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뻐로운 이 돕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수행자들에게l말씀하셨다.
“네 가지 바른 끊음이 있으니 첫째는 끊을 것옮끊음斷뼈)이요 둘째는 열의로 끊음(律農뼈)이요 셋째는 생각을 지키어 끊음(守護)이요 넷째는 닦아 끊음峰빠)이다.
무엇이 끊을 것을 끊음인가. 만일 수행자가 뻐미 일어난 악한 법을 끊으려는 마음을 내어 방편으로 좁혀 힘써 거두어 둘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한 법은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마음을 내어 방편으로 힘써 거두어들이며,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일어나게 하려는 마음을 펴 방편으로 힘써 거두어들이고 이미 생긴 착한 법은 떼육 닦아 익히려는 마음을 내어 방편으로 꾸준히 힘써 거두어들이면 이것을 끊는 것을 끊음이라 한다.
무엇이 열의로 끊음인가 만일 수행자가눈월 잘 단속하여 은밀히 조복하여 나아가고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 뜻을 은밀히 조복하여 나아가면 이것을 열외로 끊음이라 한다.
무엇이 생각을 지키어 끊음인가. 곧 수행자가 여러 진실한 삼매를 잘 지키어 기는 것이니 사람이 죽요변 그 몸이 파황게 썩는다는 생각, 문드러진다는 생각풍 부 관(不홈觀)을 닦아 익혀, 물러가거나 사라지지 않게 하면}이것을 생각을 지키어 끊음이라 한다
무엇이 닦아 끊음인가. 만일 수행자가 내재 곳 생각함(四念處)을 닦으면 이것을 닦아 끊음이라 한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곧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끊을 것을 끊음과 율의로 끊음
생각 지켜 끊음과 닦아서 끊음
이 네 가지 거룩하고 바른 끊음은
을바로 깨친 이의 말씀이시니
수행자가 이 방편을 힘써 행하면
모든 번뇌 아주 끊어 없애게 되리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니들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잡아함경 권31)
( 해설 )
1. 버림과 세움(破固定)
인간의 삶이란 나와 너의 벗어날 수는 맺어짐 속에서 영위되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어느 곳을 가거나, 나 아닌 다른 것을 만나야 하고 대상 체험의 필연성을 견디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오늘이란 어제에 대한 되돌아봄과 내일에 대한 내다봄의 엇갈림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들은 현실을 부정과 긍정, 내버림과 세움의 긴장 속에서 꾸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과 관계’의 참된 의미를 바로 보지 못한다 타인이란 ‘사르트르’가 말한 바와 같이 지옥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란 잊혀짐과 죽음에로의 길일 뿔입니다.
본 경은 삶의 과정성과 관계성을 바로 살핍으로써(四念處觀) 인간이 스스로의 도덕적 결단 속에서 모든 모순을 극복 해 가는 참된 자아변혁의 길 역사진보의 길이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읍니다.
본 경에서 말하는 네 가지 바른 끊음(四正빠)이란 근본불교가 해탈의 킬로서 제시한 37조도품E七助道品:四念處, 四正뼈, 賜與義足, 五根, 五力, 七寬支, 八正道) 가운데 한 내용으로서 네 가지 을바로힘써야 할 것(四正動)으로 달리 표현되고 있읍니다. 그런데 네 가지 바른 끊음 가운데 뒤의 세 가지 끊음은 첫 번째 끊음의 내용을 보완해 주고 첫 번째 끊음의 내용에 구체적인 실천력을 부여해주는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이므로 네 가지 힘써야 할 것이란 첫 번째 끊음의 내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네 가지 힘쓸 것이란 1. 이미 생긴 악은 끊고 2.아작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게 하며 3.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게 하며 4. 이미 생긴 선은 더욱 늘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함으로써 삶속에 내포된 모순을 부정, 현재의 삶을 과거보다 나은 삶으로 새 생산해낸 노동의 잉여가치를 빼앗지 않으며 타인의 상대적인 빈곤 위에 쌓아진 허위 적인 문화체계와 풍요로움의 세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제도, 기술, 법, 이념퉁이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것이며(觀法無我), 실체가 없으므로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觀心無常), 그것을 실체로 집착하면 새로운 자아규정파 문화창조의 능력이 사라져 버리고 인간의 삶은 부자유속으로 전락하게 됨(觀受時鼓)을 살필 수 있게됩니다.
