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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정사 지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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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연진 1993년 07월 137호
삼천 년만에 단 한번 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운다는 우담바라.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보고자 하는 그 마음이 간절해도 쉬이 만나기 어려운 인연의 꽃. 그래서 천상의 꽃이라고도 불리운다. 아름다울 것이다. 힘겨운 한숨으로 피워 낼 생명이니 그 빛과 숨결이 얼마나 오묘할까. 인간의 몸을 받아 불법 만나기 어렵고 정법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는데, 우담바라꽃의 웃음을 마주하는 어려움이 이에 비유된다고도 한다. 몇 겁의 생을 거듭하는 동안에 맺은 불연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수없이 피었다 스러져 간 많은 꽃들과 더불어 저마다의 가슴에 이미 제 몫으로 버그러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있는 불성을 찾고자 고민하고 애쓰는 우리의 모습처럼 말이다.

우담은 지연스님의 호이다.
꽃을 사랑하는 분이어서 우담이라 하셨는지 아니면 스님이 되신 깊은 불연에 감사함에서 비롯한 것인지 모르지만, 지연스님에게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드는 이름이지 싶다.
기원정사, 지연스님이 오래 전에 도반스님과 함께 일으켜 놓은 도량으로 크지는 않으나 여여해 보이는 곳이다. 옛 자취야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지금 이곳의 모습은 참으로 곱고 정적하다. 언덕 위에 오롯하다 싶게 자리한 이곳의 아늑함, 정갈한 요사체와 단아한 대웅전. 비구니스님 특유의 말끔함으로 물망울이 뽀르륵 튈 듯한 청량함이 있다.

차를 내어 주면서 스님은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늘 편치가 않고 어색하다며 웃는다. 스님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사분사분 지난날의 이야기부터 오늘의 스님 세계를 들려 주신다. 마치꽃을 꽂듯이 크고 작은 일들을 듣는 이의 마음에 조심스럽게 담아 주신다.
본디 꽃과 나무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제멋대로 들쑥날쑥 자라난 나무를 보면 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어려서부터 들곤 했단다. 많은 이들이 자연을 사랑하지만 전지가위를 들고 나무와 꽃을 솎아 주고 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이는 드물지 싶다. 아마도 스님과 꽃꽂이의 남다른 인연 탓일는지도 모른다.
“부처님께 꽃을 바칠 때 기왕이면 정성껏 예쁘게 다듬어 헌화하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그러던 중에 1972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동국대학교에서 가르침을 주시던 김운학스님이 꽂꽂이를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더군요. 일본은 꽃 문화가 상당히 발전했는데 만일 취미와 성향이 맞는다면 관심을 갖고 우리의 꽃 문화를 발전시켜 보라는 말씀이었어요. 꽃을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당시 대학 이학년으로 여가 활용을 위한 취미를 갖고자 했었거든요. 그래서 틈틈히 가벼운 마음으로 배우기 시작했지요.”
‘금연꽂꽂이연구소’에서 처음으로 꽃꽂이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의 원장이신 우금연 씨로부터 오랜 사사와 지도를 받으셨다며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이십여 년을 꽃과 더불어 지내온 셈이다.
사실 지연스님은 거의 평생을 서울에서 지냈다고 한다.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서도 생활 공간은 어쩔 수 없이 척박하고 메마른 서울이었으니 스님이 꽃꽂이 작업에 애착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작고 그 모습이 소박하고 미미하더라도, 꽃은 눈을 맞추고 고요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 나무는 늘 초록빛 동색으로 푸르르지만, 열홀을 넘기지 못하는 짧은 삶의 열정을 다 피워 내는 꽃.
그들의 단명한 이름다움과 싱그러움을 법당과 방, 사무실 등 자연과 단절된 여러 공간에서 새로운 의미로 창조하는 작업,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최소한의 공간에서 연출하는 일이 꽃꽂이고 보면 스님의 기쁨과 보람의 단상을 엿볼 수 있을 듯 싶다.
