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 시내
대천역에 열차가 도착한 것은 열시 반이 조금 넘어서였다. 전에도 더러 타고 내린 적이 있어서 발디딤이 결코 생경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읍에서 시로 승격도 됐고 또 만만치 않던 감기 뒤끝의 부실함 탓인지, 밤공기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거리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요란한 팝송이 콸콸넘치는 이름 모를 지하 스탠드 바와 애써 이를 외면하고 있는 듯한 어리둥절한 표정의 브라암스 얼굴을 간판으로 내건, 동명(同名)지하 다방의 두어 빌딩 외엔∙∙.
성주! 성주! 하는 택시 운전수의 외침에, 문뜩 대천에서 성주를 거쳐 성주사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짐작이 못내 미심쩍어, 소요 시간과 위치 등을 그 자리에서 자세히 물어 보았다. 별로 멀지 않다는 운전수의 말에 갑자기 시장기가 확 엄습해 왔다. 왜 이렇게 풀기가 없나했더니 역시 천안역 가락국수로 슬쩍 넘긴 허기라 퍽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건널목등 사거리의 춘천식당, 시장통의 충남식당 등은 이제 마악문을 닫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허겁 지겁 새로 생긴 만두집을 찾아 든 것은 큰 거리를 두 세번 오르락 내리락 하고 나서의 일이었다.
한내 대천(大川)-도청 소재지인 대전보다로 현금이 더 많다는 충남서안의 산업 관광 도시 황해의 풍부한 수산 자원 및 관광 자원과 인근의 산자락마다 묻혀 있는 검은 노다지 무연탄, 그리고 저 유명한 남포 오석 등을 이용한 석재 가공업 따위로 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생산 도시로서의 면모를 과시해 온 보령군의 거점 대천시.
금년부터 언필칭, 시민이 된 이곳 사람들의 표정은, 그래서 그런지 저번의 읍민이었을 적에 비해 무언가 좀 달라진 것 같다. 아니면, 대천시와 충남 내륙간의 원활한 교통 소통에 장애가 되어 온 성주산에 터널이 개통된 지도 벌써 오래이고, 다시 중국 대륙과의 교역을 위한 항만이 건설된다느니 서해안 고속 도로가 개설된다느니 하는, 서해안 시대의 핑크빛 청사진에 흠뻑 취한 탓은 아닐까?
삽상한 밤 공기에 미리 연탄불을 부탁해 놓은 여인숙에 들어선 것은 열 한시반이 다 돼서였다.
탄광촌 풍경
미산면은 보령군 관내 9개 면 가운데에서 그 넓이가 가장 크다. 하지만 논과 밭 등 쓸모있는 땅은 별로 없고, 9할 이상을 산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 이렇게 산이 많은 까닭은, 공주군과 청양군을 가로 지나온 차령산맥이 도중에 다하지 못한 기운을 이곳에다 모두 들어 다부었기 때문이다 성주산은 바로 이곳의 주봉이다. 하지만 일대의 크고 작은 봉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천과 충남 내륙 간의 교통 소통에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석탄가루와 황토먼지는 또 어쩌면 그렇게 꼭꼭 여미어 닫은 버스창문 틈을 잘 비집고 들어오던지∙∙, 대여섯 차례 넘어본 적이 있는 성주산고개는 마침 한여름의 비포장도로였다.
오늘은 잘 포장된 길을 타고 시원하게 뚫린 터널을 지나 성주에 닿을 수가 있었다. 여기저기 산비탈에 흩어져 있는 채탄광구는, 충남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난다는 성주가 바로 코앞이라는 사실을 무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더러는 두어 길 높이로 야적되어 있는 소나부 갱목도 보이고, 석탄을 가득 실은 광차를 힘겹게 밀고 나오는 젊은 광부의 모습도 보인다.
폐석으로 쌓아 올린 축대 한켠에는 탄가루를 인 아카시아꽃이 한창 흐드러졌다.
성주 탄좌의 광구 수효는 거의 사백여개에 이른다. 이 일대의 산지는, 그러니까 겉만 번드르르하지 사실 속은 텅 빈 강정이냐 다름이 없는 셈이다. 하기야 골짜기 마다 가득한 폐석 더미와 더불어, 속깊이 패인 상촌으로 인해 겉모습이 상한 지도 이미 오래 전이긴 하지만∙∙.그런데, 성주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가 않다. 받광촌의 분위기래 보았자 어디인들 뾰족한 수가 있을까마는,∙그래도 이곳은 미산면의 면소재지인 동시에 이웃 광산 가족들의 가장 가까운 일차 소비지임에모 불구하고, 그 전보다 여엉 축 처져 있는 느낌이다. 아하, 바로 그거로구나! 아까 버스 안에서 아낙네들이 나누던 말…. 애아부지는 기술이래두있지, 우리 야 아부지는 워쩔라나모르겄어. 일이 겨우 손에 익을만하니께 이게 또 무슨 꼴이랴?
