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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이산가족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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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배재민 1989년 06월 88호
I. 누가 이 아픔을...
일천만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대한적십자사가 제창하고 나선 1971년, 고(故) 최두선 총재의 “사반세기에 걸친 남북간의 장벽은 온갖 민족 비극의 원천이며, 특히 남과 북으로 갈린 이산가족들의 비급은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라는 8.12 특별성명에서도 명확히 밝혔듯이, 이산가족의 문재는 우리 앞에 놓인 가장 큰 역사적 과제이다. 단일핏줄, 단일언어, 단일문화의 토양 속에서 자라난 우리 민족이거늘 이렇듯 인위적으로 국토가 분단됨은 하나의 육신을 반쪼가리 불구로 찢어놓은 것과 다를바 없다、
지난 85년 9월, 역사적인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이 이루어졌을 때 온 민족은 검은머리 때 잃어버린 아들을 파뿌리 되어 안아보는 팔순 노모의 뜨거운 눈물 앞에 통곡하였다. 상봉 후 어쩔수 없이 떠나야하는 가족의 손을 언제나 다시 잡아볼지 알 수 없어 떨리는 손 내밀었지만 차가운 차창은 어느새 가시 철책선이 되어 가슴을 후빔에 우리 모두 고개를 돌리지 않았던가. ‘그래도 저들은 행복하지, 나는 언제나… ’하며 제 가슴 후려치는 일천만 이산가족의 한맺힌 오열이 한반도 곳곳을 뒤흔들었던 그 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

본래 한 몸이었으나 지금은 강제로 두 몸이 되었으니 어찌 그 고통 이루 다 말하리요. 오로지 분단을 넘어 다시 한몸이 되는 것만이 대동강과 한강물에 뿌려진 눈물을 거둘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한노력이 그들의 아픔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실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우리 역사에 먹구름을 던진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달 이 유월을 맞이하여 칠천만 민족의 분단의 아픔, 이산의 아픔을 하루라도 빨리 씻어버리는 페에 조그마한 발걸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II. 이산가족이 생기게 된 역사적 배경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이산가족이 대량으로 생겨난 데에는 중요한 삼대 계기가 있다、 그 첫째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이며, 둘째는 8.15 이후 외세에 의해 강요된 국토 분단과 그것을 합법화시킨 단독정부의 수립이며, 셋째가 한국전쟁이다. 배달민족이 타민족과 반민족 세력에 의한 침략과 억압에 눌려 신음하고 있던 이들 각 시기에 발생한 이산 가족의 특성에 대하여 살펴보자.
지배권력에 의해 강제된 상태에서 이산가족이 대량으로 발생하게 된 것은 1905년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서부터이다.
1910년 이후 일제가 살인적인 토지조사사업 따위를 전개함에 따라 만주와 간도로 향하는 대대적인 이농 대열이 형성된 것이다. 또한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40만여 명의 징병자, 460만명의 징용자(이 가운데 73만명이 일본, 사할린, 남태평양등의 외지로끌려갔음), 그리고 정신대나 노역 따위에 강제 동원된 노인, 여자, 어린이의 수효도 대단하였다. 일제 패망 뒤에는 외세에 의해 국토가 양단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뜻하지 않은 이산의 고통을 감수하게 된다. 나라를 팔고 동포의 땀과 피로 배불리던 지주 및 관료들이 속속 남하하고 또 교육, 구직, 출세 등의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홀몸 아니면 소가족 단위로 남하하였다. 그들은 헤어진 가족과 곧 다시 만나리라 낙관하였다. 그러나 ‘남한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공표하며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다시는 넘을 수 없게 된 철책선 이북은 ‘괴뢰 집단의 소굴’로, 두고 온 가족과 친지는 하루 아침에 ‘붉은 마귀’로 화하니 이산가족의 슬픔은 극대화되었다. 한편, 냉전 분위기로 치닫던 국제정세며 민족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 그리고 열악한 경제상황 들은 46년 이후 이백만 해외동포의 귀국 기회를 빼앗고 말았다.
‘남한군 15만, UN군 3만6천, 북한군 52만, 중국군 90만, 남한측 민간인 24만 북한측 민간인 100만의 사망자’에다 한반도 전역의 부상자와 행방 불명자까지 합한 숫자가 실로 천문학적이였던 사실만으로도 한국전쟁의 비극적 참상을 가늠할 수 있다. 남한 정부의 발표에서 ‘북한 공산주의의 학정과 만행에 견디다 못해 자유를 찾아 월남 또는 남하’하였다고 주장되는 피난민은 무려 500만 명에 이른다. 그로부터 사십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산가족의 아픔으로 남아 있는 이 민족 대이동의 실상을 올바로 살핌으로써 우리는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또 다른 민족의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피난민들은 친일파, 지주, 전직 경찰 등이었다”고 한 마크 케언의 발언처럼, 전쟁 초의 피난자는 주로 철책선 때문에 남하할 기회를 상실한 친일 지주 및 관료였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동안 적어도 시민의 93퍼센트가 서울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객관적 통계는 남북한 주민들이 전쟁 초기에는 피난민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피난민이 급격하게 불어난 것은, 세계 최고의 최신예 장비를 보유한 미군이 그 대부분이던 UN군이 참전하여 무차별한 융단폭격에 의한 한반도 전역의 특히 북한 지역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부터였음을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입증해 주고 있다.
