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6.25와 불교사의 재조명을 바란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김현산 1989년 06월 88호
‘한국전쟁’ ‘6.25 동란’ ‘6.25 사변’ 등으로 불리는 1950년 6월 25일 한국현대사의 비극이 올해로 39주년을 맞는다.
최근에 와서 6.25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됨에 따라 일부에서는 이를 민족해방전쟁 이라고 규정짓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전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625에 대한 인식은 다음에 인용한 어느 불교 잡지에 실린 글의 수준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 공산 괴뢰도당이 새벽의 적막을 깨뜨리고 38선 전선에서 불의의 남침을 개시한지 30주년이 되는 원한이 서린 6월 25일이 또 돌아왔다. 조국을 배반한 괴뢰군들의 불법남침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시민들은 괴뢰의 학정에서 신음하길 만 석달, 그때 그날에 행했던 괴뢰의 만행이 다시금 우리들의 가슴속을 치떨리게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식을 지난 삼십륙년 동안 지녀 오면서 북한을 ‘조국의 원수’ ‘괴뢰도당’ ‘살인마’ ‘빨갱이집단’으로 저주하고 그날의 원수를갚기 위해 적의 무리를 쫓고 또 쫓아 마지막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나라 이겨레를 빛내자고 노래해 왔다.
그러나 사실질상 북한은 마지막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야 할 원수가 아닌 더불어 같이 이나라 이겨례를 빚내야 할 한민족이며, 우리가 해마다 6.25만 되면 치떨어야 할 대상이 아닌 한핏줄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논쟁에서 벗어나 6.25 왜 시작되었으며 그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대다수 남북한 민중들이 겪은 고통을 살펴보는 일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6.25가 남침이면 정당하고 북침이면 부당한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근의 일부 학자들은 6.25의 근본성격 규명을 호도하기 위해 남침과 북침 에 대한 논쟁을 유도하는듯하다.
6.25로 인해 남북한 민중들은 역사상 지금까지 알려진 전쟁 가운데 가장 심하고 오래 지속된 폭격하에서 삼년 동안 지내야 했으며, 특히 유엔군측이 제공권을 장악한 가운데 전쟁을 치룬 북한의 경우에는 모든 산업시설과 건축물이 철저히 파괴되어 수많은 난민들이 절망감과 가난, 질병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삼백만 명 이상에 달하고 있으며, 이의 대부분이 민간인으로서 한반도에서 끔찍한 살육전을 겪지 않은 가정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6.25에 의한 이러한 민중의 고통은 남북한 민중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스탈린의 침략적 제국주의의 일환 중소음모설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설 등이 그것이며, 일부 수정주의자들은 국내 정치세력 기반이 약화된 이승만 정권의 한 북침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앞으로 관련 자료들이 공개됨에 따라 그 진위가 밝혀지겠지만 이와 더불어 6.25가 우리 불교계에 끼친 영향도 재조명되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 앞에서도 인용했듯이 불교계 역시 6.25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무리없이 답습하여 왔다 그러나 사실 6.25는 불교계가 현재와 같은 파행적 구조를 갖게 된 계기를 마련하였으니, 그 하나는 농지개혁이요, 다른 하나는 무차별 폭격에 의한 사찰의 파괴이다. 특히 1951년 전선이 교착된 이후 북한의 사찰은 무차별 폭격에 의해, 남한의 사찰은 공비 본거지 토벌에 의해 거의 전국적으로 파괴되었다.
6.25초기 반도를 거의 석권했던 북한군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9.8수복으로 배후를 찔려 전선에 투입되었던 다수의 병력이 퇴로가 끊긴 채 협공을 당함으로서 산속에 잠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50년 12월 중공군의 참전으로유엔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들 북한잔류병들은 당시 지하로 들어가 있던 남로당 현지세력을 규합, 본격적인 후방게릴라전을 펼쳤다. 특히 6.25 초기 진주, 마산, 창령 방면에 진주하였던 북한군 제2사단, 제6사단 등 잔류 부대들은 험준한 지리산 일대 산악지대에 포진, 약사만 명의 병력으로노령산맥의 줄기를 타고 순창, 정읍, 남원, 구례 등 호남 일대와 거창, 산청, 함양, 합천 등에 출몰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 위치한 해인사와 화엄사를 비롯하여 증심사 태안사 보림사 등의 사찰은 북한군이 자주 출몰한다고 하여 토벌대상이 되었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증파된 군대 중의 하나인 11사단은 작전명령을 시달하면서 ∙■작전 지역 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이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는 소각하라고 하였다.
이 명령이 바로 유명한 거창양민학살 사건을 낳게 한 근거가 되었다. 한편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을 전부 소각하라는 명령에 의해 소설되거나 폭격을 당한 사찰은 현재 확인된 것만 다음과 같다. (공비에 의한것도 일부 있다.)∙■광주 증심사-대부분 소실 ∙■곡성 태안사-대웅전 전소 ∙■구례 연곡사-피아골 전투로 전소 ∙■승주 송광사-여순사건, 6.25로 일부 소실, 1951년 공비에 의해 소실되기도 함 ∙■승주 선암사-65동이 20동으로 ∙■화순 운주사-대웅전 전소 ∙■장흥보림사-10개월 이상공비의 아지트로 사용되다가 그들이 퇴각하면서 20여 동이 전소됨 ∙■영암 도갑사-대웅전 전소 ∙■나주 불회사-전각 전소 ■장성 백양사-쌍계루,운문암, 청계루 등 전소 ∙■하동 칠불사-여순때 아자방,운상원 소실 ∙■산청 대원사-여순 때 소실 ∙■거창 송계사-일부 소실 (전남 경남만 조사)
이외에도 대, 소암자가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하여 소각되거나 퇴각하는 공비들이 거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방화를 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이것은 51년 이후 교전지가 된 현 휴전선 일대 사찰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다.
