 법화경의 수요가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사교(四敎)는 처음 법화경이 들어 있었으냐 어느 때 기신론으로 대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보조스님의 저술에도 사교의 내용이 많이 나오고 있으며 고려 대홍선사(大興輝츄)에서는 금강경, 법장소(法홉轉 : 약소)를 간행했다.기신론(起信論)은 원효스님의 주(註)가 있끝 것으로
보아 신라 때에 들어와서 의천스님의 신편교짱총록(新編敎藏總錄)에 많이 실려 있음은 중국 정훤선사의 영향을 받기도 했겠으나 연구가 일반화 되었으리라 본다.
세조의 발문이 실린 기신론이 1457년 간행되깨도 했다.
그러므로 대각국사 이후 사교는 다 나오고 있다. 〈불조통기〉 능엄경은 통도사, 송광사, 쌍계사에 목판이 남아 었다. 이는 세조때 언해가 되어 출판되고었다.
사집과 사교의 명칭은 1679년 간행된 금강썽의 발문에 나오고 또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 스님네 중 지식있는 이는 사집과 사교를 배운다고 하였으므로 이미 그전부터 명칭이 쓰여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대교(大敎)의 화엄경은 원효스님이 진역價擇)에 「60권본 화엄」 소석을 하였고 의상스님은 당의 지엄선사에게 화엄경을 공부하고 법성게와 법성도를 지어 인가(認可)를 받았고 범수港修)가 정관소(燈觀輝)를 처음 구하여 왔다. 흥진국흔 혜영慮永 l228~1305)은 1290년 원나라에 가서 장경을 금자(옳字)로 배껴왔다. 혜심국폰(慧港固尊 1178~1234)은 화엄경 십지품을 거양(農揚)하고 입적했다고 한다. 의천국사는 스스로를 화엄대교 A}문이라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화엄경을 대교라 부르게 되고 강본(講本)으로 쓰여지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 와서 판각(板刻)된 것으로 본다. 이는 예종(홈宗 1469) 즉위 이전에 교과목으로 쓰여진 것 같다.
수의과隨意科)에 법화경은 신라 원효스님이 법화종요(法華宗要)를 찬술한 이후로 대각국사가 입송(入宋)하여 천태학을 홍포할 원을 세우고 귀국하면서 법화경에 대한 많은 주석서를 가지고 와서 〈신편제종교장총록〉 천태종을 개립하였고 그 뒤 3세(三世) 3원(三圖)
천책(天뼈)둥이 법화경을 강의 선양(宣揚)하여 신라고려에 법화에 대한 신앙파 강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조에는 무학자초(無좋自超)의 제자 함허(빼훌 1376~1433)는 화엄경 법화경 예찬을 짓고 세조 때에는 언해가 될 정도로 이 경에 대한 관심이 컸던 점으로 보아 세조 이전에 교파목으로 강의되었을 것이다.
3) 교육과 학습
이조 말기 해인사에서 간행된 일용집(1882년 간(刊) 85면상(面上)에 제경의 대지(大듭)가 보이는데 서장(書狀)으」로 정견(正見)을 세우고(f째解 願正見) 도서(都序)로 선의 제종(諸宗)을 알고(용三宗 廳一宗) 선요神要)로 조사관(組師開)을 터득케 하고(훌大志 透玄開) 절요(節要)로 영지(靈知)를 밝히는(操願漸 顯靈知) 순으로 사집을 교육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 강
원의 교과 차례도 이와 꼭 같으며 사교과의 기신론으로 신(信)을 세우고(依一心 開二門) 농엄경으로 정뾰)을 닦고(棄獨念 쫓妙明) 금강경으로 혜(慧)를 닦고(破二執 現三空) 훤각경으로 원각뼈覺)을 증證)하여(뻐無明 顯佛性) 대교인 화엄경에서 화엄법계(華嚴法界)를 증입鏡入)하여(統萬法 明一心) 일체 중생을 위하여 회향하는 보현행(普賢行)을 실천하는 내용으로 대 교과를 교육시키고 수의과에서 법화경의 일불숭(i佛乘) 도리와 전둥(傳燈) 염송(拍題)으로 격외선지(格外輝릅)를 깨쳐서 대자유인이 되게 하는 내용으로 교육하였다. 이것은 당대(홈代)에 많은 영향을 꺼쳤던 원각경과 송대(宋代)에 역시 큰 영행을 끼쳤던 농엄경과 당, 송, 명(홈宋明)대에 영향을 끼쳤던 반야경 그리고 화엄경이 전역(傳譯)된 이후로 선(輝)과 교(敎)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경전들이다.
