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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연곡사 불교 유적 - 선사의 묘탑을 지고 비상하려는 극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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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3년 07월 137호
이태호, 황호균

목잘린 극락조의 천년을 이어온 애처로운 날개짓
글쓴이가 연곡사 鳶谷寺와 인연을 맺게된 것은 십여년전 여름이었다. 말도 많고 사연도 기구한 요즈음의 우리 세간사에 진력이 날 때면 어김없이 이곳이 그리워진다. 가신 분(선사)은 말이 없지만 아직도 퍼덕이는 목 잘린 새의 천 년을 이어온 애처로운 날개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척이나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 차갑다 못해 시리기까지 한 맑은 계곡물도 그리웁지만 무엇보다도 선사의 묘탑에 조각된 생동하는 물상들의 한 소식한 듯한 신묘한 조각 솜씨는 선의 경지 그 자체이다.
무슨 인연인지 올해 구례군에서 전남대학 박물관에 이곳의 지표 조사를 의뢰해 와 나의 자랑스런 적토마(빨간색 승용차의 애칭)을 몰고 한걸음에 내달려 도착해 보니 고즈넉하던 옛 모습은 간데 없고 새로 지은 법당과 객방만이 댕그라니 놓여 있었다. 인근 천은사의 옛 축대가 개발에 밀려 흙속에 뭍히는 그런 가슴 답답한 일도 있듯이 여기도 아픔이 있었다. 포크레인으로 종각토를 다듬다가 축대가 노출되지 않았으면 종각 불사는 순조롭게 이루어질 뻔했다. 고봉스님의 혜안으로 공사는 거기까지만 진행되었고 군 당국에 신고하여 이번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연곡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 오십사의 일번지에 속하며 피아골 입구에서 내려 산행을 하여도 좋고 한시간 간격으로 오는 직전 마을행 버스를 기다려 절 바로 앞에 다라를 수도 있다. 연곡사 주변의 볼거리들로는 천하명당으로 금환낙지 金環落地로 알려진 구만들과 유씨가의 고택 운조부를 비롯하여 그 유명한 화개장터도 지척이다. 더욱이 천은사, 화엄사, 사성암, 쌍계사, 칠불사 등 지리산 서남쪽에 자리한 산사에서 해질녘 울리는 종과 법고 소리는 잊을 수 없는 감흥을 준다.
연곡사의 역사적인 배경
절에 도착하기 전에 우선 연곡사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 현재 남아 있는 유적 모양새나 명문에 의해 통일신라 말에서부터 고려 초에 걸쳐 가장 번성한 듯하나 창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만우 정병헌옹이 일제시대인 1924년에 기록한 「지리산화엄사」의 말미에 ‘연곡사 사적’을 기술하고 있어 사찰의 변화를 살피는 데 참고가 될 뿐이다. 이 글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때 인도 스님인 연기조사가 창건 하였으며 그의 만년에 세상을 피해 살기 위한 장소로 지었다고 한다. 또 조선후기 연곡사 중창주였던 소요 태능도 그의 시에서 연기조사가 초창했다고 읊고 있다. 연기緣起(혹은 煙起)는 화엄사를 창건한 전설적인 인물로 이해되어왔다. 최근에 발견된 신라 경덕왕 때의 백지묵서화엄경白紙墨書華嚴經 2축은 연기법사가 원주한 것으로 화엄사 석탑에서 전래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렇듯 연기조사는 「화엄경」에 관한 많은 책들을 저술한 화엄종의 승려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연곡사도 처음에는 인근 화엄사의 영향권 안에서 사찰의 기틀을 마련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느때인가 화엄 도량인 화엄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참선 도량으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각선사탑비와 동부도, 북부도, 삼층 석탑 모두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선종 계통의 불교 문화가 꽃을 피운 흔적이 담겨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연곡사는 고려 중기와 조선 전기의 기록이 전무하며 조선 중종대(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연곡사가 기록되어 있어 사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뒤에 정유재란때인 선조 31년(1598)에 왜적 사백여 명이 하동과 악양을 거쳐 지리산의 쌍계, 칠불, 연곡사 등 사찰에까지 들어와 살육을 자행하고 불을 지르는 등 갖가지 만행을 자행하였다(난중잡록). 왜란으로 불타 버린 연곡사를 소요逍遙 태능太能(1562∼1649)이 중창하였다. 소요대사는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그 문하 사대파 가운데에 한 파를 이룰 만큼 유명한 승려이다. 속성은 오씨로 담양인이며 열세 실에 출가하여 부휴선사에게 경전을 배웠으며 세속을근원적으로 부정하고 오직 출가수행에 의해서만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왜란 때에는 참전하지 않고 수행자적 자세를 지켰다. 삼층석탑 아래에 자연석을 이용한 맷돌 아랫짝이 방치되어 있는데 청학淸學(1570∼1654)이 화주하여 만든 것으로 소요대사와 같은 서산
대사의 문도로서 장흥 관산인이며 보림사에서 출가하였다.
