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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당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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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권정생 1993년 07월 137호
우리 한국 어느 곳이나 마을이 있는 곳이면 당산나무도 함께 있다. 정자나무라고도 하고 둥구나무라고도 부르는 아름드리 고목은 수백년 수천년 동안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주로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인 당산나무는 겉모양도 아름답지만 나무가 지닌 내력과 속뜻이 더욱 아름답다.
당산나무의 유래는 단군 시대 신당수로 나무를 모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신당수와 마을의 당산나무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당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이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쉼터도 되고 놀이터로 되었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정자나무가 되고 단오날엔 그네도 매고 나무 밑에서 잔치도 벌였다. 멀리서 오는 나그네에겐 커다란 당산나무부터 발견하고 이젠 마을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리는 손님맞이 구실도 했다.
사람이면 누구나 나무를 좋아하지만 유달리도 우리 겨레는 나무를 사랑했다.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다른 어느 나라에도 마을 가까이 이런 나무를 심어 놓고 신으로 모시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리스같은 나라에서는 일찍이 높은 언덕에 나무를 모조리 베어 내고 대리석으로 신전을 지었지만 지금은 거의 무너져 버리고 엉성한 흔적만 남아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그렇고 로마의 문화 유산도 그 내용만큼은 조금도 아름답지가 않다. 가까운 중국의 만리장성은 한 마디로 거창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건 잔인한 피비린내뿐이다. 일본엔 가미사마를 모신 조그만 신당들이 마을마다 있지만 웅장한 고목 나무는 없다.
당산나무의 존재는 참으로 놀라울 만큼 감동스럽다. 당산나무는 심는 사람이 있고 가꾸는 사람이 있고 보살피는 사람이 계속 이어진다. 아무도 당산나무를 해치는 사람은 없다. 수백 년 수천년 자라고 늙어 쓰러져도 베어 내지도 않고 그냥 그래도 그 자리에 둔다. 고목이 되어 쓰러질 즈음이면 그 곁에 또 다른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다. 누가 심은 것도 모르게 당산나무는 똑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고향을 가진 사람들은 고향의 추억과 함께 이 당산나무의 추억도 모두 가지고있을 것이다.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나무 그늘 밑에서 낮잠도 자고 둘러앉아 고누도 뜨고 씨름도 했다. 이야기도 거기서 들었다. 외갓집 갔던 어머니가 돌아오는 날이면 이 당산나무 밑에서 기다렸고 장에가신 아버지도 여기서 기다렸다. 달 밝은 밤 윗마을 갑돌이와 아랫마을 갑순이가 몰래 만나는 장소도 되고 멀리 떠나가는 동무들 눈물 흘리며 전송하던 곳도 이 당산나무 아래였다.
서편제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누나를 폭력에 가깝게 학대한다고 생각한 동생 동호가 아버지와 싸우고는 마을 밖 당산나무 밑에서 누나 송화와 헤어져 집을 나간다. 아득히 들길 저편으로 사라지는 동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송화는 울고 있었다. 그 뒤 송화는 아예 벙어리가 된 채 날마다 이 당산나무 밑에 쪼구리고 앉아 떠나간 동생을 기다린다.
만일 당산나무가 없었더라면 서편제 영화의 기막히도록 아름다운 이 장면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송화와 동호의 슬픈 이별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그 뒷족 화면 가득히 버티고 있는 당산나무의 믿음직스런 모습은 우리들의 마음을하늘처럼 든든하게 가라앉혀 준다.
“송화야, 너무 슬퍼 말아라. 이 담에 틀림없이 내가 만나게 해 줄게.”
당산나무는 송화에게 그렇게 얘기해 주는듯했고 결국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당산나무는 우리에게 몸과 마음으로 한없이 베풀기만 했지. 우리한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공양 같은 것은 물론 엄청난 현금이나 시주도 요구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설법도 하지 않고 한줄의 경전도 없고 복잡한 계율도 없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그 무엇보다 의젓하고 성스럽다. 엄숙하면서도 결코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한결같이 깨끗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들의 당산나무가 수난을 겪고 있다.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제주도 같은 데서는 행정 기관을 동원해서 나무를 베어 버렸다고도 한다. 새마을 운동 때도 수많은 당산나무가 사라졌고 고속도로 건설 때도 많이 없어졌다. 댐이 들어서고 마을이 수몰되면서 당산나무도 물속에 파묻혔다. 다행히 아직 남아있는 나무들도 옛날과는 다르다. 더러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지만 당산나무에 대한 인식은 옛날 같지 않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기독교나 여타 종교에서 미신이나 우상 섬기는 것으로 매도하는 일이다. 앞서도 누누히 말했지만 당산나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어느 특정 종교처럼 경배의 대상도 아니고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절대 권능을 가진 건 더욱 아니다. 당산나무가 어떤 인간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자도 아닐진데 그가 우리에게 끼치는 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당산나무는 단지 심어 놓은 그 장소에 묵묵히 수백 년을 살면서 사람들 편에서 고락을 같이 하는 이웃일 뿐이다. 물론 당산나무 밑에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도 지내고 굿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소망과 의지와 화합을 다짐하는 행위이지 당산나무하고 어떤 조건부 계약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지 않는가. 어떻게 보면 당산나무 신앙은 다른 고등종교보다 훨씬 순수하다. 서로가 부담을 끼치거나 강요하는 행위도 없다. 서로에게 자유를 주는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이 아닌가 싶다.
