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피리쟁이의 꿈 - 꼬마요정 아사달의 세상구경(9)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창작동화 - 곽재구 1993년 07월 137호
단오가 지난 첫 번째 보름날 밤입니다. 쪽물을 드리운 것 같은 달빛이 수북수북 세상 곳곳에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한 사내가 황톳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쌓인지 꽤 오래인 달빛들이 사내의 발끝에 출렁출렁 물소리를 낼 것 같은 그런 길입니다. 사내는 걸으면서 가볍게 심호흡을 한 번 했습니다. 두 팔을 양쪽으로 펼치며 ‘참 좋은 향기로군’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사내의 시선은 황톳길의 언덕받이를 향해 있었습니다. 사내의 걸음은 조금 바빠진 듯 보였습니다. 두 팔을 휘적휘적 저을 때마다 흰 옷자락이 펄럭였습니다. 이윽고 사내는 언덕받이에 이르렀습니다. 사내의 눈에 넓게 펼쳐진 바다가 들어왔습니다.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의 포말에 사내는 한동안 숨을 죽여야 했습니다. 구리거울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달빛은 빛났습니다.
사내는 등에 맸던 바랑을 풀어 내렸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바랑을 풀어헤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 바리대 하나, 수저 한벌, 그리고 헝겊으로 둘둘 말아싼, 애기 팔뚝 굵기의 한 자쯤 되는 어떤 물건. 바랑속의 풍경은 모두 그것뿐이었습니다.
길섶에 주저앉은 시내는 헝겊에 둘둘만 물건을 꺼내어 달빚 속에서 주섬주섬 풀기 시작했습니다. 사내가 너댓 바퀴쯤 헝겊을 풀었을 때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작은 피리였습니다.
사내는 바다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달빛 속에서 바로 달빛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 고갯마루 길에서 바다가 펼쳐진 해변까지는 십리 길은 족히 될 터였습니다.
사내는 피리를 입술에 가만히 가져다 붙였습니다. 그 자세로 사내는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사내의 모습을 달빛이 환하게 비춰 주었습니다.
사내는 털복숭이였습니다. 구레나룻이며 수염은 흰빛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이마며 볼에는 깊은 세월의 골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사내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정해진 곡조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사내의 마음 속에 빚어진 어떤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싶은 가락이었습니다. 가락들은 수북수북 떨어지는 달빛을 타고 금새 십리 밖 바다까지 밀려가는 듯 싶었습니다.
한 곡조를 끝낸 사내는 꽤 오래 입술에 피리를 댄 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사내의 눈은 가늘게 감겨 있었습니다. 사내의 옷섶이며 머리컬에 떨어진 달빛들이 더욱 환하게 빛났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방금 연주한 그 가락의 이름이 뭐예요?”
가늘고 섬세한 한 목소리가 사내의 귀전에 닿았습니다. 사내는 서서히 피리를 입술에서 떼고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내는 눈을 한 번 껌벅이고 다시 바다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제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방금 연주한 곡의 이름을 물었잖아요?”
소리는 아까보다 더 또렷하게 사내의 귀를 울렸습니다. 사내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렇지만 환히 비추는 달빛 속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 만한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구니? 난 아직 눈이 어둡지는 않아. 내 앞에 보이는 세상은 다 볼 수 있지. 그래, 어떻게 생각하면 스무 살 적보다도 지금이 훨씬 더 세상이 잘 보인단다. 그런데도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누구니? 나에게 말을 건 녀석이...”
사내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사내의 눈 앞에는 제법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풀밭에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나리꽃들이 주황색의 작은 꽃우산을 펼쳐들고 있었습니다.
사내는 가볍게 심호홉을 했습니다. 공기를 깊숙히 빨아들인 사내는 가벼운 한숨소리와 함께 그 공기를 내뱉으며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래. 이제 알았구나. 난 또 누구라고.”
