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의 거룩한 도가 있어서
존재의 얽매임을 벗겨주나니
부처님은 바른 법을 펴 말씀하사
괴로운 중생을 위안시키네
과거의 여러 모든 세존께서도
이 도의 수레 타시고 건너 가셨고
미래의 여러 모든 세존께서도
이 도의 수레 타시고 건너 가시리
현재의 바로 깨친 거룩한 이도
이 도의 수레 타시고 저 바다 건너
나고 죽음의 언덕을 완전히 떠나
마음을 길들이어 청정하시네
끝없는 나고 죽음의 수레바퀴를
모두 다 아주 녹여 없애버리고
가지가지 온갖 경계 환하게 알아
지혜눈은 바른 길을 드러내시네
비유하면 간지스의 물이 흘러서
넓고 큰 바다로 돌아나가면
거세게 차던 불결 자는 것처럼
바른 법도 또한 그와 다름 없어라
...................... 중략......................
이와같이 거룩한 세존께서는
모든 중생 가엾고 슬프게 여겨
중생 위해 법의 수레 굴려주시사
천상 인간 감싸고 보살피시며
열반의 저 언덕에 건네 주나니
그러므로 이 세상의 온갖 중생들
모두 다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범천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이렇게 찬탄한 뒤 부처님께 예배하고 이내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잡아함경 권 44)
(해 설)
1. 근원적인 물음(四念處觀)
사념처관(四念處觀)은 불타가 열반에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곳에 의지해서 공부할 것을 당부한 진리수행의 요체입니다. 즉 부처님을 항상 곁에서 모시던 제자 아란이 마지막 열반에 드시려는 부처님에게 여래가 돌아가신 뒤 수행자들이 무엇을 의지해 공부할 것인가를 묻자 불타는 사념처관과 계법에 의지하여 머물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천태지사선사(天台)는 그의 관심론(觀心論)의 첫머리 게송을 다음같이 쓰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장차 열반에 드시려 할 때 / 자애로운 어버이처럼 제자에게 당부하시되/ 사념처에 의지해서 머물라 하셨네/ 우리들은 여래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하여/ 이와 같은 부처님의 당부를 생각지 않고 / 수행에 게을러서 안으로 지혜가 없고 / 계행에 게을러서 삼악도에 떨어지고 있도다\'
천태선사의 위의 게송은 네가지 현실경험의 지평을 반성적으로 관찰해가는 사념처관이 삶의 부자유를 자유에로 전환시켜가는 모든 수행방법의 뿌리가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대에 발달한 선종의 1700 공안(公案) 정토종의 십육종관(十六種觀) 화엄종의 사종법계관(四種法界觀) 등도 그 내용은 모두 사념처관에 거두어지는 것이니 사념처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을 지향하는 관문(觀門)이 있다면 그것은 불교가 제시하는 진실한 관문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본경 사념처관이 바로 일승(一乘: Ekay na)의 길이라고 했으며 대품 반야경에서는 사념처가 곧 마하야나(Mah -y na: 大乘)며 마하야나가 곧 사념처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념처관이 바로 주체과 객체, 있음과 없음, 영원과 변화, 선험성과 경험성을 동시에 부정하되(반 ) 동시에 건립하여(반 ), 함께 실어주는 크나큰 진리의 수레(大乘)며 치우침없는 생명의 길(中道)이라는 것입니다.
