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꿈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테마에세이 - 이하석 1986년 01월 47호
꿈에 대한 의문

주인은 손님에게 제꿈 이야기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제꿈 이야기 한다.
이 꿈을 이야기하는 두 사람
이 모두 꿈 속의 사람이니라.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휴정(休靜)의 삼몽사(三夢詞)라는 시이다. 이 시에 보이는<주인>과 <손님>은 글자 그대로 주·객(主客)이라는 상대적인 두 존재로 설정됐다기 보다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각각 비유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주인이 곧 손님이고, 손님이 곧 주인이 되는 관계이다. 그것들은 인간이 가진 상반된 속성일 수도 있다. 이들 두 존재는 서로 제나름의 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두 사람이 다같이 꿈 속에 있음을 휴정은 드러내 보인다. 휴정이 어때 드러내 보인 꿈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렇다면 그 화신의 경계는 무엇일까. 두 사람이 꿈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또한 꿈 속의 일임을 보고 있는 이 시의 화자(話者)는 도대체 누구일까. 의문은 끝없이 계속된다. 이 의문이야말로 불교로 들어가는 문이며, 그 문의 자물쇠이고, 그 자물쇠의 열쇠라는 생각도 든다. 이 의심은 장자(莊者)의 의심, 「내가 사람으로서 나비이었음을 꿈꾸었는지 내가 나비인데 사람이라고 꿈을 꾸고 있는 지 알지 못한다」는 것과 얼마만큼 같은 의심이고, 또 얼마만큼 다른 의심일까. 만약 꿈이 우리를 끊임없이 휩싸고 돈다면, 그 꿈이야말로 위대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또 다른 의심, 끊임없이 의심이 일어난다.

눈을 감아도 사방무늬로 번져보이고 / 버리고 버려도 그림자처럼 따라오니 / 그대의 집요한 자유자재 / 동서남북 가로놓여 / 너의 푸념 타의 푸념 머리 둘 곳 없다 / 벌집처럼 들쑤신 고통 / 한 시대 벌겋게 쏘고 지나갈 때까지 / 물불 안가리고 / 여러번 태어나 / 여러번 죽고 평생 못 버릴 불치의 풍경 하나 어른된 오늘까지 우릴 따라와서 / 우리와 함께 지병으로 앓고 있다.

젊은 시인 천양희(千良姬)의 시 「꿈에 대하여」는 꿈이 <벌집처럼 들쑤신 고통>이며 <평생 못 버릴 불치의 풍경>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꿈은 휴정의 꿈의 백리 밖 쯤에서 전개되는 그런 풍경인가.
천양희는 그 꿈은 어릴적부터 어른이 된 오늘까지 따라붙는 병으로 드러낸다. 왜 병인가. 이 시에서는 꿈이 왜 병인지를 확실하게, 또는 전혀 얘기하고 있지 않다. 꿈은 왜 병일까. 너의 푸념과 나의 푸념이 머리둘 곳 없는 그 곳에 떠오르는 불치의 풍경인 꿈은 왜 불치의 병으로 평생 버려지지 못할까. 또한 시인은 왜 꿈을 버리려고 몸부림 치고 있을까. 꿈이기 때문일까. 꿈이라면, 꿈 아닌, 그것은 어디일까.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 출세(出世)의 해탈도 꿈입니다 /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 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 /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시 「꿈이라면」에서는 <사랑의 꿈>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다. 이 짧은 시에는 <꿈>이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오는데, 그 꿈들은 제각기 다른 꿈이면서, 다같은 꿈이 되고 있는 그런 것일까.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과 속박>과 <출세의 해탈> <웃음과 눈물>과 <무심의 광명>은 서로 상이한 세계로 대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립이 <꿈>이라는 것으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있다. 그렇다면 꿈은 대립의 상태를 풀어주는 어떤 것이란 말인가. 만해가 이 시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꿈>이다. 만해의 주장으로는 <사랑의 꿈>이야말로 불멸의 세계로 가는 열쇠가 되고 있다. 이 모순은 그의 또 다른 시 「선사(禪師)의 설법」에서 갈파한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이며 <그러므로 대해탈(大解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이라는 것과 이어진다. 아아, 나도 그런 꿈을 갖고 싶다. 그런데<일체만법의 꿈>과 <사랑의 꿈>은 정녕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