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산내암자 - 사명대사의 입적入寂의 터, 홍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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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3년 06월 136호
홍제암은 그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자통慈通 홍제존자弘濟尊者 유정 사명대사(1544년∼1610년)와 관계가 깊은 암자이다.
사명대사는 1608년 연이은 전란으로 인하여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해인사로 은거차 내려왔으며, 지금 홍제암 터에 초암을 짓고 소란야小蘭若로 삼아 한거하였다. 광해군의 각별한 관심과 문도들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사대西大의 가짜 모임인 이 몸은 이제 진眞으로 돌아가련다. 내가 이제 입멸하여 대화大化에 순응하려 하노라”는 말을 남기고 서거 1610년에 입적하였다. 그러나 영규대사가 지은 「영자전影子殿 중수상량기」에 따르면 실제 홍제암의 초창연대는 대사가 입적한 사년 후인 1614년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홍제암은 그때까지 정식 암자였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초암이었던 모양이다.
사명대사의 법제자 혜구彗球스님이 초암이었던 자리에 가람을 창건하여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셨는데, 이에 따라서 암자 이름도 영자전이라 불렸으며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1656년 사명대사의 증손인 각민覺敏스님이 중수하였으며, 1731년 현우玄祐스님과 회총會聰스님이 화주가 되어 홍해弘海스님이 주지로서 중창하였고, 1770년에는 체한體閑대사가 화주가 되고 해봉海峰대사가 가람을 일신하였으며 1938년 강고봉高峰 대강백이 화주가 되어 대산스님이 중수하였다.
1967년 현 도감인 종성宗性스님은 도괴되기 일보 직전의 큰방채를 중수할 원願을 세우고 먼저 사명대사의 비단碑壇을 말끔히 정비하고 관계 기관에 홍제암을 지방문화재로 등록시켰다. 한편 경상남도에서 연차 계획을 수립하여 1977년도에 이천만원, 1978년도에 삼천만 원의 예산 계획을 수립하여 일차 년도의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1977년 5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씨가 참배차 해인사에 왔다가 이곳에 들려 공사 현장을 둘러본 뒤 구국성사救國聖師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니 특별히 주변을 성역화하고 부분적으로 연차보수 공사를 할 것이 아니라 국고로서 건물 자체를 완전 해체하여 건립하게 하였고, 한편 서쪽밭에 부속건물 서래각西來閣 60여 평을 새로이 건축함으로써 그 면모를 일신하였다. 최근 다시 큰방채에 달련 부엌에서 음식 냄새가 법당과 영자전에 흘러들어 성역의 분위기를 해친다 하여, 부엌을 새로이 건립하는 한편 청소년을 위한 심신 수련장을 다시 건립하느라 홍제암은 분주하다.
옛부터 홍제암은 백련암, 원당암과 더불어 빼어난 경관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특히 새잎이 피어나는 사오월 영자전의 앞산인 비봉산 자락을 바라보는 것은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서래각 앞마루에 앉아 막 피어나는 모란꽃과 비봉산의 신록을 보면 한폭의 수채화 같아서 그 무르녹는 정취가 각별하다. 여름은 초록의 향연으로 가을에는 갖은 색채로 타오르는 단풍의 현란함으로, 폭설이 내리는 겨울날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바라보는 비봉산 설경의 아름다움으로 이어져 가히 선계仙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필자 개인적인 추억으로는 홍제암 하면 칠십년대 초 유랑잡승(?)의 숨구멍이요 사랑방이었던 물레방앗간을 빼놓을 수 없다. 방앗간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서넛만 앉아도 꽉 차는 작은방에 일곱, 여덟명이 포개 앉아 개똥철학과 청담淸談으로 밤을 세우곤 했는데, 그때는 무슨 이야기들이 그렇게 진진하게 많았던지... 소피라도 보려고 나오면 밤하늘의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질 듯 오뉴월 풀냄새와도 같았던 싱그러운 기억들이 세월의 저편에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좌주座主는 언제나 맏형의 위치에 있는 종림宗林스님, 그리고 거기에 발 냄새를 풍기며 모였던 객승들이 뒷날 해인지를 일구어낸 편집위원들이었으니, 방앗간은 필자 개인의 추억으로서뿐 아니라 해인지의 그간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어느 해인가 큰물이 저 물레방앗간은 자취도 없이 세월의 물살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젊은 날 한때의 푸른 추억들은 그 방에서 밤을 세워 본 유랑잡승들의 몫으로 남아있으리라. 또 홍제암에는 사명대사의 비가 유명하다. 우선 그 문장이 아름다워서 한번 놀라고, 비문을 지은 사람이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어서 다시 놀라고 이 비석 이 일제 시대에 이적을 나타낸 신령스러운 일화를 지니고 있어 또 한번 놀라게 되는 비석이다.
일제의 마수는 해인사에까지 뻗쳐 갖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특히 사명대사의 비석을 훼손한 것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악랄했던 일 가운데 하나이다. 합천 경찰서 다께우라 서장은 사명대사의 비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불손한 민족정신을 고양시킨다는 이유로 비석을 훼손하였던 것이다.
‘갑오년 봄에 사명대사는 세 번에 걸쳐 왜장 가동청정을 만났다. 그때 청정이 묻기를 ‘조선에 보배가 있느냐.’하니 ‘조선에는 보배가 없으나 일본에 그 조선의 보배가 있다’ 했더니 청정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찌하여 조선의 보배가 일본 있다고 하느냐’ 고 묻자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너의 머리를 보배로 삼고 있으니 그 보배가 일본에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엄연히 쓰여 있으니 왜놈 서장이 그것을 모르는 척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다께우라가 순사 몇 놈과 석수를 데리고 와서 대사의 비석을 부수니,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고 뇌성 벽력을 치면서 괴상한 풍운이 일어나 석수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다께우리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져서, 그 비석의 존재를 더욱 신비화시켜 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지금은 네 조각 난 비를 다시 잘 보수하여 홍제암 비단에 모셨는데 간혹 일본 관광객에게 이같은 사실을 이야기해 주면 얼굴 표정이 굳어지고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해 안내하는 이의 어깨가 으쓱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몇해 전까지 홍제암 안내를 기막히게 잘한 처사님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잘 보이질 않는걸 보면 건강이 악화되었는지 그 역시 홍제암의 보물이었는데... 올해도 홍제암의 모란꽃은 어김없이 붉었다 져 버렸으니 김영랑의 시처럼 천지의 봄은 그 자취를 감추고 초여름의 풋풋한 산 빛이 앞 냇가에 푸르렀다.
이맘때면 흔히 홍제암 뒷 숲에서 들리곤 하던 뻐꾹새 소리는 분주한 공사 탓인지 철이 일러서인지 들리지 않고 햇빛에 나뭇 잎새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