그렇게 혼자 중얼거린 사내는 다시 풀밭에 주저앉았습니다. 사내가 앉은 자리는 처음 자리보다 두 길쯤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나리꽃이 꽃을 피워 내고있었습니다.
사내는 풀밭 위에 엎드렸습니다. 팔 하나로 턱을 괴고는 남은 손의 집게 손가락으로 바로 눈 앞에 피어난 나리꽃의 꽃잎을 가볍게 퉁겼습니다.
“바로 너지. 틀림없어. 언덕을 올라오기 전에 네 녀석의 냄새를 맡았었지. 고갯마루에 올라와 잠시 달빛에 넋을 놓느라 잊었는데, 어때 이제 말을 하렴. 그래, 내 말이 맞지?”
사내는 엎드린 채로 나리꽃을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물었던 것은 방금 그 곡의 이름이었어요.”
나리꽃이 분명하고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맞아. 내가 방금 부른 가락은 어떤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란다. 굳이 말한다면 시나위 정도라고 해 둘까.”
“시나위요? 무슨 뜻이죠?”
“이를 테면 즉흥연주를 가리키는 말이지. 달빛에 취한 세상 풍경을 내가 내 마음대로 노래한 것이란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와 비슷한 피리소리를 꼭 들은 것만 같았어요.”
“그래? 그게 정말이니? 한번 기억을 더듬어봐. 언제쯤이었지?”
“모르겠어요. 들은 것도 같고, 듣지 않은 것도 같고... 그저 그래요.”
“그래, 하긴 그런 걸 다 기억해서 무엇에 쓰겠니. 세상사 꽃 피고 지는 일이 다 서럽고 아름답지 않은 일 없는데....... 그건 그렇고 참, 우리 아직 인사를 나누지 않았구나. 난 피리쟁이야. 다르게 불린 이름이 없어. 너를 만나게 돼서 반가워.”
“내 이름은 나리꽃이에요. 다른 이름은 나 역시 가져본 적이 없어요. 하긴, 나리꽃이란 이름도 거의 잊고 살았어요. 누가 이 깊은 바닷가 살골길까지 들어와 내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만나게 되서 저 역시 반가워요.”
“내 기억이 맞을는지 모르겠다만 지금부터 꼭 삼십년 전, 그러니까 내가 서른을 갓 넘겼을 무렵 이 고개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달빛이 밝은 밤이었지. 그래 단오가 지나고 나서 처음 맞는 보름밤이었단다. 그때 난 이 고갯마루를 넘고 있었지. 달빛이 너무 고와 걷는 채로 피리 한 가락을 불었단다. 그런데 누가 뒤에서 나를 부르더구나. 참 맑고 향기로운 목소리였지. ‘아저씨 방금 부른 그 곡조가 뭐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바로 너와 똑같은 나리꽃이었단다. 그래 잘 하면 너의 엄마나 아빠, 아니면 할아버지나 할머니쯤 되었는지도 모르겠구나.”
“피리를 불고 지나가는 아저씨를 불어 세운 나리꽃이 있었다구요?”
“그렇단다 바로 오늘밤 네가 나를 불러 세운 것과 꼭 같았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디선가 꼭 아저씨 피리 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라고 부른 것보다는 아저씨라고 부른 것이 훨씬 듣기 좋구나. 그 나리꽃이 내게 말했어.”
“뭐라 이야기 했는데요?”
“참 재미있더구나.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은 거야. 난 그렇다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이 나리꽃이 금방 풀이 죽었단다.”
“풀이 죽었다구요? 어떻게 아저씨가 그걸 알 수가 있죠? 아저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우리 같은 나리꽃이 풀 죽을 일이 어디 있어요?”
“내 생각도 바로 그렇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다. 그 나리꽃이 내게 묻더구나. 나이가 몇 살이며, 이름이 뭐며, 코나 눈이 예쁜지 어떤지 까지를 시시콜콜 다 따지는 거야. 한 말했지 방년 이십 세에, 이름이 꽃분이고, 눈, 코, 입, 이마 할 것 없이 다 예쁘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 나리꽃이 내게 뭐라 말했는지 아니?”
