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불이란 부처님의 덕을 경모하는 것이요, (禮佛 敬佛之德)
염불이란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며,(念佛 感佛之恩)
지계란 부처님의 행을 본받는 것이요,(持戒 行佛之行)
간경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치를 밝히는 것이다.(看經 明佛之理)
좌선은 부처님의 경지를 체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坐禪 達佛之境)
참선은 부처님의 마음에 합하기 위한 행위며,(參禪 合佛之心)
득오란 부처님의 도를 증득하는 것이요,(得悟 證佛之道)
설법이란 부처님의 원을 만족하는 것이다.(說法 滿佛之願)
이 글은 강원(講院)의 사미과(沙彌科) 텍스트 중의 하나인 「치문경훈(經門警訓)」의 팔일성해탈문(八溢聖解脫門)장에 나오는 것이다. 글쓴이는 영명 지각수선사(永明智覺壽禪輝師)이다. 904년에 태어나 975년에 입적하기까지 선교일치사장(禪敎一致思想)을 표방한 그는 중국 북송시대의 선승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며 임안부 여항 사람이다. 스물여덟살에 취암삼 (翠岩參)에 의해 머리를 깎고 득도하였으며 천태(天台)의 덕소국사(德韶國師)에게서 선지(禪旨)를 깨닫고 법안종(法眼宗)의 제3조가 되었다. 영명사(永明寺)에 오래 있었으므로 그것이 호가 되었으며 보통 연수(延壽) 선사라고도 부른다.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6권, 「유심결(唯心語)」 1권, 「종경록(宗鏡錄)」 100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긴 대학자이기도 하다.
선사이면서도 매일 아미타불을 십만 념(念)씩 할 정도로 정토신앙에도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위대한 선각자를 선정쌍수주의(禪浮雙修主義)의 창시자라 부른다. 또한 증관(澄觀), 규봉(圭峯)으로 이어지는 총합주의(總合主義)를 본받아 화엄(華嚴), 천태(天台), 유식(唯識)의 삼교일치사장을 부르짖기도 하였다.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그가 선사이면서도 예불, 염불. 간경, 지계, 좌선, 참선, 득오, 설법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는 것과 이 모두는 결국 ‘부처님’에게로 귀착되고 있음을 본다. 여기에 그 다음 귀절을 실어본다.
“실제이지(實際理地)에는 불수일진(不受一塵)이나 불법문중(佛法門中)에는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즉, 본원자성(本源自性)의 청정한 이치에서 본다면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불법에서는 한 법도 소홀히 다루어 버리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집을 짓는 데는 들보나 기둥과 같이 굵직굵직한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서까래도 필요하고, 기왓장도 있어야 하고 자갈, 모래, 물, 시멘트도 필요하다. 이와 같이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어야 집이 이루어진다. 어디 집뿐이랴. 모든 사물이 하나의 꼴로 등장하기까지는 숱한 인연들이 모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필요치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푸른 하늘 뭉게구름, 햇살, 공기, 쏟아지는 빗줄기, 산, 들, 강, 바다, 이 모두가 필요한 것이다. 장미가 아름답다고하여 장미만 피어 있는 것보다는 들국화, 패랭이도 함께 어우러져 피어있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파아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한점 있다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노을은 구 름과 석양과 산들이 함께 만들어 낸 예술품이다. 그래서 남전 보원선사는 조주가 “어떤 것이 도입니까?” 하고 묻는 물음에 “평상섬(平常心)이 도”라고 한 것이다.
평상심이란 갈등과 번민이 섞여 있는 마음이다. 평상심이란 온갖 욕망과 번뇌가 어우러진 마음이며, 탐욕과 성냄이 함께 한 마음이다. 또 미워하는 마음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도 평상심이다. 물론 사랑하고 자비로운 마음도 평상심의 한 단면이다. 이와 같이 평상심이란 선과 악이 공존하며 깨끗함과 더러움이 뒤섞인 마음이다. 곧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이 뒤엉킨 마음이다.
