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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운동이 제기되는 배경과 하나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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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유정길 1993년 07월 137호
공동체란 무엇인가
공동체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동안 공동체라는 용어는 어러가지 면에서 정확성이 결여된 채 매우 비현실적이고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다. 때로 그것은 ‘지역사회개발’ ‘마을회의’ ‘두레’와 같이 어떤 특정 지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공동체를 특정한 사적 이익에 기초하여 규합한 부분공동체를 고려한 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하며, 또는 공동선을 위한 의지를 중시하여 공동체를 그런 의지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의식적 결속 아래 동거동락하는 공동 생활이 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 하나는 퇴니스처럼 이익을 기초로 하지 않고 지역이나 출생과 성장 배경에 기초한 유기적인 실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와 같이 공동체 개념은 그 다의성으로 인해 언제나 쟁점화될 소지를 안고 있으며, 이후 이 개념의 표현 방식도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공동체는 사회 생활의 특수한 의미로서 사회 조직의 이상이나 유토피아를 뜻하기도 한다. 이글은 후자쪽의 의미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공동체가 논의되는 배경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으며, 정치나 경제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자신을 구현하고자 공동체를 추구하는 역사는 꽤나 오래되었다. 불교에서는 “지금, 바로 여기에(now and here)\" 이상사회를 현실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집단적 노력을 통해 이상사회를 사회 속에 구현하려는 흐름들은 꾸준히 진척되어 왔다. 가까이는 마르크스에서 조금 더 나아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 또한 끊임없이 그러한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한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불교에서는 이미 정토 淨土 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써 왔거니와 이상사회는 정토를 만들어 가거나(찾아가거나) 에덴으로의 복귀내지는 천년왕국이 실현을 위한 종교적인 염원과는 조금 구별되는 것이다.
이상사회에 대한 논의를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당긴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그는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이상주의에 대한 신념을 굳건히 한 뒤 독일의 관념론 철학과 헤겔 변증법을 토대로 영국의 고전경제학을 줄기로 하는 완결된 공산사회의 정합된 비전을 역사 속에 제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비젼은 러시아의 혁명과 동구와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한 등 전세계의 반을 차지하는 땅덩어리에서의 변혁을 통해 과학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현실적인 힘을 갖추게 되었다. 그 이전의 다양한 시도는 엄청난 실험을 통해 확인된 과학성에 배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동구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그 과정에서 확인된 그들 사회의 내부 구조는 진보에 대한 염원을 갖고 있던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척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근 한 세기를 풍미하던 진보적인 거대한 물줄기는 부딪치는 파도의 거품처럼 산산히 난파되는 듯한 이념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편, 인류 진화의 역사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실험의 실패는 그 이전의 공상적 사고라고 비판된 공동체운동이 다시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더욱이 오늘날과 같은 산업문명의 문제와 그로 인한 지구 환경과 생태의 위기에 직면하여 거대한 국가주의로의 비젼이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조금씩 확산되면서 , 공동체운동은 더욱 대안으로서의 빛을 발하고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보라고 생각되어 왔던 생산력 주의가 실은 인류를 파괴로 이끌고 있다는 과학적 진단 때문이다. 앞으로 인류의 진보는 이러한 환경, 생태 문제, 폭력과 인간 소외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있어야 한다. 따라서 과거의 혁명이 국가의 정권 획득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근거로 하고 있지만, 국가가 변혁된다고
앞에서 열거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님이 확인되면서 환경을 염려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한 생태 위기의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환경이론가들은, 생태주의는 작은 지역을 근거로 한 지역공동체(여기서는 지방자치제의 이상적 구현을 의미하지만)에 의해서만이 에너지 문제나 기타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거대사회를 공동체가 실현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소규모의 완전사화로서 공동체가 의미있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의 사례
공동체 설계자의 생각 근본에는 인간성에 대한 낙관주의가 깔려 있다. 인간은 스스로 변화함과 더불어 지역 및 사회 환경이 바뀌면 충분히 이상사회의 인간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주의가 그들의 실천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공동체는 “하고 싶어 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이 같고, 개인 이익과 집단 이익이 같으며, 개인의 성장과 자유가 타인에 대한 책임을 수반하며, 조화와 협동과 공리 공생이 실존의 본질이라는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경쟁과 착취가 아닌 협조와 신뢰 속에서 심리적, 정신적인 안정과 진정을 추구한다. 얼마쯤은 도피적이지만 이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것이며, 실제 거대사회의 변화에 기여하려는 의지도 강하다.
