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몸말
1. 미 군정의 지배 구도와 종교 정책
해방어 되자 조선의 독립을 헌신적으로 이끌어.왔던 민족지도자들은 「건국준비위원회」를결성하였으며, 곧이어 남북을 망라한 전국의 단체와 직업을 대표하는 천여 명의 대표자가 참석한 가운데 9월 6일 서울에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좌우합작의 민족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는 해방정국 있어 최초로 민족적 염원이 결집된 국가 권력체였다. 그러나 남한에 진주한 미 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그 해 10월 10일 삼십팔도선 이남의 한국에서의 유일한 정부는 미 군사 정부임을 발표하면서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세운 정부를 부정하였다.
이렇게 민족의 의시에 반하여 남한 내에 들어선 미 군정은 자신의 통치를 지탱해 줄 한국 내의 지지 세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의 조건은 한국 민중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기보다는 미국인과 사고를 같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항일 독립투사가 아니라 영어를 할 줄 알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 때 선교사들게 영어를 배웠거나 미국 유학을 다녀온 친일 지주, 총독부, 고위 관료 출신의 기독교도들 이었다、 그리하여 미군 정권은 이들을 주로 정부의 관리직, 특히 외교직에 기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친미 기독교인들은 현대 한국의 상류사회를 독점하게 된 것이다.
이점은 미 군사정권이 남한통치의 자문을 얻기 위해 행정고문으로 임명한 인사들 배경을 보아도 잘 드러나는데, 미 군정 행정고문 열한병 가운데 여섯 명은 기독교도이며, 여기에는 친일 분자인 김성수, 송진우 등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해방 직후에 신도가 사십만 명 남짓했던 기독교의 크리스마스가 국경일로 제정된 데서도 미 군사 정권의 기독교적 편향은 잘 드러난다. (당시 사백이십오만 명의 신도를 갖고 있던 불교의 석가탄신일은 법정 투쟁 끝에 1975년에야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전통 종교인 한국 불교의 유산은 오히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부터 많이 훼손당하였다. 1950년 2월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 수정안은 곧이은 육이오 전쟁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회수 농지의 대금으로 받은 유가증권이 전쟁 인플레로 인해 휴지로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농지 개혁의 대상이었던 많은 사찰 토지가 없어져 버려서 당시 불교 재산의 반 가량이 유실됐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놓고 볼 때 일천육백 년 동안 우리 민족과 동고동락해 온 한국 불교가 갖는 민족적인 이해 관계와 요구가 결집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불교적 민족주의는 이차 세계대전 이후제3세계 신식민지 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한국을 영구히 분단시켜 지배하려는 미군 정권에게 있어서 상당한 부담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미군 정권하 한국불교의 혁신 자주화 운동
그렇다면 이러한 민족종교 말살 정책의 구도를 꺾어 버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계승하기 위한 8.15 직후의 불교의 과제는 무엇이었던가
해방과 함께 불교계는 식민불교, 예속불교에서 해방불교, 자주불교를 건설해야 하는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책무를 다하기 위한 우선적인 과제는 일제의 잔영을 뒤집어쓴 식민지 예속불교를 일소하고 민족적 자주불교를 건설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반민족적 매불 승려에 대한 숙정과 식민도구(제도 및 법률)의 철폐, 교단제도의 혁신과 민주적 자주 종단의 건설, 조국의 광복사업에의 동참 등이 요구되고 있었다. 또한 적산 사원등 일체의 재산을 통합하여 불교의 자주적 발전을 위한 불적 기초로 활용하거나 민족경제에 회향하는 방안 등을 강구할 것이 요청되었다.