본경에서 말하고 있는 마땅히 살펴야 할 네가지 곳이란 몸(身)과 느낌(受), 마음(心)과 마음에 알려지고 있는 존재일반(法)을 말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관문(觀門)이 어떤 초월적인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전에 우리들이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경험의 장을 반성적으로 되살펴 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사념처관이란 선과 악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두움이 함께 굽이치고 있는 현실역사의 장을 뒤집어 살펴냄으로서 자유를 실현해가는 생활의 도인 것이니, 옛스님은 이러한 뜻을 \'땅에서 넘어진 자는 다시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야 할 경계로서는 몸, 느낌, 마음, 법(身 受 心 法)이란 각기 독립된 실체로서의 존재 영역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몸도 객체와 대립적으로만 주어진 몸이 아니라 대상을 자신의 운동속에 싣고 있는 몸이며, 다시 자신을 대상속에 던져줌으로써 대상속에 나가 있는 몸입니다. 그리고 몸에서 보면 마음까지도 몸의 작용과 함께 주어지는, 몸의 자기 표현으로서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근(六根) - 육경(六境) - 육식(六識)으로 표현된 온갖 것의 범주화는, 사념처에 관한 불타의 교설속에서는 안의 몸 (內身:六根) - 밖의 몸(外身:六境) - 안팎의 겹쳐지는 몸 (內外身:六識), 안의 느낌(內受) 밖의 느낌(外受) - 안팎이 겹쳐지는 느낌(內外受), 안의 마음(內心) - 밖의 마음(外心) - 안팎의 겹쳐지는 마음(內外心), 안의 법(內法) - 밖의 법(外法) - 안팎의 겹쳐지는 법(內外法)으로 다시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살펴야 할 대상으로서 네 가지 곳에 대한 위와 같은 언어표현은 어떤 것을 그것 자체만의 독자적인 세계로 붙잡아 두려는 뭇삶들의 실재론적인 사고를 지향해서 세계의 참모습을 열어 보이려는 불타의 연기론적인 언어구조인 것입니다. 즉 불타가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언어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한 세계는 자기 영역속에 고립되어 닫혀진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주체 - 행위 - 세계가 상호 교섭되는 열려진 존재운동의 장인 것입니다.
그러나 뭇삶들은 연기(緣起)로 이루어져가는 세계의 참모습을 바로 보지 못함으로써 갖가지 왜곡된 앎과 함을 일으켜 삶을 부자유하게 영위하여 갑니다. 즉 우리들의 몸을 마음과 분리된 몸으로 자명하게 받아들이며 우리들이 대상과의 관계속에서 마음속에 느끼는 고통과 기쁨을 주관성 안에 실제적으로 주어지는 느낌으로 파악하여 고락의 갈등속에서 헤맵니다. 그리고 마음에 떠오르는 존재일반을 마음밖에 독립된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소유와 상실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경험성 밖에 환상적인 선험적 실재를 세워 놓고 삶에 대한 모든 물음의 해답을 그 선험적 실제에서 구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초월한 창조자(기독교신앙)를 신앙한다든가 범신적인 일자(一者)에로 몰입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도피하려 하며 또는 있음과 없음 너머에 절대 무를 상정한다든가 태극(太極)이라는 선험적 실재를 가상하여 우주 인생의 문제에 해답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실재도 아니고 허무도 아니며(非我非無我) 영원도 아니고 변화도 아닌(非常非無常) 중도실상을 보지 못하고 끝없는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불타의 사념처관은 인간과 세계위에 걸쳐진 모든 형태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독단적이 이념의 옷들을 벗겨냄으로서 주어진 전체로서의 삶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려 합니다. 즉 우리들의 경험적 현실에 관한 되물어감을 통해서 모든 허위적인 앎의 자와 비틀어진 삶의 틀을 깨뜨림으로써 그것들을 자기 부정의 선천적 터전에서 창조적으로 재정립해 내는 것입니다.
사념처관에서 네가지 경계를 살피는 주체는 제 6의식(意識)입니다. 그러나 살펴지는 네가지 경계가 6의식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6식의 본질적인 자기 구성요건(相分)으로 주어지는 것이니 사념처관 안에서 수행되어지는 근원적인 물음에는 물음과 대답, 살핌과 살펴짐이 둘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장(異而一)으로 현전하게 됩니다.