(토인비의 문명사관은 한 문명이 발생하여 쇠퇴해 가는 원인을 문명을 창조한 창조적 주체 자들이 갖고 있는 우상화의 죄에서 찾고있다. 즉 변화의 운명 속에 있는 무상한 자아와무상한제도 무상한 기술을 우상화함으로써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창조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문명이 몰락하게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체-객체의 관계 속에서 변화해 가는 몸, 느낌, 마음, 법으로 표시된 존재의 참모습 역사의 참모습을 올바로 살펴 들어가면(四念處觀) 대상은 결코 자아에 적대적인 대상이 아니며(我), 무상한 역사적 과정은 영원 속에 운동하는 과정 아닌 과정이 되어집니다(常). 그렇게 하여 우리는 대상을 다시 인간적인 우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모든 제도 기술 이데을로기에 대한 우상화에서 벗어나서 너와 나, 인간과 세계가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는 조화로운 세계 건전한 사회(頁樂, 質짧)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존재에 내포된 허위와 모순을 부정해서 도덕적으로 보다 고양된 자기존재를 규정하게 해주는 근본불교의 교껄은 대승불교 운동가들에 의해 ‘잘못을 깨뜨려 바륨을 드러낸다(破째願正)’는 말로 재구성되어 새로운 종교적 실천운동의 강령이 되었읍니다. 물론 대
숭불교 운동가들에 의해 재천명된 파사현정의 논리에는 삶에 대한 왜곡된 이해태도를 부정해서 불타의 근본이념에로 돌아가려는 복고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풍기고 있읍니다.
그러나 대승의 복고척 경향은 과거에 대한 미화속에서 모든 행위양식의 원형을 옛것에서 찾아내려는 유교적 상고사상(尙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유교의 상고정신은 지배자들에 의해서 도덕정치가 구현되어지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하·은·주 (夏股周) 삼대이전의 세계를 유토피아적인 이상사회로 믿음으로써 현실사회의 개혁을 이상사회에로의 복귀속에서 확보하려 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 운동가들은 불타의 교셜, 나아가서는 불타라는 인격까지도 지금 현재 생동하는 삶의 참모습 그 자체인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현전의 삶에 내포된 허위와 왜곡된 세계해석의 태도를 지양하여 불타의 참 뭇이 오늘의 역사속에 구현되기를 희망하였읍니다. 또한 파사현정의 논리는 현실의 모순을 개조하려는 변혁의 의지와 미래지향적인 경향이 강하지만 그것은 결코 마르크시즘처럼 미래에 도래할 이상향의 세계에 맞추어 오늘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미래주의의 입장이 아닙니다. 즉 불교적인 변혁의 논리 역사진보의 논리는 지금 이 곳 견디기 힘든 현실 도덕적으로 타락한 현장을 도피하여 과거와 미래속에 뛰어들려는 모든
형태의 유토피아니즘(utopianism)을 철저히거부합니다. 오히려 불교는 절대현재로 주어지는 현실속에서 현실을 견디며 현실을 주체적으로 변혁해7}는 삶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불교가 말하는 현실 변혁을 위한 삶의 결단은 현실에 의해 오염되고 매몰되어지는 자의 결단이 아니라, 역사가 역사 아닌 역사의 심연으로부터 역사를 향해 돌파해 들어가는 창조적인 인격의 결단인 것입니다.
2. 참회(뿔悔)와 발원(훌願)
지금까지 살핀 바와 같이 악한 법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고 착한 법은 더욱 닦아 익힌다는 근본불교의 교셀은 후대 참회와 발원이라는 의례(嚴禮)적이고 신앙적인 행위 형태로 다시 표출되어지고 있읍니다.
즉 참회란 여태까지 반복해온 잘못된 행위를 다시는 짓지 않으며 현실안에 스며 있는 모순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겠다는 반성적인 결단을 말합니다. 그리고 발원이란 지금까지 쌓아온 긍정적인 삶의 가치들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불타의 교철은 인간의 삶이란
과정을 통해 자기규정을 계속해가는 역사적 삶임을 보여주고 있읍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역사척 파정이란 신(빼)적인 것이나 초월적인 원리(道. 自然、. 역사법칙)가 독단적으로 개입해서 이루어져가는 과정이 아니라 대상과의 역동적인 관계속에서 자기를 창조해가는 뭇삶들의 주체적 결단이 그 근저에 가로놓여 있는 그러한 과정인 것입니다. 또한 현실이란 언제나 대상과 더불어 주어진 현실이므로 관계가 끊어진 절대의 영역이 현실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삶에는 선파 악, 최와 복 너머에 우리가 탈피해가야 할 선악의 피안이 따로 었지 않습니다.
