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를 찾아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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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김남희
1993년 06월 136호
지난겨울 전수창 화백의 열번째 전시회는 시골의 버려진 방앗간을 개조한 곳에서 열렸다. 죽어 가던 옛 방앗간이 훌륭한 예술공간으로 다시 살아나 선생님의 예술적 주제의 가장 큰 줄기인 ‘생명 탐구’의 한 작품이 되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이색적인 전시가 있었다. 금년에는 서울 근교에 있는 흙과 나무로 지은 토담집에서 다시 오랜 작업의 결실을 선 보인 것이다. 캔버스 대신 여름용 면 셔츠 위에 그린 그림 삼백여 점이 흙벽 위에 걸려 있다. 액자나 유리 속에 가두어 걸어 놓고 보는 그림이 아니라 입고 보는 그림들이어서 새롭다. 주로 원색으로 어린이의 동화童畵와 추상 중심의 그림잔치이다. 더구나 제자들도 같이 참여하여 각자 천차만별의 화제畵題로 가득찬 전시장은 이색적 새로움으로 넘친다.
이번 전시회는 밖으로 드러난 화백의 두번째 ‘관념을 깨뜨리는 소리’이다. 선생님은 고정된 관념의 틀어 없이 언제나 관념이 만들어 낸 패러다임을 부수는 작업을 한다. 전시는 반드시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하고 그림은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려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모든 버려진 것과 버려져 가는 것에 선생님의 손길이 닿으면 생명이 솟고 호흡을 시작한다. 방앗간 전시품 중에서 특히 방아를 찧던 기계나 발동기들에게 색을 입혀 멋진 조각품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치 마술사처럼 우리 관심 밖의 것들, 잊혀져 가는 대상에게 혼을 불어 넣어 예술로 승화시킨다. 우리의 옛것에 현대 감각을 더해 조화를 이루어 내는 맛은 숭늉과 커피 같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창작하되 뿌리는 우리 것으로 돌아간다는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이런 주술과 같은 비결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선생님이 사시는 곳은 한강의 거대한 두 물줄기가 만나는 양수리 끝이다. 이곳에 상식의 발상을 뛰어넘는 여러가지 장식을 하여, 사는 집은 그 자체가 커다란 나무조각품이다. 천진암과 팔당의 전시장도 직접 손이 안간 곳 없이 흙과 나무로만 지은 무공해 건축이다. 오십년대 말에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이십 년 동안 미술수업을 하고 돌아와 팔년 전에 이곳 양수리에 자리를 잡고부터 팔년 동안 캔버스를 놓고 면벽을 시작했다. 무명無名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팔리는 그림도 그리지 않았고 그려 달라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 하신다. 사실 이러한 청빈을 선택하심이 선생님의 쉼없는 근원을 캐는 좋은 방편이 되었지 싶다.
선생님은 절이나 백일기도가 따로 필요없는 불자다. 새삼 어느 종교에도 얽매임이 없는 자유인이어서 평상심을 도의 근본으로 아는 도인처럼 산다. 빈 캔퍼스의 모습처럼 모든 것에 달관하고 초탈한 듯 오염과 혼돈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산중의 스님보다도 해맑다. 선생님께서는 그림 그리는 일 자체가 평생의 수도이고 화두참구와 같다는 말씀을 늘 하신다. 그러한 자세의 구도 화법이기에 선생님의 눈빛에는 지금도 화두를 늦추지 않고 있음이 역력히 보인다. 선생님의 예술관은 고된 수행 만큼 철저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우주, 자연, 생명, 본성의 근원을 추구하는 갈망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강조하신다. 예술을 하는 행위의 근저에는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기본 동기가 내재하는 것이고, 이것이 단순한 표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기에 삶의 희망이나 절망, 노여움, 즐거움, 사랑 따위를 더욱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내는 것이 그림의 한 본령이기도 하다고 하신다. 참으로 우주적 근원을 나타내는 이러한 작업이기에 고행승과 다를 바가 없고, 구체적 삶의 모습을 담고자 하는 열망이 때로는 자연을 노래하는 그림으로 나온다고 한다. 끊임없는 생명의 근원을 찾는 작업의 연속이 예술이고, 그 가운데서도 빛을 색으로 바꾸어 빈 공간에 구조하는 그림의 영역은 평면이 주는 제약으로 어려운 작업일 수밖에 없다고 하신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 자연, 인간의 오장육부까지 오묘한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예술에 있어서 이러한 리듬을 작품으로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우주의 근원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그림도 백퍼센트의 리듬으로 이루어지면 엑스터시에서 출발한 그림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한다. 살아나는 사월의 푸르름속에서 모두가 리듬을 타고 노래하듯 선생님의 이러한 예술론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가슴을 적시게 한다.
최근에 선생님의 그림에는 조심스레 선이 보이고 있다. 그동안 끈질기고 묵묵히 정진해온 근원에의 탐구 작업이 조금은 실마리가 보이는가 보다. 끝없는 심우尋牛의 길에 소를 찾은걸까? 제필아뢰야식에서 더욱 깊이 들어가 내면의 불안佛眼에 가까이 가있는 걸까? 자신의 의식이 부처님의 의식으로 바뀌는 걸까? 선생님의 달마도를 보면 심우도와 한 단계 한 단계의 변천을 읽을 수 있다. 먹과 흑백의 달마에 익숙해 온 우리에게 이런 달마는 조금 충격적이다. 한지 위에 아크릴로 그린 가장 현대적인 달마의 선線 한 줄 한 줄에 막힘이 없는 선미가 뚝뚝 묻어 나온다. 선생님의 그림에서는 어두운 색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원래 우리의 진아眞我, 생명의 본질은 밝은 것이므로 언제나 생명을 넣는 작업에 눈부실 만큼 화려한 색이 많다. 그러나 화려하기는 하나 강렬하지 않고 오히려 강렬하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 점 하나 선 한 줄에서 배어 나오는 생명의 움직임이 강렬한 느낌으로 온다. 그림의 이러한 생명력은 우주 본질의 표현인 깨달음을 향한 각고 정진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림에서 보이는 이런 생명의 움직임은 자연의 리듬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화폭에 담아내는 화백의 치열한 정신의 반영이지 싶다. 춤을 추는 사람이 온통 춤 속에 빠져 자신을 잊고 몰아의 경지에서 오직 춤의 동작만 남아있을 때, 비로소 완전한 경지를 체험하듯, 그림을 그리는 것 또한 그리는 사람과 그림이 둘이 아닌 하나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주적 생명이 담긴 예술이 이룩된다는 말씀이시다. 그러기에 깨달음을 향하는 보조기구로서 붓이고 견성성불의 근원을 캐는 수행의 도구로서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 이제껏 걸어 온 길에 대한확신이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