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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중봉산 죽림사 - 석가세존을 모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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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3년 06월 136호
이태호, 황호균

많은 신도들과 함께 야단법석을 떤 괘불
괘불은 법당 안에서 지낼 수 없는 큰 규모의 법회나 의식 때 모시는 일종의 야외용 대형 불화이다. 석탄일, 기우제, 영산제 등 사원의 큰 행사를 위해 제작되었을 터인데 사찰에 몰려드는 많은 신도들이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도록 본존을 대신하여 야외에 불단을 설치한 일종의 탱화이다. 그래서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괘불의 기원이나 유래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다. 언제부터 괘불을 야외 불사에 쓰기 시작했는지 분명치 않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70여 점의 괘불은 17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그리고 조선 시대 불교미술은 무엇보다 삼베나 비단, 종이에 그린 회화가 쾌 발전했다. 이른바 탱화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조선 후기 탱화의 발전은 왜란 이후 불교의 성격을 나타내 준다. 특히 대형화 추세나 적 흑색을 즐겨 쓴 보색 대비의 장엄한 효과와 예배 기능,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는 서술 표현의 교화적 성격 등이 그러한데, 이는 서민층에게까지 확대된 불교의 대중화와 맞물려 있다. 그러한 조선 시대 탱화의 경우 이른 시기의 것들은 대개가 괘불 들이다. 여기서 거론될 죽림사 괘불(1623)은 물론이고 무량사의 ‘미륵보살도’(1627), 보살사의 ‘영산회상도’(1646), 화엄사의 ‘영산회상도’(1646), 도림사의 ‘석가삼존도’(1683) 등이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칠장사(1628), 갑사(1650년), 안심사(1652), 영수암(1653)의 괘불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1620년대 초반부터 1700년대에 걸쳐 제작된 탱화는 어째서 괘불이 많을까? 이 문제의 해결은 조선시대 불교 회화사에서 고려 양식을 계승한 초기와 조선적 형식을 구축한 후기의 과도기이면서 사각지대인 17세기 불화와 불교사의 성향을 파악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죽림사 괘불이 우리나라에서 제작 연대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대접받지 못하는 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불교미술사의 사각지대에 놓인 17세기
주지하다시피 17세기는 선조에서 인조 시절, 왜란(1592∼1597)에서 호란(1627∼1636)에 이어지는 외침의 피해가 컷던 때이다. 전란은 전국의 경제적 파괴를 가져다 주었고, 백성들은 자기 생존만을 보존하기 위해 피난하거나 비굴하게 대처하는 왕실이나 사대부사회에 대하여 큰 실망을 느끼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조선의 개국이념이었던 성리학이 퇴계와 율곡에 의해 조선적 학풍으로 다져졌고, 그에 따라 숭명배청의 의식과 붕당정치가 확산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국가경제의 피폐화, 정치적 갈등, 민중의 사회의식에 대한 변화 속에서 불교계 역시 혼란의 와중에 있었다.
전란으로 전국의 사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승병 활동에 대한 반감으로 왜군은 철저히 불단을 유린한 것으로 일려져 있다. 반면에 외침에 분연히 일어선 승병의 역할로 인하여 불교를 억누르던 유교지배층으로부터 일정하게 양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특히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확립되던 때라 외형적으로는 불교에 대한 이념적 탄압이 진행되었으나 불교의 성장에 그리 영향력을 못 미쳤다. 오히려 전후 사회에 팽배한 위기 의식과 갈등 속에서 불교에의 귀의가 서민층에까지 확대되었고 불교 대중화에 의미 있는 새 출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대개 종교란 이러한 혼란상황을 사세의 확장으로 직결시키는 일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은 여러 역사적인 사실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17∼18세기 전후 복구 및 경제력의 성장과 함께 전국적으로 불사 중홍이 일어남은 바로 그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작된 17세기 괘불들은 불교의 새로운 중흥과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되는 조선 후기 탱화 발전을 예고하는 주요문화 유산이다. 그리고 그 괘불의 형식미에는 전란의 피해가 컷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지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해내었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다. 크기가 보통 7.8m 높이에서 10m(무량사 ‘미륵보살도’는 약 14m×8m, 화엄사 ‘영상회상도’는 약 12m×8m 등)가 넘는 것도 있는 점이나 색채 감각에 실린 중후한 맛이 그러하다. 내용 또한 무량사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석가모니 삼존상과 그 군상도인 ‘영산회상도’가 많다. 석가가 현생 불교의 주존인 점과 석가의 여러 법회 가운데서도 법화경을 설법한 영축산의 대법회 모임을 중심으로 담은 것을 보면, 고려에 이어 조선의 불교계가
석가 사상의 원론을 강고히 다지려 한 의식도 엿볼 수 있다.