당산나무는 지면 보호차원에서도 크게 일익을 했다. 당산나무와 함께 우리 조상들은 정화수를 소중히 했다. 나무가 푸르고 물이 깨끗하면 그 세상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얀 소복차림의 우리네 어머니들은 만물이 아직 잠깨기 전 새벽길을 나가 정화수를 떠다가 정성을 드렸다. 깨끗한 정신은 맑고 깨끗한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 정신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티없이 대껴진 신의 정수리가 된다. 신과 인간은 결코 대치되는 상극이 아니라 서로가 하나로 살아가는 상생의 결합체이다. 신을 찾는 길은 나를 찾는 길이며 신의 응답은 나의 의지를 확언하는 체험인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세상엔 생물과 무생물로 나뉘어 있다고 하지만, 정화수와 당산나무를 소중히 했던 우리 조상들은 그런 이분법 같은 것은 상상하지도 않았다. 만물은 살아있고 모양만 다르지 모두가 같다고 여겼다.
당산나무 밑에서는 계급도 없다. 그냥 백성이 모이는 곳이다. 요새는 군사정부가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고 하는데 왜 백성의 정부는 없는 것일까. 문민文民이란 말이 전에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어색하다. 문文은 어디까지나 관官에 가까왔지 백성(民)의 편은아니었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으뜸가는 가르침일진데 우리네 종교는 본디의 뜻과는 달라져 버렸다. 인류 역사에 수많은 분쟁이 있었지만 종교 분쟁만큼 심했던 것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종교끼리의 갈등과 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산나무는 백성들이 모이는 곳이어서 계급도 없고 분쟁도 없다. 당산나무야말로 평화의 수호신인지도 모른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가도 당산나무는 따뜻하게 맞아준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버리라 했는데 집착이 지나치면 망집이 되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기독교 성서에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오히려 집착을 권장하는 듯한 말이 된다. 물론 여기서 일컬는 보물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지만 사람에겐 그 어떤 것에서든 해방되어야 한다. 집착은 아집을 낳고 독선으로 변하면 자기 것 외는 무엇이든 용납하지 못한다. 결국 이런 배타적인 종교관이 분쟁을 일으키고 살인까지 하게 된다. 종교이데올로기야말로 가장 비종교적이며 악마와 같다.
당산나무는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니면서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이 임자가 따로 없으면서도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당산나무는 구태어 성역과 세속으로 구분짓지 않는다.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 완전한 장소다.
우리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함께해야 온전하다. 아무리 도를 깨치고 해탈을 한사람도 죽기 전에는 먹어야 하고 먹은 것은 똥으로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산나무가 은행나무일 경우, 그리고 암컷일 경우엔 가을이면 많은 열매를 베풀어 준다. 사람들은 그 은행 열매를 골고루 나누어 가진다. 기독교는 중세 이래 엄청난 재산을 모으기만 했지 나누어 준 것은 없다. 요즘도 막강한 재력을 지닌 교회가 수없이 많지만 그 숫자만큼의 교인은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교 쪽의 절집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어차피 남에게 덕을 끼치기도 하고 해를 끼치기도 한다. 반대로 남에게 덕을 얻기도 하고 해를 입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세상엔 절대 선도 없으며 절대 악도 없다. 당산나무는 이런 상부상조의
거짓없는 삶을 말없이 가르친다.
사회가 점점 개인과 집단끼리의 이기주의에 빠져 가는 현실이 절망스러워 문득 당산나무의 꾸밈없는 믿음이 그리워졌다. 이 글을 쓴 것은 옛 고항과 순수했던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잠시나마 되살려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이런 소박한 삶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당산나무와 정화수와 도깨비만 있어도 그 어떤 외래종교나 사상과 이념이 없이도 우리는 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