얼마전 정부에서 발표한 석탄 산업 합리화 방안인가 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원인이었던 것이다.
성주산 성주사지
석탄을 파내면 파낼수록 갱도가 더욱 깊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일정 채탄량에 대한 생산비도 따라서 상승하리란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충분한 말미도 주지 않고 알량한 이주 대책비를 무슨 큰 선심인 듯 앞세워 광부들의 일손을 빼앗는다면, 그나마 성한 몸뚱이 외에는 아무런 밑천도 없는 이들이 설 곳은 과연 어디일까? 석탄 산업이 사양산업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리 석탄에 비해 석유가 생산성이 높다 해도,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이렇게 석탄 산업을 천대해도 되는 걸까? 부여길과 갈라져 성주사지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문득 왼쪽 시야가 시원스럽게 트이며 우뚝 선 산록이 다가왔다. 시커멓게 파헤쳐진 주위의 모습과는 달리, 유독 온전히 보존된 청정한송림 그 아래로는 과연 광활한 옛 절터가 누워 있질 않은가!
어디가 진입로인지 그마저도 정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절터는 사방이 얕으막한 돌무더기로 빙 둘러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그 넓은 터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네개의 탑과 한 개의 석등, 그리고 통일 신라 무염대사(無梁大師)의 불덕 (佛德) 기리는 국보 제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朝慧和尙百月葆光塔)뿐 웅장한 옛 가람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인근 주민들에 의해 농경지로 이용되어 왔으나 뒤늦게나마 이를 모두 사지 (寺地)로 환수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군에서 소유하고 있던 땅은, 전체 구천여 평 가운데 고작 백 열두 평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일찍이 통일 신라 시대에는 구산 선문(九山輝門)의 하나였으며 한때는 이천오백여명의 승려가 불도를 닦았던 성주사의 옛 터전-텅빈 그 자리만큼 무상감이 사무쳐 온다.
무염대사와 성주사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보게 되면, 성주사는 백제의 법왕(法王)에 의해 처음 세워진 오합사( 鳥合寺)가 바로 그 전신이라고 한다. 법왕은 성왕(聖王)과 더불어 백제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호법왕(護法王)이다. 즉위 첫 해(599년)에는 일체의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전국의 민가에서는 그 동안 기르고 있던 매와 꿩 등을 모두 놓아 주었으며, 고기를 잡는 어구도 불태워 버렸다. 이는 불교의 불살생계를 그대로 실천하려 한것으로써, 그 현실적인 의의야 어쨌든, 왕의 돈독한 불심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인 것만은 분명하다.
1969년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에 의해 그동안 이곳에서는 다수의 비문이 출토되었다. 그 결과, 신라 문성왕 (文聖王)대에 당나라에서 오랜 수학을 마치고 귀국한 무염대사(無梁大師)가 이전의 오합사를 크게 증창하였으며, 후에 이를 성주사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무염 대사는 누구인가?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대사는 동 애장왕 2년(801년), 서라별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불교에 뜻을 두어 12세 때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 들어가 법성선사(法性禪師)에게 사사하였으며, 헌덕왕(憲德王) 때 당나라로 건너가 20여년만인 문성왕(文聖王) 7년에 귀국하였다. 이어 그는 왕자혼의 요청에 따라 오합사를 크게 증창하고 그곳에 머무르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이후 무염의 법계는 통일 신라 선문 구산(輝門九山)의 하나인 성주산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입멸후, 진성 여왕 (眞聖女王)은 그에게 대낭혜 (大朝慧)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지금 절터에 남아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朗慧和尙百月葆光塔碑) 또한 진성여왕이 대사의 수승한 행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건립한 것인데, 비문은 당대의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짓고 글씨는 신라 말에 크게 유행한 구양순체의 대가이며 고운의 종제(從弟)인 최인곤이 썼다.
한편, 사지 (寺址) 내의 금당(金堂)터위에 위치한 3기의 삼층석탑은 각각 정광(定光), 약사(藥師) 가섭 (週葉)의 3불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오늘날 이들은 불탑(佛搭)이 아닌 승려의 묘탑(墓塔)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 중의 어느 하나가 바로 무염국사의 백월보광탑으로 현재의 탑비와 관계있는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찬란한 과거가 더욱 서러운 곳. 스러지는 석양빛이 더욱 처연한 곳. 살짝 주눅든 채 한켠에 묵묵히 서 있는 돌미륵의 짜안한 눈길이 못내 아쉬워, 몇 걸음 나선 곳에서 다시 해거름녘의 빈 절터를 뒤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