한편 17세기 탱화 괘물이 주축을 이룬 것은 전후복구가 채 안된 상태에서 야외에서나마 예불을 보기 위해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전란시 불타버린 건물이나 벽화, 불상 등에서 입은 피해 의식으로 이동이 용이하도록 먼저 괘불의 불시를 시작했음직도 하다. 그러한 가운데 조선 시대 불교미술의 한 양식으로 정립되어, 18세기 이후 탱화의 유행을 가져오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17세기 불화가 괘불 중에서 가장 작은 크기이기도 하려니와 석가 단독상인 좌상의 양식에 있어서도 초기 양식의 계승과 17세기부터 18세기 탱화의 모범적 전형을 제시해 주고있다.
석가모니의 독존상을 담은 죽림사 괘불
현재 죽림사에 봉안된 괘불은 차후에 제작되는 보통의 경우와는 달리 비단 바탕이다. 괘불은 대개가 10여 미터 내외의 대형 그림으로 튼튼한 삼베로 제작되는 것이 상례지만 죽림사의 경우는 규모가 작은편이어서 비단으로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 괘불을 제작한 사찰과 그에 참여한 여러 승려와 신도는 본디 하단의 화기란에 자세하게 적혀 있으나, 그 일부를 의도적으로 지우고 뜯어 버려 완전한 해독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화기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天啓三年壬戊(1622년) 十一月十七日’에 석가모니 ‘掛佛世尊幀’을 제작한 것이다. 혜은慧恩비구의 대공덕으로 이루어진 이 괘불불사의 시주자들 가운데 첨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위층은 아니지만 양반지주가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는 지역의 부민층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괘불의 화기란에 적혀 있는 제작 연대는 연화와 간지가 달라 자못 혼란스럽다. 이런 경우 구체적 기록인 간지를 취하는 것이 금석학金石學의 일반적 경향이어서 간지에 비중을 두어 해석하면 ‘天啓三年壬戊’을 ‘天啓二年壬戊’(1622)의 오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조성처에 대해서는 먹으로 지워 버려서 판독하기 어려웠다. 다만 먹으로 덮어 지우기 이전에 쓰여진 원래의 사명寺名을 긁어 버리고 죽림사로 고쳤음이 확인될 뿐이다. 이 괘불은 죽림사에서 조성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죽림사로 옮겨진 것이다.
왜란이 끝나고 25년 뒤인 1622년에 제작된 현재 죽림사 소장의 괘불은 석가모니의 독존을 모신 좌상이다. 단독상 형식의 ‘영산회상도’이다. 이 괘불의 상호는 정면과 하단에서 보는 것에 차이가 있다. 정면에서 보면 장방형인데 비해 아래에서 올려다 보면 원만상이다. 대개 경배의 대상물로 제작되는 종교 조형물은 그 경배의 위치에서 보는 것이 올바른 감상법이다. 우리나라 불교 조형물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지 않고 정면에서 똑바로 보면서 어깨에 비해 머리가 큰 가분수형이니 하는 설명은 맞지 않다.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吉相座)한 세존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땅을 가리키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갈라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석가세존의 손 모습은 보살사 안심사, 영수암의 ‘영산회상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석존은 키 모양과 광배를 배경으로 오색구름에 휩싸여 있다. 키형 광배는 17세기 탱화에서 흔히 보이며, 그 중에서도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강진 무위사 후불벽화인 아미타삼존도(1476)에 보이는 장식적인 키형 광배의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두광과 신광을 완전히 분리한 점이 변화된 모습이다.