야마기시가이(산안회山岸會)는 스스로 “공동체’라는 용어의 사용을 꺼린다. 공동체라는 용어가 이미 갖고 있는 공상적인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고, 공동체라는 말이 개인과 개인을 전제로 하면서 그들 간의 조화와 연대를 뜻하는 말로 쓰임으로써 실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조금 진보된 형태쯤으로 이해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공동체 사회라고 하지 않고 “일체사회”라고 부르고 있고 그렇게 불러 주길 바라고 있다.
그들은 철저한 무소유 일체를 주장하며 돈이 없는 거저의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 실제로 필자가 알고 있는 공동체와 대부분은 ‘무소유’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소유를 전제로 할 경우, 그것은 필연적으로 욕구를 창출하고 나아가 확대를 지향하면서 개인과 개인 또는 민족과 민족이라는 일정한 진영을 구분하며, 그것은 분명코 확대에 따른 충돌과 마찰 나아가 폭력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1787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발전해 온 쉐이커공동체나 하모니회, 오나이더공동체, 미국 시카고의 슈펠레 등 대부분의 공동체는 무소유를 기본 구조로 하고 있다. 실제 이 야마기시가이는 일본에만 약 33개의 실현지가 있고 한국, 타이, 스위스,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등 6개의 국외 실현지를 갖고 상당히 번창하고있는 공동체이다.
“자연 전인全人 일제관, 무소유, 공용, 무아집 옿음, 전인 행복, 절대 애愛, 깊이 연구하는 과학 생활, 무변無邊, 무중심, 무시간, 무집착, 무계급, 무종교, 무보수, 무상, 조화, 합리, 일방적으로 단정하지 않음, 자타거리 두지 않기, 사이 좋음”등의 말은 산안회에서 완전히 생활 속에 흡착되어 있다. 이 야마가시사회는 크게 야마기시시즘 세계실현시험장, 야마기시즘연찬학교, 야마기시즘 생활조정기관, 야마기시즘 생활실현지 등의 기구가 있다. 야마기시즘은 농업을 근간으로 농업 가공품, 임업, 유통, 정보, 수산 등에 걸쳐 광범한 규모의 생산 영역을 포함하고있다. 나고야 근처 도요사또 실현지의 경우 한 읍 정도의 규모를 갖고 있으며 여기서 나오는 모든 농산물은 상당히 질이 좋아서 고가로 외부에 공급되고 있다. 물론 자체에서 생산되는 물건은 “필요한 곳에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에게”라는 기치로 무료로 교환되고 있고, 실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체 생산물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야마기시 특별강습연찬회라는 일종의 교육을 통해 일체 사회의 정신을 함양하고, 연찬학교라는 노동과 교육이 함께하는 수련프로그램을 통해 공동체의 사람으로 성장해 나간다. 또한 이 연찬은 일을 하기 전과 하고 나서, 하는 중간에 언제나 실시되며, 개인과 단체 및 각부문의 일터에 맞는 테마-일종의 화두라고도 하겠다-가 있어 테마에 집중하면서 작업을 하도록 되어 있다.