불타는 가르칩니다. 우리는 선과 악, 죄와 복의 실체성을 타파해서(善惡、本空) 이훤적인 대립의 질곡을 뛰어 넘어야 하지만, 머물러야할 선악의 피안이 존재하지 않으므로(無記亦空) 우리는 상황의 구체성 속에서 악에 대한 부정과 선에 대한 긍정 불의에 대한 거부와 정의에 대한 보호라는 윤리적 결단의 짐훌 지고 살아야 한다고…
물론 악을 끊고 선을 실현해야 한다는 본경의 교셜을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는 석악의 기준에 관한 문제가 션결되어야 할 첫입니다.
본경은 선악의 기준에 관한 문제를 사념처판과 연결지으므로써 존재의 참모습에 관한 자각적 실천속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푹 삶의 과정성과 관계성의 참된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 왜곡된 앓과 함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나사실 악한 행위라는 것도 어떠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우리가 가갱한 언어척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다옴 순간 주체의 결단에 의해서 다른 행위양식으」로 표출휠 수 있으므로 악온 실체로서의 악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경은 악을 끊고 선을 실현하라는 첫 번째 끊음의 추상성을 보완하기 위해 다음 세가지 끊음의 교설속에서는 존재의 참모습에 부합되지 못한 사유방식과 행위양식의 타파를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즉 두번째 율의로 끊음에서는 자아의 참모습을 바로 보게 함으로써 대상에 의한 주관의 물듬과 주관에 의한 대상의 파괴에서 자아를 지키도록 하고 있읍니다.
흔히 아함경에서는 자아를 자아로 표시하지 않고 눈, 귀, 코, 혀, 폼, 뭇의 육근(六根)으로 표현하고 있융니다. 그리고 그 육근도 육근만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라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의 육경(六境)과 더불어 주어지고 서로 맞몰려 활동하는 육근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관계의 참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 범부들은 주체가 대상과 떨어져 확실하게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아의 실재의식용 토대로 대상을 소유형식으로 파악하게 되어 가짐과 못가짐의 갈등을 일으키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육체마저도 청신의 소유물로 착각하게 됩니다. 불타는 그러한 자아의 실재의식을 깨기 위해 아함경의 여러 곳에써 제자들에게 다음같이 묻고 있읍니다. ‘이 눈이 항상한개 덧없는가, 만약 이 눈이 덧없다면 나라고 활 실체가 없을 것이다. 또한 눈과 같이 귀 코, 혀, 몸, 뜻도 그와 같다. 그러나 불타가 뭇삶들의 육근이 덧없다(無常)고 강조한 것은 주관에 관한 실재의식을 토대로 벌어지는 주-객의 대립적인 행위양식을 깨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에 관한 허망한 집착이 다하고 보면 자아는 존채의 전체성속에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과정속에 막힘없는 자기규정을 계속할 수 있는 것(륨常) 입니다. 이러한 돗으로 법화경의 법사공덕품은 아함경에서 눈이 덧없다(眼無常)고 한 뭇을 뒤집어 부모로부터 받은 이 눈이 깨끗하고 영원한 눈(淸澤常眼)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본경은 이와같이 모든 악의 근거가 되는 자아에 관한 실재의식을 지양하여 존재의 참모습에 부합된 자아의 행위양식을 쉬임없이 정립해가는 것을 융의로 끊음(律嚴빠)이라 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깨끗하다고 국집하는 사유를 깨뜨리기 위해 몸의 더러움을 살피는 여러가지 부정판(觀身不擇 : 九想、)을 닦게 하고 있으니 그것이 생각을 지키어 잘못을 끊는 길(隨護빠)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정관을 닦아 익혀감으〕로써 자기 한몸만의 기뽕을 위해 남이 노동의 괴로옴을 통해지속시키며 보이지 않는 가능태로서의 선의 씨앗(제8식 種子)을 역사화시키며 구체화시키는(現行) 삶의 의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혜농선사農能)는 참회를 다음같이 표현하고 있읍니다. ‘선지식아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이 회인가 참이란 지금까지 지은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니 어리석고 교만하고 속이고 질투하는 둥 모든 최를 다 뉘우쳐 다시 일으키지 않음이 참이다. 회라는 것은 미래의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니 지금부터 이후에 지을 악업을 미리 째달아서 모두 길이 끊어 다시 짓지 않는 것이것이 회이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속에 스며들어 있는 잘못이란 자아와 세계의 참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 허위의식의 산물이므로 그 잘못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존재의 참모습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관보현행법경은 참회의 뜻을 다음같이 말합니다. ‘모든 잘못과 소외가/허위의식을 쫓아 일어나니/만약 반성하여 극복하고자 한다면/존재의 참모습을 바로 살피라/一切業障海 皆從훌想、生 若欲熾悔者 端坐念實相’즉 불교의 참회란 초월자의 은총이나 구세자의 대속(代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자각적 실천에 의해 주-객의 대립을 지양, 삶의 전체성을 회복함(片日深苑 廳益聚生)에 있으니 원효 스님의 대승육정참회는 그 첫머리를. 다음같이 시작하고 있읍니다.‘진리에 의지하여 살아가려는 자는/일상생활 가운데 함부로 어지럽게 행함이 없다/모든 부처님의 한량없는 덕을 기리며/존재의 참모습을 항상 생각하여 모든 잘못을 없애고/널리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뭇삶들을 위하며/온갖곳에끝없이 계신 모든 선각자에게 귀의한다’
위에 나타난 원효 스님의 가르침 같이 참회를 통해 자아와 세계 속의 잘못을 부정해 가면 존재내부에 마땅히 실현해야할 참된 가치의 세계가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모순의 부정을 통한 새로운 자아긍정의 의지를 발원이라 합니다.
