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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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여연
1989년 06월 88호
이 땅의 오월은 언제쯤 그 풋풋하고 싱그러운 평화를 회복할 수 있을까? 저 산
과 들에 마구 피어나 불어오는 미풍에도 번져나오는 아카시아 향기나 찔레꽃 향
기 같이 이 땅의 오월은 언제쯤 저 향기,저 빛깔 속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어린이 날이 와도 어버이 날이 와도 부처님 오신날이 와도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저 푸른 들녘을 바라보는사람들. 그 시린 눈망울을 언제쯤 지울 수가
있을까?
그래도,5.18 금남로에 넘치는 인파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몇년씩이나 땅에 묻었
던 뜨거운 노래를 목청껏 부르는 광주시민들을 보면서, 그리고 언제나 엄하고도
자상하며 의젓한 우리네 아버지 같은 무등산을 보면서, 물결치는 역사의 굽이에
서 부활하고 있는 1980년대의 너 광주여.
회복해야 할 명예 앞에서, 저 도도한 민주정신 앞에서 끝까지 의젓해야 하려라.
언제나 영광은 희생의 나무에서만 피는꽃, 그리고 피와 함께 자라나는 민주의
나무여, 그 잎사귀마다 오월의 광주를 아롱지게 새기자꾸나.
한때 저들은 우리들 가슴에 총과 칼로 적을 무찌르듯이 찔렀지만 그 피는 이제
민주의 꽃이 되어 이 역사 끝까지 우리들 가슴에 피어날 것이니 이제 우리는 여유
와 슬기로써 역사의 매듭을 풀어가야 하리.
마치 한이 담긴 살풀이 춤에도 우아한 춤사위가 있듯이, 슬픈 진혼곡에도 아름
다운 가락이 있듯이, 그 춤사위나 아름다운 가락이 강물이 되어 저 빛고을에 굽
이치게 하자.
우린 본시 정치권력보다는 예술을 사랑하고, 칼을 쓰기보다는 육자배기 노래를 부르고,
흉악한 욕을 하기보다는 판소리의 해학을 즐겨한 사람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고 있는 백제의 부처님들과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백제기와의 그 손끝에서 풀려나오는 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늘 삶은 고단했지만 노래를 부를 줄 안사람들, 이 땅의 시가(詩歌) 문학의 대가(大家) 송강도 고산도 이 땅에서 노래했으며 달 높은 밤이면 발자욱마다 노래가 쌓였던 백제의 아낙들.
이제 오월의 카렌다를 찢어내면 초여름의 벌판이 우리 시야에 다가온다. 장미며 시원한 포플라며 창포꽃도… 그런 현란한 색채 앞에서 우리의 삶의 빛깔은 너무나 초라하구나. 소외받은 민초들의 가슴처럼 차라리 들창을 닫으리라. 채광창마저 내리고 수도승처럼 침묵해야 하리라. 그리고 침잠하고 있는 오월의 함성과 노래가 우리들 가슴에 한 자루 춧불이 되어 타고 있음을 보아야 하리라.
그러므로 오월은 카렌다와 함께 사라진 시간이 아니다. 도도한 강물이 되어,우리들 내부에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역사의 골짜기로 흘러가리라.
아직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사십년 동안이나 같은 하늘, 같은 땅위에 철조망을 치고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맞대어 감시와 반목의 눈초리로 굳어진 저 산하(山河).
무엇이 우리를 총 들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들의 살을 베고 피를 갈라 놓았는가? 이념과 사상이 무엇이길래 천륜을 저버리게 하는가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삼십년이나 국경분쟁으로 반목했던 소련과 중공이 손을 맞잡는데,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한민족이면서 왜 손잡지 못하는가?
피가 굳기 전에 통일에 대한 소망이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분수처럼 희망이 용솟음치게 해야 하겠다. 이제 저 푸른 숲에서 뻐꾸기가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서 못다한 말로 울어 주리, 역사를 지키는 파수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