“한국 꽂꽂이는 불교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꽃꽂이의 가장 기초적인 화형의 구도적 장치가 삼존불의 배치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핵심이 되는 꽃을 가운데 꽂고 나서 균형을 이루어 줄 꽃을 양옆에 꽂아주는데, 바로 이러한 삼각구도 가운데 주불인 부처님이 있고 양쪽에 협시보살이 있는 삼존불의 배치도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지연스님은 꽃을 꽂으면서도 부처님의 모습을 대하는 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그 행함에 서는 수행하는자의 일심으로 하려고 늘 애쓴다고 한다. 이제는 취미라기보다는 수행의 방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꽃을 드리는 마음이나 꽃을 받아들이는 마음 모두 우리정서에는 수줍고 여간 설레이는 일이 아니지 싶다. 들에 피어난 들꽃을 한아름 안아다 듬직한 마음 하나로 서로의 가슴에 안기는 우리에게 꽃꽂이는 낯설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러한 우리가 삼존불의 배치에 맞추어 더욱 아름답게 꽃을 꽂으려 했던 것은 바로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하는 신심에서 비롯한 것이지 싶다. 1988년 스님은 뜻이 맞는 여러 스님들과 ‘한국불교꽃꽂이회’를 창립하였는데, 그 반응과 결과가 좋아 지금까지 해마다 전시회를 갖고 정기 모임을 통해 연구해 왔다고 한다. 전시회에는 스님들과 일반 재가불자 등 관심있는 모든 분들이 동참한다고 한다.
“불교적 이미지 표출을 처음에 부탁 드렸지요. 그런데 그 이미지 표출이 외형적으로 이루어져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보이더군요. 보기를 들면, 목탁, 징 등 불교적 사물을 화기 花器로 사용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처음 한번은 좋지만 계속 그러면 안 좋을 듯 싶어 꽃과 내적인 표출에 중점을 두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요즘은 아주 바람직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우리가 존재하는 지금의 사회와 문화에 어우러져야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에 스님은 지나치게 어렵거나 난해하지도 않고 인위적인 종교성을 두드러지지도 않는 대중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스님은 ‘불교꽃꽂이연구소’를 결성해 불교 꽃꽂이의 좋은 교재를 만들어야겠다는 책임감의 일환으로 불교와 꽃, 식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불교 꽃 이야기’를 얼마 전에 번역 발간하셨다.
“책을 내는데 여러 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불교경전에 등장하는 꽃들은 나름의 상징성을 가지고있는 것이 많아요. 누구나 알고 있는 연꽃은 그 종류만도 홍련화, 청련화, 황련화, 백련화 네 가지입니다. 저마다 의미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기도하구요. 하지만 연꽃이 불교의 꽃인 이유는 습하고 깨끗하지 못한 곳에서 피어나지만 그꽃의 자태는 어느 꽃보다도 가장 청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중 청결한 백련화가 연꽃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꽃의 처염상정 處染常淨은 오탁악세에 있으면서 중생교화를 하시지만 세상에 조금도 물들지 않는 불보살님들의 숭고함에 비유되고 있지요. 그리고 연꽃은 꽃이 되면서 동시에 속에 열매를 맺고 있어 불성이 연씨에 비유되기도 하구요. 이렇게 그 의미하는 바를 안다면 더 신심이나고 경을 대하는 것이 더욱 흥미롭지 않겠어요.”
스님은 꽃꽂이를 통해 포교를 하고 싶다고 하신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처럼 꽃으로 장엄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포교방법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냐며 활짝 웃으신다.
수요일마다 기원정사에서는 꽃꽂이 강좌가 열린다. 불교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고싶지 않아서 단순한 꽃꽂이만을 강의하신단다. 불교적 세계관이 서서히 내면에서 움트기 시작한다면 저절로 꽃꽂이에 그들의 의식이 투영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대부분의 일반 불자가 여성이지요. 아무래도 꽃은 여성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부처님을 찾는 불자들에게 꽃을 통해 부처님의 마음을 스스로 느끼게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선심 禪心과 화심 花心의 일미 一味’ 스님이 언젠가 작품 옆에 써 놓았던 구절이다.