곧 파사가 참회라면 현정願正)이 바로 발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것이 실체가 없어서(空) 개인의 잘못된 행위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확정된 뿌리가 없음을 의지하여 참회를 닦고, 온갖 것이 실체 없음도 없어서(空空) 존재의 터전에 가능 태의 생명수가 끝없이 넘쳐 남을 의지하여 발원을 닦아 자아와 세계를 새롭게 출발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발원이란 유한과 죄속에 있는 피조물이 절대자를 향해 외치는 기다림의 언어 바랍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참모습에 대한 치열한 자기확인이며 왜곡된 삶의 질서에 대환 부정을 통해 존재의 참모습에 부합된 조화로운 세계질서를 새롭게 개혁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회와 발원이라는 부정과 긍정의 역동성 속에서 삶의 자유를 이루어 가는 창조적 인간은 저 지옥처럼 부딪쳐오는 타인과의 대립과 갈등속에서도 사랑을 말할 수 있고 잊혀짐의 공포로 덮쳐오는 죽음의 운명속에서도 자유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각처에 서서 나용스님은 그의 발원문을 통해 생성과 소멸의 영원회귀에 굴하지 않는 삶의 용기를 ‘원컨데 태어나는 곳곳마다 반야에서 항상 물러서지 않겠다’고 토로하고 있으며 ‘성과 속, 부처와 중생이 물이 없는 진리의 세계를 반드시 성취하고야 말겠다’고 서원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불교의 위와 같은 생명관에 반하여 흔히 불교의 윤회셜(뭇삶들온 여섯 갈래 존재의 길로 돌아다니며 세계는 성,주,괴,공율 반복합)과 말법의식(末法意識 : 뭇삶들의오염된 행위로 말미암아 역사는 正法,像法, 末法으로도덕척 타락의 과정을 밟게 됨)을 실재론적으로 해석하여 불교의 역사관이 결정론적인 순환사관이나 기독교적인 종말사관과 유사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싸판이란무엇인가:고병익. 유교의 진보관)
그러나 불교의 연기론은 세계의 생성과 소멸이 실체없는 생성과 소멸임(不빠不常)을 보여주고 있으며, 뭇삶들의 자유의지가 개업되지 않은 세계 훌로만의 변화를 부인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말법으로 표현된 역사의 타락상도 신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뭇삶들의 오염된 실천력에 기인한 것이므로 삶들의 도덕적 각성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산혜연(始山)선사는 그의 발완문에서 전쟁, 기아, 질병이 넘치는 역사파국의 대단원 속에서도 도덕적 실천행을 쉬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으며 혜사선사는 그의 서훤문(南鐵思大輝師立홈願文)에서 뭇삶들의 도덕의식이 극도로 타락혜버린 말법의 때에 세상에 나타나 진리의 교사가 될 것을 발원하고 있읍니다.
그리하여 화엄경은 혜사선사와 같이 세상의 고통과 죄악을 없애줌으로써 참된 자아성취의 길을 걸어가려는 보살의 서원을 다음같이 말하고 있읍니다.
一切諸聚生훌훌那熾然 我當意救脫令滅惡道苦
훌如是大願堅固不退꿇 具修홈睡行獲十無陽力
탐냄과 성냄 어리석음의 불길 속에서
온갖 삶들 그지없이 괴로움 받네
내가 이제 굳고 굳은 서원을 세워
모든 고통 남김없이 없애주리니
이와같이 보살행 닦아 나가면
열가지 걸림 없는 힘을 얻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