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족암은 옛 문헌에 해인사의 동쪽 골짜기에 있는 암자로 기록되어 있다. 가파른 언덕 뒤에 제비집처럼 다소 초라하고 다소곳한 그래서 암자라기보다는 토굴과도 같았던 암자.
칠십년대 중반 내가 처음 찾아갔던 지족암은 그날 따라 헌 고무신짝 하나 댓돌위에 보이지 않는 빈 암자였다. 그냥 열려 있는 부엌을 들여다보니 벽에 그을음만 잔뜩 끼어 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러나 늦은 봄 햇살 아래 토담 위로 부처 손 같은 고산식물이 잔뜩 돋아 있어 오래된 절맛을 느낄 수 있었고, 보기좋게 피어나던 신록이 계곡을 망연히 내려다보다 큰절로 돌아왔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그때의 흔적은 지족암 어느 구석에도 없다. 비록 가난하고 초라하기는 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정답고 애틋한 빛바랜 옛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묵은 감정들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다만 그 벼랑만 옛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지족암의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희랑조사의 토굴이었다고도 하고 기도처였다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므로 신라 말 고려 초일 가능성이 있으나 옛 기록은 알 수 없고 조선 시대 이후의 기록이 조금 남아 있다.
1796년에 관수 官守 스님이 옛터에 가람을 중건했으며 1893년에 환운 幻雲 대사가 중창했고, 1913년 여름 큰물이 들어 큰 방채가 완전히 유실된 것을 재건하였다.
1940년에는 송해 松海 스님이, 1958년에는 영월 影月 스님이, 1963년에는 정림 正林 스님이 계셨으며, 1975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총림의 율주 律主이신 일타 큰 스님이 주석하시고 계신다.
일타화상이 태백산의 정진을 끝내고 지족암에 오자마자 도량을 재정비하고 1985년에는 산신각이 있던 자리에 법당을 이룩하고 마당에는 다정 茶亭을 짓고 방사를 넓혀 기거하더니 최에는 계곡쪽에 자신의 공부처소인 선당 禪堂을 세웠다.
근자에는 바깥 출입을 줄이고 유유자적 은일한 모습으로 수행에만 전념하시는데, 등나무 꽃이 흐드러지는 초여름 정자에서의 차 한잔과 온 산이 눈으로 덮힌 겨울날 스님의 거처 난향산방에서 푸른 잎의 보리수를 마주하고 마시는 차맛은 지족암만의 운치요 멋이다. 스님께서 남방으로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지고 온 보리수가 이제 제법 컸는데, 겨울에는 혹 얼까 보아서 큰 분에 올려 겨울 동안은 스님 방에서 푸른 잎을 자랑한다.
1976년 여름과 겨울 두 안거에 큰절 선원에서는 점심 시간에 졸음이 많이 오는 시간을 이용하여 큰스님을 초청하여 스님의 수행 이야기와 소참법문을 들었는데, 열여덟 살 때 외웠다는 대혜 종고선사의 서장 書狀을 아직도 첫장 첫줄부터 외워 읽어 내리는 기억력과 변재에 입이 쩍 벌어졌다.
스님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구수하고 재미있다. 그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율문 律文을 강하실 때나 재미있을 턱이 없는 잔소리 투성이의 습의 시간에도 스님이 강의만 하면 지루한 줄 모르고 들을 정도이니, 선원 수좌들도 오늘 포살을 누가 하는지에 따라서 참석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할 만큼 스님 말씀은 승가 안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러므로 천지사방에서 스님의 법문을 청해 듣기 위해 지족암에는 스님들과 신도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다. 스님은 그 많은 청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아예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깍지 않기도 하여 산문 출입을 막기도 하시지만, 그저 저도 되지 않으면 훌쩍 산중을 벗어나 긴 여행길에 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스님에게는 어떤 스님보다도 여행기록이 풍성하다. 사성지를 비롯한 불적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와 유럽, 북미와 남미, 최근 호주와 뉴질랜드를 다녀오셨고 일찍이 불적 순례를 다녀와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 스님과 신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는가 하면, 여행에서 찍어 온 그 무거운 슬라이드를 가지고 다니면서 불적을 자상하게 보여주었던 낭만적인 시절도 있었다.
몇 해 전 지족암의 연기를 묻는 나에게 스님은, 구한 말의 서예가요 선진 상공인이었던 박기돈 씨의 집안에서 지족암을 중건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고 하면서 해산거사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해산거사의 글씨는 해인사 장경각의 편액 ‘팔만대장경’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는데, 전국 사찰에 간혹 그의 글써가 보관되어 있는 명필로서 글씨로는 나의 은사 경봉노사의 스승이었다고 일러 주셨다.
나의 스승 경봉화상께서도 만년에 스님의 방에 해산거사가 쓴 만수헌萬壽軒이라는 큰 액자를 걸어 두고 계셨는데, 해산의 글씨와 경봉선사의 글씨는 비슷하여 얼핏 구별이 안될 만큼 닮았다.
1913년에 큰불이 나 큰방채가 유실된 것을 1915년에 재건한 것을 해산거사의 집안이 중건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족암의 축대로 사용한 콘크리트 구조물은 아무래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스님의 섬세한 미적 감각과 멋진 구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은 점수를 후하게 줄 수가 없다. 담쟁이 덩굴과 같은 덩굴식물을 심어 콘크리트 구조물을 가린다면 한결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족암은 한때 도솔암이라고 불렸던 적이 있다. 도솔이란 말과 지족이란 말은 한말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 나물밥 한 그릇과 누더기 한 벌 청빈을 자랑으로 살아갔던 스님들의 삶에 또 무엇이 필요했겠는가. 그 위에 차 한잔과 낙낙장송과 지천으로 널려 있는 들꽃 향기와 철 따라 우는 새소리 그것 외에.
규모도 커지고 도량이 일신되었다고는 하나 지족암은 뒷벼랑에는 부처손과 같은 고산식물이 자리하고 있어 아직도 옛 향키가 전해진다. 그 위에 스님의 묵향과 난향과 선향禪香을 풍기면서… 오가는 흰구름이 오늘도 지족암 저편 벼랑애서 잠시 쉬어 가고 아랫 계곡에는 칠월의 녹림이 한껏 푸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