영조 21년(1745)에 왕가의 신주목神主木(位牌木)을 봉납하는 율목봉산지소票木封山之所로 선정되어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되자 비로소 지방관 향리들의 경제적 침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영조4년(1728) 소론파 이인좌가 집권 노론 세력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승려 출신인 술사術士 송하宋賀와 승려 대유{?∼1728)가 쌍계사와 연곡사를 거점으로 지리산의 산적 수천 명을 모아 이인좌의 반란에 가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지리산에서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지리산의 기구한 운명은 빨치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1895년쯤에도 연곡사는 여전히 왕가의 신주목을 봉납하는 곳이었는데, 밤나무 남용으로 망할 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 결국 절이 폐망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으로 인한 호남 의병의 항일 활동 본거지로 연곡사가 주목된다. 고광순은 1907년 8월 26일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서 본영을 설치하고 고제량, 고광수, 박찬덕, 고광훈 등과 함께 항일 활동을 전개하여 여러 차례 승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 일병의 야간 기습을 받아 패전하고 고관순은 10월 11일 연곡사 옆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연곡사도 의병 활동의 근거지로 왜병들에게 방화를 당했다.
1924년 박승봉이 연곡사 경내에 700원을 들여 심우암을 창건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된 뒤 사찰 분규와 교통 사정 때문에 재흥을 보지 못하다가 1965년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채를 겸하여 세워지게 되었다. 1983년에 종인화상이 대적광전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국보 두 점과 보물 네 점이 문화재로 지정
연곡사에는 비교적 많은 유적과 유물이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 동부도와 북부도는 국보로, 삼층석탑과 소요대사부도와 동부도비, 현각선사비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렇듯 한 사찰에 국보 두 점과 보물 네 점이 지정된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대적광전 북동쪽으로 십 미터쯤 올라가다 보면 산 기슭에 자리한 그 유명한 동부도를 만나게 된다. 자세히 보면 팔각원당을 기본 틀로 삼고 네모난 지대석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쌓은 일반형 부도로 경내에 있는 세 기의 부도 가운데에 조각 솜씨가 가장 정교하다.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충실히 따르고 있고 지붕마루 끝에는 풍탁을 걸어 두었던 구멍이 있고 그 윗부분에는 잡상 같은 것을 얹었던 흔적도 보인다. 상륜부의 앙화 위에는 네 마리 새가 사방으로 날개를 활짝 편 채로 비상하려는 역동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으나 모두 머리가 잘려 나갔다. 누가 이 새의 머리를 무엇 때문에 잘랐을까. 새는 봉황인가, 극락조(가릉빈가)인가, 아니면 혹 지상의 염원을 천상에 전하고자 비상하려는 듯한 자세로 솟대 위에 앉아있는 기러기들과 같은 의미는 아닌지... 지리산 주변 지역에 남아 있는 이 시기의 부도들-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부도(861),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868),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 부도(861-893),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부도(880), 하동 쌍계사 부도(885),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 부도(893)- 과 비교해 보면 870년 이후에 등장하는 다른 부도들이 정형에서 많이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적어도 연곡사의 동부는 양식상 870년을 넘어서지는 않을 것이다.
