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삼국유사 이야기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삼국유사 - 편집실 1986년 02월 48호
1.삼국유사 이야기」를 시작하며
달타이(Dilthey)는 “역사인식은 현제적 체험의 투영인 동시에 과거의 생의 재인식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천년 이상이나지나버린 캐캐묵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때려하는 의도는 무엇이며 왜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다시 보아야 하는가?
한낱 호고빠古) 취미나 기억력의 대상으로써인가? 이미 사라져버린 역사의 환상을 쫓으려 함인가? 현재 한국불교는 어떤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나가 버린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과거의 역사나 문화를 이상화(理想化)하여 현재의 침체를 해소시키려고 하거나 혹은 역사적 유산을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의 재료로 삼기 위하여 미화
(美化)할려고 하는 경향이 었다.
이러한 태도는 결코 역사를 바로 이해할려는 태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미 서구 종교나 철학에 그 자리를 내주고 셀 땅마져 빼앗기고 있는 불교적 현실로써 우리는 불교문화의 화려하고 찬란했던 지나간 역사의 교훈은 단순히 낭만적이고 호고(好.古) 취미적이며 사라져 버
린 역사의 환상을 쫓으려 함이 아니라 선인(先人)들의 종교적 정열과 종교적 이상을 새롭게 재해석 재인식하여 오늘의 불교적 현실에 좀더 충실하고자 함에 있다.
현재는 과거를 통하여 성장해 왔으며 미래로 나아간다. 또 현재의 시점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계속 역사의 바퀴를 굴리면서 이동해 간다. 이러한 시점의 이동은 고쟁되
어 있지 않으며 계속 역사의 바퀴를 굴리면서 이동해 간다. 이러한 시점의 이동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새로운 경혐의 축적과 끊임없는 변화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불교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으며 어떤 쪽으로 변화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역사학에 있어서의 과거의 사실은 마치 집을 짓는데 있어서 주춧돌과도 같다. 주춧돌을 놓지 않고서는 훌륭하고 큰 집을 지을 수 없을 것처럼 과거의 사실없이는 역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휴리는 지나간 역사의 의미를 다시 인식하여야 한다. 주훗돌을 놓을줄 모르는 사람이 크고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없듯이 새로운 불교역사를 창조하려는자가지나간 역
사를 모르고 어떻게 미래의 불교문화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연재될 삼국유사 이야기는 단순히 잊혀진 과거의 역사책이 아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불교도들에게 새로운 활력(活力)과 종교적 이상을 가지게 하리라고 기대한다.

2. 삼국유사와 일연스님
삼국유사는 이미 다 아는 바와같이 고려시대 일연스님(1206~l289)에 의하여 만들어진 역사서이다.
일연스님의 첫 이륨은 견명(見名)이었고 자는 회연蘭然)이었으며 속성(洛姓)은 김(金)씨로 경주장산군(章山那) 사람이다.
고려 회종(熺宗) 2년 병인년탬寅年)에 출생하여 9세에 남양(南陽) 무량사(無量츄)에서 출가한뒤 강석(講席)파 선림陣林)을 두루 편력하여 구산사선지수따山四選之首)라는 이륨을 얻었고 그뒤 포산(包山) 보당암훌禮魔),묘문암방門魔), 무주암(無住魔) 둥에서 선관陣觀)을 닦아 깨달음을 얻고, 고종(高宗) 기유(己西)년에 남해(南海) 정림사뾰林츄)에 있었고, 훤종(元宗) 신유(辛西)년에 왕명을 받고 서을로 돌아와 선월당關月堂)을 처음 열고 멀리 목우효냉(救牛和尙)의 법통을 이었으며 4년뒤인 원종 갑자(甲子)년에 남쪽에 돌아가기롤 여러번 청한 끝에 오어사(홈魚츄)에 임시로 었다가 인흥사(仁弘츄) 주지가 되자 배우는 무리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였고 고종무진때辰)년에 나라의 명으로 선종 교종의 이름 있는 스님 백명을 모아 놓고 대장낙성회k藏落成융)를 운해사(雲海츄)에서 베풀었다.
인홍사를 맡은지 l1년만에 이를새로 확장하여 인흥(仁興)이라 이름을 고치고 또포산 동쪽 기늙에 용천사(浦果폼)를 중수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정축(丁표)에 왕명을 받들어 운문사(雲門츄)에 머물러 있었고 충렬왕 신사(辛E)년에 왕이 동쪽으로 행차하여 동도(東都-경주)에 머무르게 되자 부릅을 받았으며 이듬해 대궐로 부륨을 받아 광명사(廣明좋)에 머물러있다가 그 다음 해 봄에 국존(圖尊)의 책봉을 받고 원경충조(圓鏡빼照)라 부르니 국존이라 함은 온 나라의 스숭이 됨을 돗함이다. 책봉을 마치자 대궐로 맞아 들여져서 왕과 백관들의 구의례 를 행했다.
그 킬로 늙은 어머니가 었다는 이유로 고향집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자 조정에서 인각사를 중수하고 논밭을 절에 바쳐 스님을 거기 머무르게 하고 구산문도회(九山門徒음)를 다시 열게 하자 일찌기 볼 수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기축묘표) 1289년 7월에 일연스님이 인각사에서 입적(入寂)하시는 세수는 84세요 법납은 73세였다. 시호를 보각(普寬)이라 하고 탑을 세워 정조(靜照)라 불렀다. 지금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古老面) 화수동(華水洞) 인각사에 탑과 비가 남아 었다.
비문(輔文)에 따르면 일연 스님은 말이 적고 참되며 꾸맏이 없고 참됨으로써 모든 사물을 대했으며 선열(輝脫)의 여가에 다시 장경藏經)을 열람하고 각 가(家)의 논소(論藏)를 깊이 연구하며 유학(關字)에도 밝았으며 백가(百家)의 글을 겸하여 읽었다고 한다. 또 어머니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고 나이 여든이 넘도록 보고 듣는 것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으며 사람들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님의 저서로는 어록(語錄) 2권파 게송잡저(偏題雜著) 3권이있고 그가 편수編修)한 것으로는 조동오위(費洞표位) 2권 조도(租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銀) 3권 제숭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租健事행) 30권 선문염송사원(輝門拍題事짧) 30권둥 백여권이 있어 세상에서 읽혀지고 있다고 비문에는 전하고 있다.
이로써 일연스님의 해박한 지식과 선(輝)에 열정을 잘 알수 있는데 그 저술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비문 속에 들어있는 몇가지 외에는 책 이륨 조차 전해지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비문에는 그 이름조차 없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삼국유사는 후세에 전해져 역사학계에 보물이 되고 었다는 것은 하나의 기이하면서도 애석한일이 아닐 수 없다.
삼국유A}는 한 정제된 체제밑에서 씌에진 완전한 책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저자를 중심으로한 몇 사람의 역사적 취미가 남긴 독특한 발자취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책의 성격으로는 첫째 저자가 경주 사람으로 장산군에 살았고 신라 왕족의 혈통을 받은 김씨라는 첨과 둘째 도인(道A)이요 국사(圖師)라는 점 그리고 남쪽에서 태어나고 남쪽에서 자라나, 지금 현풍(玄風)의 비슬산(寶훌山)인 포산과 의홍의 화산인 가지산 동 얼마되지 않는 범위에서 일생을 끝마치게 되었다는 점 둥이 자연 삼국유사로 하여금 신라중심 경주중심
이 되게 활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의 전체가 그대로 우리의 뜨거운감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이 향토적이고 사회적이며 생활적인 점에서 옛날을 고증함에 있어서 그 어느 것도 따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