최근에 민통선 출입 통제가 해제되면서 복원되기 시작한 건봉사도 해방 전에만 해도 766간의 건물이 있었으나 폭격으로 인해 전부 소실되고 불이문만 남았다고 한다.
625로 인한 이같온 사찰의 파괴는 다른 아시아 국가나 서양에서 자기의 전통문화재를 전국민적으로 보호해온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비록 문화재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사찰 건조물의 파괴는 그것이 다시 복원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것이 단순환 접촉물이 아닌 신앙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6.25가 우리 불교계에 미친 돌이킬 수 없는 폐해는 당시의 전시하에 정치적, 경제적 파행구조가 그대로 불교계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농지개혁’이다.
‘농지개혁’은 숱한 우여곡절 끝에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어 시행단계에 들어섰으나 정부와 국회간의 알력으로 그 시행이 계속 지연되다 l950년 3월 지주계급 출신이 많은 국회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보상액을 상향조정하는 일부조항의 개정을 거친 다음에 동법 시행령 및 시행 세칙이 공포되어 비로소 실시 단계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 법에 의해 농민들에게 분배예정 통지서를 발급하는 일이 거의 끝나갈 시기에 6.25가 발발하였으나, 정부는 이에 따른 서류의 분실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에 따라 전시중임에도 농지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것은 첫째,북한군이 점령지역에서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했던 것을 경험한 민심을 실망시킬 수가 없고, 둘째, 농지의 상환을 현물로 하여 군량미를 조달해야 한다는 점, 세째, 이것이 전시 인플레를 억제할 수 있으며 재정건전화를 이룰 수 있다는 점, 넷째, 귀속재단불하에 지가증권을 유효하게 활용하기 위한 점 등이다.
이러한 농지개혁은 당시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사찰에도 예외일 수가 없다. 사찰소유의 농지 역시 6.25를 통해 많은서류와 지가 증권이 분실되는 등의 혼란을 틈타 서류를 가로챈 일부 승려들이 헐값에 팔아넘겨 상당수의 불교 재산이 망실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사찰농지는 ‘임시 토지 수득세’에 의해 현물납부가 아닌 금납로 결정되었지만 과다한 세금과 혼란기에 이를 관리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망실재산은 더욱 늘어만 갔다.
더욱이 전시하의 정부에서는 생산업을 장려했지만 기업인들은 정국의 불안을 우려하여 이를 외면 고소비업을 선호했으며, 이갈은 풍조는 당시 막대한 농지를 소유한 불교에도 영향을 미쳐서, 농지를 정리한 일부 승려들은 경험도 없는 소비산업에 이를 투자하여 재산을 날려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농민들 역시 유상으로 토지를 분배받았으나, 정부가 전시임을 내세워 수확의 삼할이상을 현물로 납부할 것을 강요하였고, 더구나 51년과 52년에는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어 다시금 토지를 되돌려 파는 일이 허다하였다. 결국 토지의 소유는 일제하와 마찬가지로 다시 지주에게로 돌아가고 농민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농정의 실패 민심이 이반하자 영구집권을 위해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으며, 이로 인한 민심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당시 대토지를 소유한 대처측의 사찰과 비구측을 정면 충돌시키는 방안을 강구해 냈으니 이것이 1954년 5월 13일 이승만의 불교정화유시였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정권유시로 인해 불교계는 6.25 후 그나마 일부 남아 있던 사찰재산을 분규 비용으로 탕진하였으며 불교계의 전통풍속도 승가의 전통에 따르는 것이 아닌 소송과 폭력 혹은 정권과 밀착하여 해결하려는 작태가 온존하게 된 것이다.
625를 흔히 양쪽이 다 패배한 전쟁이라고 한다. 6.25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폐허와 반공이데올로기뿐이라고도 한다. 이런 6.25가 우리 불교계에 남긴 것은 앞서 보았듯이 사찰파괴, 재산망실이었고, 이보다 더 큰 것은 종단 구조를 정치권에 밀착시켜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불교계가 안고 있는 수많은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6.25에 대한 재조명과 아울러 당시 불교계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며, 54년 이승만의 정화유시 이전에 50년에서 53년까지의 불교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이 글을 마친다.
■1950년 6월-북한군 서울 점령 김해진(불교혁신동맹) 충무로에 총무원 설치 ■9월-서울 수복 ■1951년 1월-이종욱스님 총무원장 취임.불국사에서 대처비구회의. 송만암스님 독신승에게 사암을 맡기자고 통도사 종회에서 주장. ■불국사 회의에서는 동화사 내원사 직지사 보문사 신륵사 등 l8개 사찰을 비구에게 줄 것을 결의했으나 해당 사찰 거부로 무산 -방한암스님 2대 교정에 추대.총무원 부산에 피난 ■2월 14일-방한암스님 입적 ■1952년-토지개혁 완료 ■9월25일-세계불교도대회 일본에서 개최. 이종욱, 장용서스님 대표로참석 ■1953년 2월--동국대학교승격 ■5월-전주지 회의에 금오스님 18개 사찰을 비구에게 넘겨 줄 것을 부탁. 이백 명의 비구가 제1차 수좌대회개최 정화방안 검토 ■1954년 5월 21일-이승만정화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