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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단상(新年短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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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최희수 1986년 01월 47호
병인년 새해의 가야산 설봉을 바라본다. 저 눈이 녹아야 만고천년을 흘러 내려온 해인계곡
을 이루고 고운 최치원선생이 인어난분 지척간(人語難分 只尺間)이라는 글귀로써 세상의 시비를 잊었다는 홍류동 계곡의 굉음이 커진다. 나는 잠을 깬 옛조상의 발길을 따라 하얀 기암 사이마다 꽃들이 피어날 화려한 봄을 기다린다.
형제들이여, 신춘에는 골짝마다 꽃은 붉게 피어나고 숲속에는 다람쥐 토끼가 마음껏 뛰어놀며 아름다운 강산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하리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즐겁지 아니한가. 하늘의 제석도 우리의 행적을 놓치지 아니하니, 새해에는 모두 다 한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나 세계를 밝히자.
일주문을 지나니 대웅전 곁으로 보이는 학사대의 고장(古杖)이 하늘을 가리키고 솔은 여전히 푸르름을 자랑하는데 법당에서 울려나오는 스님의 목탁소리는 언제 들어도 변함이 없다. 신라천년으로 이어진 부처님의 미소 앞에 두손을 합장하고 마음의 향을 사르니 일진 청념이 머리를 스치고 태고의 정적 속에 나는 바위처럼 무겁게 정좌한다
경북 안동군 녹전면 말바위 고갯길을 휘휘 저으며 날아오르는 학, 태백산 준령에 비친 햇살이 하도 눈부셔 아예 구름 위로 솟아올라 현실을 떠났는가. 조국강산이 아름다워 비상을 그칠줄 모르고 타고난 천품대로 외마디 고집을 세우며 나래 끝에 새겨진 먹줄을 자랑하는가. 어디에 그 날개를 접어 다시 한번 거친 울음과 함께 긴 잠에 들어가려는가. 새해 새아침에는 하늘 끝까지라도 너의 고귀한 자태로 침범하여 자유세상을 마음껏 노래하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법당의 천장이 높다. 팔만대장경의 만법을 설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였던가. 그렇게 하고도 설한바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모든 것이 다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한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당 밖 뜰에 내려진 햇빛이 무척 밝다. 차가운 겨울 대기조차 맑은 얼음처럼 느껴진다. 이제 다시 연좌에 앉으신 부처님의 32상을 바라보며 나는 언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영원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런지, 갈길이 먼 나그네의 심정.
구광루 앞마당에 흘러내리는 가야산 동삼수를 한바가지 떠 마시니 오장육부가 쇄락한데 남산 제일봉이 눈앞에 우뚝하다 코로는 향냄새를 맡았고 귀로는 법문을 들었으며 입으로는 가야산 동삼수까지 마셨으니 새해 새아침에 지족함이 더 바랄데 없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사바에 일어나는 일을 두고 홀로 법열에 들었으니 자만이 너무 심한 것 같아 한번 더 각성한다.
언제봐도 푸르고 깊은 가야산을 뒤로하고 병인년 새해 새아침을 가벼운 발기로 출발한다. 소나무, 잣나무 숲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88고속도로 위를 달리니 이른 아침의 드라이브 기분이 무척 상쾌하다. 금년에는 작년에 하지 못한 일들을 더욱 열심히 하고 물질이든 마음이든 빚지지 않고 이웃에 베푸는 선행을 하여야지. 물론 죄지은 사람들을 엄히 다스려 가난한 동포들이 잘사는 나라가 되도록 조금이라도 신명을 바쳐 일을 해야지.
검은 책상 앞에 묶여서 앉아있는 피의자를 바라본다. 너는 무슨 없이 있어 법의 밧줄로 묶였는가. 아무리 보아도 그 얼굴에 중생의 고뇌에의 죄과가 없다. 법을 판단하는 일이 나의 없이 아니라면 그대로 집으로 보내 권속들과 동고동락케 하고 싶다. 높은 교도소가 잠시 쉬어갈 집이라 할지라도 당신은 그곳에 꽃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가꾸다 갈 것을 권유한다. 제행이 무상하니 세상이 모두 교도소가 아닐런가.
콧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길 나그네 길, 안개 깊은 새벽 나는 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