특히 “애 놓음 부모 떨어짐”이라고 하여 어린이가 공동체의 어린이로 성장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실제 일본의 도요사또에는 유치부, 유년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학원이 있어 서로 사회성과 경쟁심이 없는 창조적인 어린이로 자라게 하고 있다. 실제 아이들의 표정과 말이너무도 맑고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하나의 교시만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일에서도 하루 작업 중 두 시간은 다른 작업장에서 일하고 육개월을 단위로 작업이 다시 배정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되돌아감”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계기로 삼고, 또한 새로운 일을 함으로써 창조성을 발견하도록 하며, 육개월을 단위로 자신에게 작업이 다시 배정됨으로써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일하는 의히를 불어 넣게 하는 커다란 효과를 갖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남자다움과 여자다움, 어린이다움을 강조하고그것이 자연의 이치에 가장 맞는다는 신념으로 일의 분리를 철저하게 하고 있다. 그에 대한 필자의 문제 제기에 대해 그들은 “차이는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확인시키면서 여성이 남성화 되는 것이 여성해방운동의 역편향이 아니냐는 대답이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실제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실천이 Z혁명이라고 하여 인류의 마지막 변혁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가 느낀 산안회는 어쨌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나의 상상력에 커다란 파격과 인식의 확대를 갖게 했고, 실제 그들의 삶이 내가 짧게 보았던 것과 실제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했다. 그들은 이러한 실현지를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확대시킨다는 방침으로 대단히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맑음”을 강조하고 모든 상황을 일방적으로 단정하지 않고 자타 일체를 몸소 느끼게 하며, 언제나 모든 사건을 근본까지 깊이 들어가 판단하는 (일체의 상을 버리려는 자세로) 그들의 생활은 불자인 나로서는불교의 가르침이 어쩌면 그대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동안 본인은 불교의 무소유, 무아, 무상, 연기적가르침이 관념적 당위로만다가왔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서 실제로 가능할 뿐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추구하려는 사회도 이렇게 되어야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쨌든 이 산안회의 여러성과를 함부로 하지않고 진지하게 검토하는 사람들에게 야마기시의 경험은 대단히 놓은 가치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산안회(야마기시가이)는 설립된 햇수가 짧지만은않음에도 크게 성장하지 못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 듯 보인다. 지나치게 일본적인 문화 때문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에서 원활하게 수용하기엔ㄴ 커다란 어려움이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편견으로 우리가 극복해야할 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야마기시로 볼 때 이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외국의 수 많은 공동체운동이 설험 중에 이 야마기시는 대단히 성공한 공동체가운데 하나이다. 필자가 일본과 한국의 실현지에서 느낀 것만 하더라도 이 공동체는 자체 내에 상당히 정교한 생활 원리를 풍부하게 갖고 있음을 느꼈고 이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공동체의 일반원리와 과제
공동체는 평등과 상하 우열의 격차가 없고, 특수 애정을 엄격히 금하는 곳도 많다. 어떤 곳에서는 아이들은 한 부모의 아이가 아닌 공동체의 아이로 성장하기 위해 공동체가 마련한 양육 체계에 의해 양육 책임자에 의해 길러지기도한다. 야마기시를 비롯하여 모든 공동체는 조화를 중요시하고 있다. 이 조화는 “정신과 육체, 영과 육의 결합”을 강조하고 있어 대부분의 공동체는 육체적 노동을 강조하고 그 속에서 정신적 조화의 풍요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전원노동, 노동의 의무화는 이 공동체들의 철저한 규칙일 뿐 아니라 신념이다. 노동은 생계와 수입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정신과 영혼을 건강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예를 든 야마기시에서는 “사이좋음”이라는 테마가 이 공동체의 윤리 가운데 중요한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 “사이좋음”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와 평화 뿐 아니라 인관과 무생물, 인간과 동식물, 자연과의 사이좋음으로 확대되어 생활화되고 있는 것이었다.
공동체운동은 과거 국가주의적 사유방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변혁 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의 확대 속에 각 공동체 사이의 네트웍을 통한 유기체적, 진일적 구조를 이룬다는 공동체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의 보편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그것이 과연 어느 세월에 이루어지겠으며 몇몇 개인들은 가능하겠지만 사회 속에서 과연 일반화될 수 있는지, 그리고 대부분 실패하지 않았는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에 실패했기 때문에 보편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용적이거나 과학적이지 못한 자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키부츠와 같이 대단히 성공적인 공동체도 있고, 그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지 많은 수의 성공적인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변혁은 조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긴 호흡으로 비전을 창조해야 한다는 과제를 함께 안고 있다. 지금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부도덕하고 부정의한 체제의 “부정”과 비전 “창조”의 실천이 함께 요구되는 시기이다. 파괴가 효과적 방향성을 가지려면 비전의 모색과 창조가 제시되어야 하고, 비전의 집단적 수렴은 효과적인 파괴 속에서 일어질 수 있다.
이제는 과거의 경직된 진보관이 아니라 확대된 진보관이 요구되고 있다. 그동안 파괴에 익숙해 있던 정서를 창조의 정서로 전환하는 것, 그리고 수많은 비전의 제출과 시도를 애정있게 존중하는 것이 다양성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공동체운동은 대단히 관심있게 보아야 할 하나의 의미있는 창조적 실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