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도 없이, 결론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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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철관
1993년 07월 137호
역할분담이라는 말이 한때 많이 나돌았다. 몇 년 전 양 김씨가 대선을 앞에 두고 갈라서지 말고 두 사람이 다 이기는 길을 택하기를 많은 국민들이 원할 때 이야기이다. 결과는 선거 하루 전까지 기적을 바라던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걸로 나타났지만.... 한국에 민주주의가 꽃 피기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 더미에서 장비가 피기를 바라는 만큼이나 기대하기 어렵다는 어느 코 큰 친구의 비아냥이 들어맞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삼십 년만에 군이 출신이 아닌 민간인 출신의 통치자가 집권하고 있고, 오랜 세월 썩고 문드러진 부분을 도려내기에 바쁜 시절이기도 하다. 하여 사람들은 독재 시대를 벗어나 문민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민 시대라고 하여 본격적인 민주주의 시대라고 얘기하기는 이른 느낌도 없지 않다. 독재나 문민이나 그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는 통치의 주체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이것은 합의나 제도, 법률 등으로 보장되는 민주주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새삼 다시 얘기할 것도 없이, 좋은 민주주의란 한 사람의 선택이나 판단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 각계 각층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리라. 그래서 민주주의가 꽃 피려면 사회 구성원 각자의 역할이 중요한 매개가 된다 하겠다.
승가의 세속에 대한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해야 가장 바람직할까. 승가는 세속이 바라는 만큼 자기역할을 하고 있는가. 아무리 점수를 많이 주려고 해도 기대치 이하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사회이 모든 조직은 농경사회의 느슨함과 비효율을 벗고 최대의 효율과 속도를 지닌 조직으로 재편되었고, 또 재편되고 있다. 보수성이 강한 집단인 종교 조직도 기독교를 필두로 시대의 흐름을 잘 타가며 그들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방편과 대기설법을 자랑하는 불교는 지금쯤 농경 시대의 꿈에서 깨어났는가? 신 중심의 종교관을 배격하고 수행과 깨달음으로 종교사의 혁명을 불러 왔던 불교, 선진문물과 사상을 전파하여 수 많은 나라와 사람을 격동시켰던 불교, 외래 사상들이 난공불락으로 여겼던 중국인들을 감동시킨 불교가 지금 이 땅에선 쇠망하는 옛 유물인가?
누구든 지금 문제 제기의 수순을 넘어서 스님 한분 한분 이 자기 역할을 찾아서 전력투구 할 때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세속에 대한 승가의 역할이 있다면 승단 내에서 도 스님네 각자의 역할은 있기 마련이기에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중국에는 황하강과 양자강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강이 있다. 여기에 작은 전마선을 띄우고 고기를 잡는 어부가 있었다. 이 어부가 새로운 어장을 찾아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노를 저어 갔다. 어부는 서쪽을 향해서 갔지만, 불행히도 흐르는 강물은 더 세차게 동해로 흘러 이 어부는 허구한 날 한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불교 현실에 자기 역할만을 강조한다고 해서 지금의 문제에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 싶다. 훌륭한 소수는 언제나 있는 것이므로 별 문제가 아니다. 전체의 질을 결정하는 다수 중간층이 어떠한 흐름을 형성하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오랜 전통과 부를 가졌더라도 종교로서 자기역할을 하지 못하면 일시에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과거 고려 말과 이조초의 역사에서 잘 보아 왔다. 주류에서 밀리면 몰락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당시라고 해서 훌륭한 스님들이 없었고 뛰어난 재가불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조 왕실도 초기에는 모두 불자 집안이었지만,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주류는 신홍사대부들이었고, 승단은 전체적으로 나약하고 시대 정신을 선도하는 집단이 아니었기에 걷잡을 수 없는 쇠퇴의 길을 걸었고, 끝내는 천민집단으로까지 떨어졌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에 참석하고, 몇 천 년 내려오던 제사 관습을 일거에 무시하며, 한달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는 강력한 종교가 불교를 대신해서 종교 인구의 반을 흡수하고 팽창일로에 있다. 사회사업, 의료, 교육 등 종교 주변 영역에 대한 활동 역시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세속은 그런 사실에 민감하다. 사회 각 분야에서 뚜렷한 종교색을 나타내면서 주 세력으로 등장하는 그들의 힘을 느끼면서 불교는 어떤 대응을 해야하는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불교의 가르침을 이 시대의 언어와 논리로 풀어 놓지 않는다면 집안에 숨겨 놓고 잊어버린 보물 덩어리일 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혹자는 지금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대형불사를 보면서 바야흐로 불교의 중흥이 도래했다고 한다. 현상은 그러한 일면도 있다. 불교방송국이 생기고 병원도 생기고 대학도 만들어 가고 있다. 세웠다 하면 동양 최대의 불상이 난무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이 얼마나 우스운 자기 최면인가. 시대 정신을 선도하는 종교로서 자리잡지 못하고 한갓 외형적인 물량으로 중흥을 운위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현상은 거대화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병폐에 다름 아니기에 우리의 고민은 더욱 크다. 배고팠던 자의 허황한 자기 과시욕은 아닌지 물어 볼 일이다. 칠성님과 부처님이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는 신도들을 보며 지극한 신심만이 불교를 살려 온 것이라는 강변을 이제는 버려야 하지 않을까. 한 가지 다행스런 모습도 있다. 몇 년 전까지도 산중에서 수행하는 납자가 불교 외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면 외도처럼 여기는 현상은 사라진 듯하다. 중이 무슨 정치 얘기를 하느냐, 주지나 포교당은 재받이 중이나 하는 일이지,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도 환속하는 지름길이다 등등의 비난은 이제 없어졌다. 위기 의식의 발로인지, 대중 교화의 동사심인지 알수는 없지만... 이제 전통이나 권위에 안주하는 불교에서 세속이 요구하는 소리에 과감히 귀기울여 거기에 걸맞는 불교의 역할을 찾아야 하리라.
이런 저런 고민을 새겨 보는 오대산 지력에 오늘은 장미비가 내리고 있다. 저 빛 속에서 산목련은 한껏 피어나 그윽한 향기를 내뿜을 것이다. 그런 향기와 같은 불교의 내일을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