“피난민 대열은 전쟁 발발 후 UN군과 국군에 의한 북한 점령, 후퇴과정에서 절정에 달하였다”.(이산가족 백서, 대한 적십자사, l976) “UN군이 지극히 파괴적인 병기를 사용하여 수많은 마을들을 검게 그을리며 후퇴하였던 것을 남한인이 목격하였다”.(뉴욕타임즈, 1951. 5. 21)
전쟁은 사람을 포악하게 만든다. 최신식 무기에 의존하여 몇 가지 조작으로 수백 킬로미터 밖에 있는 사람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현대전은 더욱 그러하다. 더군다나 상대방을 서로 미개인이나 괴물로 취급하는 이민족간의 전쟁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확하게 조준해서 탕 하고 쏘면 두개골이 날아가고 눈에서는 눈동자가 뽀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야말로 명사수가 아닌가”고 고향 신문에 기사를 보낸 어느 UN군병사의 자화자찬은 우리의 근육을 마비시킨다.
전두환정권의 폭압에 억눌려 숨죽여 왔던 사천만 국민이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이한열 군의 최루탄 살해 앞에 의연히 떨쳐 일어섰던 87년 6월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생명이 위험 속에 내몰린 인간에겐 탁월한 이념이나 주의, 주장보다 생명보위를 위한 몸부림이 앞선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역사적 사건들이 아닌가. UN군이 하늘에서 삐라를 대량으로 살포하며 “곧 원폭 투하가 있을 것이니 빨리 피난하라”고 하였을 때,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은 무슨 행동을 취해야했을까 50년 12월 무너진 대동강 철교 난간을 타고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며 평화와 생존이 조금이나마 존재하고 있는 곳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긴 대열을 이루어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과연 북한의 공산 학정이나 남한의 자유가 생명보다도 중요한 문제였을까 500만 명의 엄청난 피난 대열을 눈앞에 두고서, 전쟁의 참화를 깊이 깨닫고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전쟁을 몰아내겠다는 강한 원을 세우기 전에 자유민주체제나 공산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반생명적인 위험천만의 발상이 아닐 수 없다.

Ⅲ. 이산가족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하여.
남한에서는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여러 가지 각도로 진행되고있다. 민간 차원의 노력들은 이산가족의 실태 및 상황 파악과 남한내에서의 이산가족 찾기운동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얻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산가족이 생기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분단인 만큼 민간 차원의 시도들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
71년에 비로소 남한정부는 대한적십자를 통해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제창하고 남북적십자회담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회담은 그것이 표방한 바대로 인도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진행되기보다는, ‘73년 본회담’ 중단, ‘78년 실무회의 중단’, ‘85년 본회담’ 재개라는 그 동안의 경과에서 보이듯이 그 진로가 정치권의 파고를 타고 난항을 거듭해 왔다. 온 민족의 간절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표류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는 까닭으로 여기에서는 남한정부의 의도만을 파악해 보겠다.
‘71년 박정권은, 한편으로는 “이산가족문제는 분명 정치 사상, 제도 이전의, 천륜의 문제이며 인도의 문제이다“며 대대적으로 인도주의를 설파하고, 또 한편으로 장기집권을 위한 사회 전반의 재정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10월 유신으로 표출된 장기집권 야욕에 대한 온 국민의 독재 반대의 예봉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될 절대적인 필요와 맞물려 나왔던 것이 바로 이산가족 문제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78년에 다시 실무회의를 재개한 것도 당시 박정군에 항거하여 민주화를 이루고야 말겠다며 떨쳐 일어선 국민들의 열망을 무마시키기 위함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며 전정권이 국민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던 시기에 이루어졌던 이산가족찾기 운동조성(83년), 남북이산가족방문단구성(85년) 따위도 정권의 집권안정화의 도구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인도주의라는 이름 앞에 이산가족의 아픔이 정권욕의 밑거름으로 이용당하는 악몽에 시달리면서 낙담만 해온 우리 국민은, 이제, 스스로의 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각을 토대로 서서히 진군의 깃발을 올리고 있다. ‘87년 민주대항쟁’과 ‘88년 통일운동’의 급격한 고양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준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이산가족의 아픔을 더 이상 지속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 해결의 주체를 올바르게 세우고 그 주체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일천만이 넘는 이산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칠천만 겨레 모두가 바로 그 주체이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대가족 중심의 사회를 형성해 온 까닭에 친족, 친척의 범위가 방대할 뿐 아니라, 하나의 문화와 생활속에 온 겨레가 다 융화되어 있었던 연유로 민족의 분단은 온 민족에게 직접적인 삶의 고통을 안겨 주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산가족의 가장 일차적인 희망인 상호 확인, 서신 교환, 자유로운 방문들이 보장되어야 한다. “죽기 전에 얼굴 한번만 보았으면…” 하고 되뇌이며 감기지 않는 눈올 감아야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죽음을 앞둔 이들의 마지막 소원이 언제까지고 거부당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세째로, 이산가족의 가슴까지 갈라놓은 분단의 장벽은 반드시 걷어야 한다. 그리하여 통일조국의 새날을 하루 속히 이루어내야 한다. ‘한국은 하나의 단일한 사회경제적 단위이다. 분할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세계 여론에 등을 돌리고 강행된 외세에 의한 분단은 오로지 우리 민족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성취하는 통일만이 외세에 의해 발생한 이산가족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최선책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산가족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전쟁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한반도에 엄존하고 있는 모든 전쟁 위험을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굳건히 정착시켜야 한다. 아직도 한반도를 준전시 상태로 규정하고 있는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될 기미마저 없는 상황, 1,100여 개의 핵무기가 남한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그 사용권마저 미국에 넘겨준 상태 그리고 계속되는 군비 증강과 같은 오늘의 현실은 시급히 구제되어야 한다.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은 평화와 생존을 찾아 총알과 폭탄을 피해 찌는 더위 살을 에이는 추위도 무릅쓰며 전국을 방황했던 당시의 피난민들과 한민족의 가슴에 깊게 드리운 죽음의 암운을 걷어내고 밝은 미소를 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