나리꽃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사내의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보기 싫어! 빨리 꺼져 버려! 이 바람둥이 같으니라구.” 글쎄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니. 그 말을 듣고 난 너무 기분이 좋아졌단다. 왜냐구? 내가 아는 친구 중에 아주 유명한 바람둥이가 있었지. 난 그 친구가 너무 부러웠단다. 사실, 그 친구는 바람둥이도 아니었지. 세상의 여자들이 그를 바람둥이로 만든 거야. 그 친구는 소리쟁이였는데 육자배기나 흥타령 한 곡조만 뽑으면 동네 아가씨들이 줄레줄레 붙었어. 그때 아가씨들 얼굴을 보면 모두 복사꽃이나 살구꽃이 피었지. 다들 이 소리쟁이를 좋아하게 된 거야. 그러니 바람둥이 소리를 듣지 않겠니?
같은 친구인데도 난 인기가 없었지. 못생긴 데다 털보이고 더더욱 소리는 소리꾼 친구를 따라가기 힘들었어. 그러다 보니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바로 바람둥이 그 친구였지.“
“바람둥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신 거로군요.”
“그렇지. 난 그런 말을 내가 얻어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 그런데 나리꽃으로부터 그 소리를 들은 거야. 난 무척 감동했지. 그래서 그 나리꽃에게 뽀뽀를 했어. 사실을 고백하자면 그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한 뽀뽀였단다.”
피리쟁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리꽃은 자신의 얼굴이 조금 붉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꼭 같은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 피리쟁이가 언덕받이에서 시나위 한 가락을 뽑을 때 자신도 또한 피리쟁이를 향해 끌려가는 자신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난 말했지. 이게 세상에 태어나 처음해보는 뽀뽀라고 말이야. 엄마 아빠도 없었냐고 묻더구나. 난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면 꽃분이는 또 어떻게 된 거냐고 묻더구나. 그건 지어낸 말이라고 얘기했지.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내 선생님이셨어 내게 피리를 처음 가르쳐 준 선생님 말이야.”
피리쟁이의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끊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등 위에 떨어지는 달빛을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이번에 나리꽃이 내게 뽀뽀를 하더구나. 그러고는 말했어. ‘내게 피리를 가르쳐 줘요’ 하고 말이야.
난 선선히 응했어. 물론 , 처음엔 피리란 사람만 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 그렇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단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 있니. 바람소리, 파도소리, 강물 소리, 사립문 소리, 섬돌 위에 신발 떨어지는 소리… 참 많은 소리들이 있지. 피리 소리도 결국은 그 많은 소리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 지나가는 바람을 자신의 꽃잎 끝에 말아 나리꽃은 피리 구명을 향해 불어 넣었지. 신기하게도 참 은은한 소리가 나오더구나. 그 소리에는 꽃향기조차 베어 있었어.
난, 훌륭하다고 말해 주었지. 그렇게 섬세한 소리는 우리 선생님으로부터도 듣지 못했던 것 같았어. 연주는 꽤 오래 지속되었어.”
피리쟁이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나리꽃의 꽃잎 하나가 바랑 위에 올려 놓은 피리 곁으로 가만히 내려가는 것을 피리쟁이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떠나갈 시간이 되었지. 난 사실 그날 밤 일이 있었단다. 난 십 년 동안 공부를 하고 돌아오던 중이었지. 피리공부였어. 내가 ‘안녕’하고 떠날 때였어. 나리꽃이 나를 불러 세우더구나.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단다. 그 말은... ‘사랑해요’... 하는 것이었지.”
피리쟁이의 말은 여기서 끊겼습니다. 그는 삼십 년 전 이 고갯길에서 자신에게 피리를 배웠던 나리꽃이 불렸던 것과 꼭 같은 피리 가락이 지금 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은은하고 향기조차 베어 있는 가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