즉 네가지 곳을 향해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돌이켜 들어가면 알 수 없는 물음의 마음은 알지 않을 수 없는 대답의 마음으로 자신을 되돌려 줍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지 곳을 살피는 지혜(能觀智)는 비치되 고요하며(照而寂), 살펴지는 네가지 경계(所觀境)는 교요하되 비치어(寂而照) 제 6의식은 이제 앎이 없는 앎(無知而知)으로 자신을 지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 6의식의 뿌리인 제 7식(manas:意根)이 지혜로 전환되며 제 6식과 함께 움직이는 감각지로서의 전오식(前五識)이 6·7식을 따라서 모두 지혜로 전환되게 됩니다. 이와같이 주체 객체를 매개하는 전 7식(前七識)이 지혜로 전환되어 주체와 객체는 그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하나도 없고 둘도 없는 조화로운 관계로 돌이켜 집니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은 마음 아닌 마음으로 뒤바뀌고 대상은 대상아닌 대상으로 현전하여 우리들은 주체-객체가 스스로를 부정해 버리는 선험적 터전 속에서 주체 객체를 새롭게 정립해내는 대긍정의 에너지, 마르지 않는 역사창조의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사념처관을 말할 때 몸은 더럽고 느낌이란 괴로우며 마음은 덧없고 법은 자체가 없다고 살피는 것(觀身不淨, 觀受是苦, 觀心無常, 觀法無我)을 사념처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타의 뜻이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사념처관의 정의인 것이니 그렇게 정의되는 사념처관이란 몸, 느낌, 마음, 법이 깨끗하고 즐거우며 항상하고 실재하는 것이라 국집하는 뭇삶들의 환상을 깨기 위해 베풀어 놓은 대치관(對治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도 다하고 약도 다한 곳에서 삶의 진실을 바로 살펴 들어가면(實相觀) 몸은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느낌은 즐거운 것도 괴로움 것도 아니며 마음은 항상한 것도 변화하는 것도 아니며 법은 실재도 아니고 허무도 아닌 것입니다.
이와같이 대치관을 뛰어넘은 실상관(實相觀)으로서의 사념처관을 천태종 혜사선사(慧思)는 그의 제법무쟁삼매행문에서 다음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들이쉬고 내쉬는 이 숨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 또는 이 몸은 어느 곳을 좇아 왔는가(身念處)
2)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어디서 생겼는가(受念處)
3)삼계가 허망하여 모두 마음으로 지은 바이니 이 마음은 어디서 왔는가(心念處)
4)착한법, 악한법, 착하지도 않고 악하지 않은 법들은 어디서 왔는가(法念處)
(위와 같은 혜사스님의 사념처에 관한 법문은 달마 선종의 다음 법문에 서로 대비될 수 있다. 곧 몸에 관해서는 \'사대육신이 공겁전 자기와 같은가 다른가(古峰)\' 느낌에 관해서는 \'너의 마음이 괴로우냐 그 괴로운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達摩)\' 마음에 관해서는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다 이것이 무엇인가(慧能)\' 그리고 법에 관해서는 \'착함도 생각지 말고 악함도 생각지 말라. 이러한 때 어떤 것이 너의 본래 모습이냐(慧能)\'
2. 선(禪)의 초월성과 역사성(止觀)
위에서 우리는 \'땅에서 넘어진 자는 다시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는 옛스님의 지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엇인가(是甚 )\'라고 , 삶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갈 때 이것이라고 지칭되는 물음의 대상은 현실 밖에 있는 초월적인 실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현전에서 보고 듣고 알고있는 현실경험의 세계인 것이니 몸, 느낌, 마음, 법에 관한 반성적인 물음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을 되돌려 주게되면 우리들의 경험현실(用)은 선험성( )의 자기 표현(妙用)으로 새롭게 표출되어집니다.