멋과 환희심이 느껴지는 표현이다.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선심과 그대로 발현하는 무심한 순수의 마음, 화심이 같다는 것이리다. 스님은 꽃을 통해서 인간사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피었다가 시들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렇고, 금화향이나 장미향이 저마다 자기 몫을 품어내는 것도 다름아닌 부처님 인과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마다의 인연으로 피었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일체 만물의 현상을 늘 소중하고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만남에 고마움을 느껴야 할 듯하다.
모든 창조 작업이 그러하듯이 스님도 작품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뼈를 깍는 고통의 시간을 보낸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하신다.
며칠 내내 구상해 두었던 것이 갑자기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어 새로운 것을 구상하느라 애써야 한단다. 그리고 이미지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한 오랜 시간의 노력이 단 이틀 동안의 전시회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너무 허무하지 않냐는 질문에 스님은 웃으신다.
“전시회에 오는 분들이나 작가들 자신이나 모두 꽃꽂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요. 얼마 길지 않은 꽃의 아름다움을 하나의 강한 이미지로 응축시켜 오히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창조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작가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말입니다. 저는 이 점이 우리 스님들의 성향과 아주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수행하듯이
끝까지 한마음으로 임하는 것은 화두를 챙기는 것과 같지 싶습니다.”
‘선맥禪脈’이라는 작품명으로 출품하셨던 것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육조대사의 이미지를 각각 다르게 표현해 놓은 것이다. 작은 흙밭 위에 대나무가 꽂혀 있고 대나무가 화기가 되어 해바라기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어 꽂꽂이 되어 있다. 여섯 개가 서로 개별적이면서도 하나의 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작품을 통해서 선禪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 직업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니까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제 작품이 필요하다 싶은 곳에서 부탁이 들어오면 힘들어도 되도록 참여하려고 노력합니다.”
‘불교꽃꽂이연구소’를 연 이상 전국 모든 스님들과 불자님들이 동참하여 불교 자료 연구가 더욱 여법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신다.
정작 가장 좋아하는 꽃을 묻자 스님은 한참을 고민하는 눈치이다. 너무 많은 꽃을 대하다 보니 그 나름의 매력을 다 일아 딱 꼬집어 말씀하기가 어렵다며 웃음을 보이신다. 겨우 생각나신 듯이 스님은 “옛날에는 흑장미를 좋아했어요. 꽃이 피고 질 때 그 검붉은 장미꽃이 그리 변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백련화 같이 깨끗한 꽃이 좋습니다. 특히 옥잠화의 작고 톡톡 튀는 듯한 느낌이 좋아요.”
옥잠화로 요즘 좋아하는 꽃을 말씀하시며 덕분에 좋아하는 꽃을 생각해 보았다며 “고마와요”하며 웃으신다. 인터뷰가 끝나 가자 스님은 한결 편안해진 기분을 느끼는 듯 이제 질문 없지요 하는 듯 미소 머금은 눈빛으로 보신다.

햇빛이 마당 저 끝으로 내려앉아 있다. 너른 마루에 사그락소리 한번 들리지 않는다. 커다란 액자에 빳빳하게, 아니 마치 하늘로 비상이라도 하듯이 날을 곧게 세운 홍련화 사진이 걸려 있다. 여리게 주름진 투명한 꽃잎, 두터운 초록빛 잎 위에 노니듯이 누워있는 동그란 물방울이 참으로 곱다. 청정한 도량에서 날마다 꽃공양을 올리며 정진할 수 있는 우리 불교인들, 참으로 감사하지 않냐는 스님의 말씀이 눈부신 해살에 일렁일 듯 따스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