식민지 유제 청산및 자주적 불교 건설과 병행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민족종교로서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자각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식민지 하에서 길들여진 굴종적 노예사상을 혁파하고 불교사장의 합리적 핵심인 자주 의식으로 무장하는 것이었으며 오랫동안 망각해온불교의 민족사적 지위와 역할을 자각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자각은 불교인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
특히 식민지 시대에 대부분의 승려들이 자신의 민족사적 역할을 방기하거나, 심지어는 애불애종의 소신으로 친일적 행각을 자행했음을 볼 때, 민족종교로서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수 있게 한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신도는 재경 승려 서른 다섯 명이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서 회합하여 불교혁신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종무 일체를 접수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동 위원회는 9월 22일 남한 대의원 예순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국승려 대회를 열고 ①일제 때 제정된 사찰령 및 태고사법, 31본∙말사법을 폐지하고 ②독자적인 조선 불교 교헌을 제정키로 결의하였다. 45년 11월 서학원에서 신예 청년 승려들에 의해 결성된 「혁명불교도동맹」을 비롯하여 제 혁신단체는「불교혁신총연맹」으로통합, 조직하고①사찰령에 의해 임명된 주지의 전횡을 없애고 ②불교를 대중화하며 ③부패한 교단을 혁신하고 ④승려는 사찰 재산에 관심을 두지 말고 정진할 것을 주장하였다. |
이리하여 1947년 4월 혁신연맹은 「전국 불교단체총연회」를 소집하고 사찰령 폐지, 교단 재건 정책을 논의하고 「전국 불교도 대회」를 개최하였다. 동 대회에서는 민중불교 실천을 위주로 한 제 개혁안을 중앙교무회에 제출하였으나 거부 당하자 중앙측과의 타협을 단념하였으며, 불합리한 중앙기구 전체를 부인하는 한편, 5월 13일 새로운 통수 기관인 「조선불교총본원」과 그 협력 기관으로 「조선불교도연맹」을 결성하여 전국 승려 및 신도를 단일조직화하였다. 그러나 47년 11월 미군정의 탄압에 의해 「전국불교총연맹」의 활동이 사실상 금지되면서 급속히 힘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당시 우리 민족에게 부과된 가장 큰과제인 일제 잔존 세력의 제거와 민족 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남북한의 불교 세력은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떠나 정치 운동에 광범하게 합류했다. 남한에서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조선불교도총연맹」과 「불교청년당」이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북한에서는 46년 7월 결성된 「북조선민주주의통일전선」 결성에 「북조선불교총연맹」이 참가하여 활동했다. 또한 제2차 미소공위의 결렬과 한국 문제의 유엔 상정으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실시되자 북한에서 「북조선불교연합회」 등 15개 단체, 남한에서 「조선불교도연맹」「불교청년회」 등41개 단체가 48년 4월 19일부터 진행된 남북 연석 회의에 참가하여 단독 선거와 단정 수립 반대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48년 5월 10일 좌익 정당과 김구, 김규식 등 민족 지도자들이 선거를 거부한 가운데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마침내 8월 1일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미군정은 종식되었다.
이에 따라 해방 정국의 격변기 속에서 민족사적 역할과 불교 혁신의 과제를 수행하고자 했던 불교 혁신 세력 또한 약화되거나 소멸되었다. 이후 불교 내 보수 세력은 자체 정화조차도 이루어내지 못한 채 거듭되는 분규와 정부 권력에의 예속, 그리고 이를 근원으로 하여 파생되는 봉건적 제 문제를 재생산하고 있다.
II 맺음말
불교 혁신 세력이 불교 내적인 과제를 정화하여 식민지적 잔재를 일소하고 민족 종교로서 대중화시키고자 했던 노력들은 5∙10 단독 선거, 8∙15 한국정부 수립과 더불어 반통일 반민족 세력의 폭압, 주요 지도자의 월북과 내부 분열로 좌절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민족 모순은 극단적으로 첨예화 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거의 몰락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불교 혁신 세력도 소멸되어 버렸다.
이는 한민족이 서로 갈라져 적대시하고 전쟁 위협이 감도는 현실 속에서는, 불교의 자주화를 위한 노력과 민족적인 고(苦)를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이 불순한 망상으로 매도되며, 본질적인 개혁을 저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현재적 과제(8∙15 이후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는 불교 자주화, 민주화)를 구조적으로, 또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족적으로 부과된 지위와 역할을 올바로 인식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바로 인간 존엄을 설파하신 부처님의 평화 사상의 뜻을 모아 전쟁 공포가 없는 조국, 남의 나라에게 간섭올 받지 않는 조국을 건설하는 데 불교도가 앞장서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