즉 능히 살피는 지혜는 비취되 고요해지며(照而寂)살펴지는 경계는 고요하되 능히 비치게 되는 것(寂而照)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요함이란 주체-객체, 아는 자 - 알려지는 것이 스스로의 실체성을 부정해 버리는 선험적 터전에 돌아감을 말하며, 비침이란 주체-객체가 끊어진 자기부정 속에서 주체-객체를 창조적으로 정립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온갖 것은 제각기 독립된 자성이 없어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지만(諸法無我), 자성이 없는 것도 없어서(無無我) 새로운 자기 규정과 관계 정립의 운동을 계속하는 것(諸行無相)입니다. 그러므로 사념처관에 의지하여 자유를 실천해가는 구도자는 온갖 것이 자성없음(眞如門)을 의지하여 그침(止)을 닦아, 나고 죽음과 나 너의 대립을 뛰어 넘고 , 자성이 없는 것도 없음(生滅門)을 의지하여 살핌(觀)을 닦아, 나 너의 조화로운 관계성을 창조적으로 새롭게 규정해 가는 것입니다.
즉 사념처관은 역사현실 밖으로 한 발자욱이라도 물러서 나감이 없이 역사상황에의 벗어남과 들어감, 선험성에로의 돌아감과 경험성에로의 돌아옴, 휴식과 노동, 앎이 없음과 앎을 동시에 통합해내는 치우침 없는 생명운동 역사운동인 것입니다. 그것을 본경은 \'끝없는 나고 죽음의 수레바퀴를 모두 다 녹여 없애 버리지만(於生死輪( ) 悉已永消眞: 不住生死)\' 나고 죽음이 없는 경계에도 머물지 않고 \'가지가지 온갖 경계 환히 알아 지혜 눈으로 바른 길을 항상 드러낸다(知種種諸界 慧眠顯正道:不住涅槃)\'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사념처관을 닦아 익혀가는 지혜의 사람은 소용돌이 치는 역사현실고의 좌절과 희망 고통과 기쁨의 물결에 휩쓸려 물들지 않되(不得苦受樂受) 역사현실 밖으로 물러서 나가거나 환상적인 초월성에로 도피함도 없이 현실상황을 새롭게 직면해 가는 (不得不苦不樂受)신념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괴롭고 쓰라린 역사의 좌절 속에서 무너지거나 상처받지 않고 다시 일어서며, 남의 괴로움 위에 구축된 이기적인 쾌락의 세계에 함몰되거나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허무의식도 벗어나 너와 내가 함께 피어나고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을 통해서 자유를 구현해가는 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 그것이 사람이 되었든 물건이 되었든 제도 이념 가치체계가 되었든, 그것을 제조건과 더불어 생성되어진 것으로 확실하게 파악해 냅니다. 그렇게 하여 어떤 것을 우상화시키거나 절대화, 신비화 시킴으로써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을 노예적인 삶으로 전락시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을 허무속에 내버려 두지 않고 그것들이 전체속에서 갖고 있는 상대적인 가치들을 올바로 긍정해 냄으로써 삶의 새로운 과정과 전체적인 조화에 맞추어 발전적으로 재생산해가며 재의미화해 갑니다.
그리하여 타인의 삶을 자기의 삶과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해 버리는 도덕적인 방관주의와 무관심을 벗어나서 대상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과 베품을 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常) 실재의식도 벗어나고,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져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斷) 허무의식도 벗어나서, 역사의 끝없는 과정속에서 과정의 공포를 벗어나며 흘러가되 흘러가지 않는 역사의 원천속에서 새로운 역사창조의 에너지를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엄경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실재의식과 허무의식을 뛰어넘어 역사의 진실을 바로 살핌으로써 인간의 모든 허위의식과 환상을 깨뜨리어 역사의 모순상황을 극복해가는 보살의 삶을 다음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得是法已增慈愍 轉更勤修四念處
身受心法內外觀 世間貪愛皆除遺
보살은 사념처의 바른 관 없어
뭇삶 위해 대자비행 더욱 베풀고
보다 더 부지런히 사념처 닦네
그리하여 몸과 느낌 마음과 법의
참되 모습 안팎으로 바로 살피어
세간의 탐심 애착 모두 없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