혹자(或者)는 평상심이 도라고 한 말에서 평상심이란 거듭 부정을 거친 단계에서의 평상심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평상심이 아니다. 온갖 욕망과 번뇌가 사라진 청정 무구한 자성은 평상심이 아니다. 적어도 조주에l게 답한 남전(南專)외 평상심은 진망화합(眞妄和合)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우리 중생들의 울고 웃는 일상의 마음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조주에게 대답한 남전의 평상심은 우리네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아주 깨끗한 마음, 모든 상대적인 개념이 사라진 절대평등의 마음, 최고로 순진무구한 마음이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그와 의견을 달리하여 그 마음은 우리들의 평소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대답한다.
악인정기(惡人正機)라는 말이 있다. 착한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은 부처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보살은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들도 자신의 힘으로 보리도(菩提道)에 나아갈 수가 있다. 문제는 중생이다. 박지범부(博地凡夫)다.
번뇌와 욕망에 찌든 하열(下劣)한 자다, 이들은 부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를테면 건강하고 건전한 사람은 약이 필요없고 의사가 필요없다. 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신체적으로 병이 있고 정신적으로 건전치 못한 경우이다. 의사도 환자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병원은 병을 고치기 위해 필요한 기관이다. 건강한 사람이 미쳤다 병원의 침대에 누워있겠는가.
다시 말해 평상심은 구제되어야 할 대상이 갖고 있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쓰는 가에 따라 다른 경지에 나아갈 수 있다 누구든지 그 마음을 떠나서 도를 이룰 수는 없다. 그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부처도 되고 조사도 된다. 아뇩다라삼먁보리의 마음은 바로 진망화합의 마음으로부터 태(態)를 달리한 것뿐이다. 아 진망화합의 마음을 버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승화시키느냐가 중요하다.
“진흙이 많으면 불상도 커진다〔泥多佛大〕”즉 번뇌가 크면 깨달음도 크다. 욕심이 많은 만큼 버림도 크다. 사랑의 척도에 따라 이별의 슬픔 역시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러한 진흙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가 중요하다. 보통 우리는 오욕의 번뇌를 미(迷)의 근본이 되는 것, 깨달아 부처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것, 따라서 끊어 없애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오욕 번뇌를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진흙과 마찬가지겠지만, 이를 올바른 수행방법에 따라 처리한다면 불상을 빚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성불의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신현철 도예연구소를 방문했을 때였다. 머리와 수염은 길어 댓자나 되고, 작업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은 모습이 잘 어울리는 신현철 씨가 그 특유의 미소를 띠며 반겨 주었다. 그의 작업장을 돌아보며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그 중에 지금도 이따금씩 떠오르는 한 마디가 있다.
“내게 었어선 이곳이 바로 수도장이올시다.” 그에게 걸려들기만 하면 어떠한 흙이든지 아름다운 그릇이 되곤 하였다. 그는 평범한 진흙으로 최상의 예술품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의 심안(心眼)은 평범함 속에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골라내는 눈이었다. 아니 평범 그∙자체를 승화시키는 그런 눈이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며 흙을 어루만지던 그가 청정무구한 빈 마음이어야 한다며 그의 작품을 선보일 때, ‘아하, 도는 바로 이곳에도 있었구나’ 하고 느꼈다.
그는 젊다. 그런 만큼 앞으로 작품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빚어갈 날도 창창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열정이며 몸에 배어 있는 겸손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작품을 만드느라 열심히 땀을 흘렸지만 기대에 못 마칠 때는 사정없이 던져 버리지요. “영명 연수선사의 말대로다. 불법문중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지만 실제로 이치면에서는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이리저리 주워섬겨 보지만 고개만 갸우뚱거려질 뿐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반야심경의 한 귀절,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 없다‘는 말이 왜 그런지 말이다. 불법문중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는데, 왜 없는 것일까. 색(色)은 공(空)인데, 왜 공은 색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래도 여전히 심경귀절을 이해할 수가 없는데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