그리고 선의 동사(燈史)인 전등과 염송으로 격외의 선지(輝릅)를 알게 한 사교입선(擔敎入輝)하는 교과내용을 편성하였으며 또한 그와 같이 교육하였다. 앞의 제경(諸옳) 대치(大릅)는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조 말기의 필사본(筆寫本)의 사교, 대교 사기(私記)둥의 맨 처음 장에 경의 대지가 기록된 것으로 볼때 일용집이 편집하기 이전에 이미 경을 강의하는 첫 시간에 경의 대의를 설명하여 왔음을 짐작케 한다.
교과학습에 대하여는 한국최근백년韓圖흉互펌年史)하권(삼보학회편) 이회명(훨每明) 실록 1~4패이지에 조선 후기 한국사찰의 간경제도(看經制度)의 내용431 보일 뿔 그 이전에는 어떻게 학습하였는지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간경을 위하여 미리 외서(外書)인 천자문,통감(遇鍵) 사서삼경둥을 배운 것 같다. 사찰의 판(板)에 이상의 책이 간행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미과의 치문파 사집을 강수한 다음에는 많이 외우게 하여 한문의 독해를 길랬고 사교와 대교에서는 사기(私記)둥을 참고로 하여 미리 정해진 단원을 연구한 다음 반훤이 모여서 토론하는 논강(論講)을 한 다음 이튼날 강주 앞에서 정혜진 단원을 자세하게 해독받고 의심난것을 물었다.
그리고 파계사의 서종수율사의 구술(口述)에 의하면 그때 당시 학인들이 간경을 하는데 무더운 여름에는 오래 앉아 배운 과목을 독송한 까닮에 옷에 땀이 절어 염분으로 인하여 옷이 삭을 정도로 열파 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제도(制度) 면에서는 10년 내지 11년의 기한에 17과목 내지 23파목을 공부하며 학인들의 자비(自費)로 공부하였다고 한다. 정화(傳化) 이후에야 학비는 없이 되었고 교재만 준비하면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초섬문(初心文)에 정혜원명(定慧圓明)과 발섬優心)문의 행지구비(行知具備)를 강조하며 전교과가 정혜를 쌍수하는이상에 격외선지를 깨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삼학(三字) 가운데 율이 빠진 것은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사교나 대교과정은 의천대사나 보조국사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 편정되게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3. 걸 언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약 450년 이전 부터 교파목이 편정된 것이 오늘날까지 전숭되고 있음을 알수있다. 이는 출가인 각자가 수행하는 데에는 가장 이상적인 내용으로 짜여졌다고 볼 수 있겠으나 격변하는 현대를 교화하는 데에는 꼭 걸맞는 교재라고 볼 수는 없
냐. 다만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교재가 오랜 시간과 사상적인 배경 속에서 채돼된 것인 만큼 이를 개편 하는 데에도 다각도로 분석 연구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제언하고자 하는 것은 교재편찬의 방향과 방법을 미봉책으로 몇 가지를 첨가한다거나 몇 가지를 빼어버리는 것은 바랍직스럽지 못하며 현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고매한 인격을 가진 승려를 양성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목표와 조계종의 종현 종지에 부합되고 사회
가 요구하는 바를 정확하게 살펴서 이 모든 것을 잘 이룰 수 있는 내용으로 개편되어야 강원교육이 발전될 것이며 따라서 한국불교도 중홍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속히 강원교재 편찬위원회가 설치되어 본격적인 연구와 종단에서도 전적으로 현대에 맞는 새로운 교재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