동부도 비는 동부도 앞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비신 조각조차 찾을 길 없고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어 묘 주인을 모르지만 아마도 연곡사 창거주의 묘탑으로 생각된다. 거북이에 날개가 달려있어 이채롭고,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있어 마치 납작하게 엎드린 듯한 모습을 연상시키며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어 전진하려는 역동적인 모습이다. 이 부도비는 동부도와 관련된 것으로 묘탑 조성은 870년대 전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뒤에 건립된 거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부도 비의 거북이는 적갈색이고 이수는 암갈색으로 돌의 재질도 다르며 거북이의 머리는 화재시 불에 깨진 것을 다시 붙였다. 동부도 비의 파손 경위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1668년에 이우가 연대순으로 엮은 첩책인 「대동금석서」에 실려 있지 않아 혹 광양 옥룡사의 도선국사비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실의 허가를 얻지 못할 백비일 가능성도 있다.
동부도에서 북쪽으로 백오십 미터쯤 올라가면 북부도를 발견할 수 있다. 동부도를 본뜨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 시기의 양식을 표현하는 데 다소 소홀하여 연대를 추정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또한 묘의 주인을 몰라서 그냥 북부도라고 하고 있으나 돌의 재질과 제작 시기가 경내에있는 현각선사의 비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현각선사 비문에 대한 고증
현각선사 탑비는 경내 서북편에 자리하며 조선총독부 발물관 소장 옛 탁본에 따르면 979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신이 없고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다. 거북이는 네 다리를 사방으로 뻗쳐 납작히 엎드린 형상으로 동부도 비와는 반대로 왼쪽 앞발을 살짝 들어 전진하려는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통일 신라 말에 조성된 선승들의 비에등장하는 정교한 거북이에 비하여 거대하고 당당한 자세인데, 이는고려개국의 새 힘을 담고 있음이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이나 옛 탁본에 따르면 비문은 학사 왕융이 지었고 주국 장신원이 썼다고 전한다. 글씨는 이 센티미터 정도이 해서로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하는 육조 시대의 사경체(사 경 체)이며 자형을 바르게 하여고박한 글씨를 나타내고 있다. 비는언제 무엇 때문에 파손되었을까. 「대동금석서 大東金石書」의 탁본 상태가 깨끗한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일 것이다. 「봉성지」에 따르면 19세기 초반에 마침내 깨뜨러지게 되었는데 이때에 남쪽 산이 삼일 동안 울었다고 한다. 깨진 원인에 대해 기술하고 있지 않아 아마도 정유재란시 화재로 인하여 일차 손상을 입은 것이 풍화에 의해 무너졌고 구한 말인 1907년 일본군에 의한 약탈과 방화시 더욱 철저한 파괴를 입었을 것이다.
흩어져 있던 거북이를 1970년에 한데 모아 붙여 오늘에 이른다. 현각선사의 탑비의 명문을 알수 있는 비편은 여섯 개로 224자이며 전액에 쓰여진 여섯 자를 포함하면 모두 230자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글씨체를 알 수 있는 네 개의 자료에서 나타나는 글씨체가 모두 예천명체인 점은 같으나 글씨의 맛은 조금씩 다르다른 점이다. 두가지의 글씨체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동부도 비의 비편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더구나 글씨 크기도 두 가지로 구별되어 이를 뒷받침한다. (구례 연곡사 지표조사 보고서)
소요대사 부도는 서북쪽에 자리하여 서부도로 불리운다. 소요대사 부도는 평면 팔각원당의 기본형이다. 이 부도 탑신석 한면에 「逍遙大師之塔/ 順治六千年庚寅」이라는 두줄의 음각명문이 종으로 쓰여있다. 소요대사는 순치 5년 (1649)에 입명하였는데 바로 그 다음해에 이부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요대사는 비가 금산사에 있으며 부도는 지리산 연곡사를 비롯하여 두륜산 대둔사, 보개산 심원사에 있다고 하나 대흥사의 명문 있는 부도에서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보개산 심원사도 철원 지역에 자리한 것으로 보이는데 확인하지 못했다. 장성 백양사에는 소요당의 부도가 있다.
삼층석탑은 연곡사 사역의 남동쪽에 있으며 기간이 삼층인 점이 주목된다. 옥개석은 전형적인 방형탑으로 각층의 기간이 여러개의 돌을 사용하여 건립되었다. 이 석탑의 삼층 옥개석은 떨어져서 주변에 뒹굴던 것을 1967년에 올려 놓았다. 당시 보수를 위하여 해체하다가 상층 기단 안 자연판 석상에서 금동여래입상 한분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팔각대좌를 갖춘 입상으로 녹이 슬었고 몸체 일부에 금도금 흔적이 발견된다. U자형으로 겹쳐지는 법의와 우수상 좌수하 형식의 수인, 상대와 하대만 갖춘 대좌의 모습에서 통일신라 금동불 양식의 잔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경직된 상호, 자세, 의습으로 보아 고려 초에 제작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탑은 기단부에 매우 치중한 반면 탑신부는 소홀한 감이 없지 않으나 하층기단부터 탑신부에 이르기까지 체감비율이 일정하다. 이와 같은 모든 부재의 치석과 각부의 구성양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건립 연대는 통일신라 시대 말에서 고려 초로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삼층석탑 상층기단 안에서 발견된 금동불의 연대가 고려 초로 내려오는 점을 중시하면 이 탑은 현각선사가 활동하던 10세기 중반쯤에 연곡사에 등장하였을 것이다.
동백나무 그늘에 서 있는 고광순 순절비는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순절한 고광순 의병장을 기리기 위해 구례 군민 일동이 합동하여 단기 4291년(1958)에 광산 김문옥이 글을 짓고 서흥 김규태가 글씨를 써서 세웠다.
현재 연곡사 경내에는 석등부재인 간주석과 연화문 하대석인 열한 개의 초석이 제 자리를 잃고 흩어져 있다.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맷돌도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데 모두 다섯 개이다. 그밖에 돌확 한 개와 근래에 만든 석등 두 개, 괘불석주 두 개도 조사되었다.

밤나무 많은 절엔 큰스님 못 산다
연곡사를 나서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인근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칠불사의 번성에 비해 쇠락한 이유가 무엇일까. 정유재란과 구한 말의 일본인에 의한 방화가 떠올려지지만 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못되는 듯하다.
“어쩌면 조선 후기에 왕가의 신주목으로 밤나무를 봉납하는 권한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남벌한 밤나무로 배를 만들어 사용하는 등 절집의 재산을 탕진하는 승려들의 부정을 기화로 호군의 고역을 참다 못한 인근 주민들이 난동을 부리자 하나 둘씩 절을 떠나 폐사가 되었다는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처럼 관리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위세가 오를 대로 오른 승려들이 섬진강을 배경으로 무분별하게 밤나무를 남벌하여 배를 많이 만들어 사용하게 되자, 급기야는 왕가에 신주목을 봉납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후한을 두려워한 나머지 절을 떠난 것이지 않을까. 소설 같은 추리이나 이도 근거가 빈약하다. 혹시 밤나무 많은골에 열녀 없다는 속설이 절집에도 적용되었단 말인가.”
연곡사에는 조선후기에 세워진 부도가 세 기밖에 없는데 이는 다른 사찰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