구름 표현은 상단의 경우 색동 띠를 여러 개 이어 놓아 마치 무지개를 보는 듯하며, 하단에는 국화와 모란을 인화문처럼 그렸다. 말아진 머리칼 모양의 나발이 옥계가 오똑하고, 붉은색 농담으로 그린 계주는 이마 사이인 정면에 위치한다. 우직스런 표정의 상호이지만 반달모양 눈썹과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슴치레한 눈매, 그리고 눈동자와 눈섭까지 치밀하게 그리고 있다. 코는 얇은 편이고 턱과 코밑의 수염은 나선형으로 처리하였다. 눈썹과 함께 수염은 선명한 초록색으로 그리고 있는데, 역시 17세기 불화의 일반적인 특정이다. 귀는 넓고 장대하며 짧은 목에는 삼도를 선묘 하였다. 어깨는 당당하며 꽃무늬가 화려한 적색기사를 두르고 있다. 승각기는 명치를 겨우 가린 정도이다. 그 위에 걸친 가사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어깨로 감아 올려서 승각기 발 아래에 감춰 있다. 가사 모서리는 인화한 듯한 국화문을 촘촘히 장식하였다.
대체로 붉은색 기운이 괘불 전면에 감돈다. 가사와 키 모양과 광배 외곽띠와 연화대좌 하단이 적색조끼며, 광배 내부와 오색 구름 일부와 가사 안쪽은 녹색조로 붉은색 분위기를 받치고 있다. 꽃무늬가 장식된 구름과 연화대좌는 황색조며 연화대좌 측면은 청색으로 표현하여 입체감을 살렸다. 전체적으로 연한 색의 선묘가 가늘고 섬세하며 얼굴을 위시한 가슴, 팔, 발의 노출된 나신裸身은 맨살의 피부감을 한층 돋우고 있다.

17세기 이후 괘불과 ‘영산회상도’의 모범인 석가독존상
이상과 같이 석존 형상의 중후한 표정과 붉은색조가 화사하면서도 고격의 색채 감각을 띤 이 죽림사의 괘불은 조선 초기와 후기를 있는 17세기 불화의 그 양식적 특정을 잘 갖추고 있다. 우선 석존 단독의 좌상이면서 5m가 안 되는, 괘불로서는 작은규모인 셈이다. 이는 벽화의 전통에서, 또 고려, 조선초기의 2m 내외의 소형 불화에서 대형 후불탱화나 괘불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띤다. 그러니까 전후 어려운 상황속에서 본격적인 괘불을 제작했다가보다 임시로 예불을 보기 위해 독존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또 이 석가 독존상 괘불 양식은 병자호란을 겪으며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삼존상이나 군상도 형태의 ‘영산회상도’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다음 조선 초기 모사 방식이 계승된 점을 살펴보면, 무위사 아미타 후불벽화와 유사한 키형 광배를 비롯해서, 통견의 가사 형태와 발목을 감싼 나뭇잎 모양의 초록색 털은 회암사 ‘약사삼존도’(156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며 그것과 같다. 이 잎사귀 모양의 표현은 17세기 석가모니 좌상에 흔히 사용되었으며 18세기 이후에는 그려진 보기가 많지 않다.
한편 이런 초기에서 계승된 형식과 함께 죽림사 괘불의 영향은 17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의 불화에 이어졌다. 특히 17세기 군상의 ‘영산회상도’의 주존좌상으로 이어지는데, 그 동일한 자세와 형상미는 보살사, 안심사, 영수암, 화엄사의 ‘영상회상도’에 잘 구현되어 있다. 키형 광배, 법의 형태, 상호와 수인의 표정, 발목의 혈, 초록색의 수염과 눈섭 표현 등 세부묘사가 그러하다. 전체적으로로 후대에 오면서 형태나 색감의 중후한 맛보다는 좀더 장식적이면서 채색이 짙고 선명하고 화려해진다. 이렇게 형성된 양식적 전형을 기반으로 조선 후기 18세기 탱화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상의 죽림사 괘불은 네 장의 한지를 겹치고 윗면의 비단과의 사이에 □형태의 테두리를 하여 배접하였다. 상하단에는 둥그런 막대를 끼워 말아감기 쉽게 했다. 비단은 가로 방향으로 여섯폭을 이어서 감침질 하였다. 이 괘불은 화면만의 크기는 길이 434cm, 너비 242cm이나, 모서리 여백까지 포함한 실제의 크기는 최대 길이 510cm, 너비 263cm이다.
죽림사에 소장된 괘불은 현재 극락보전 왼편에 위치한 청향각淸香閣 옷칠이 두텁게 발라져 있는 은행나무함에 모셔져 있다. 그 함에서 괘불을 들어낼 때 사용하는 도구들과 괘불 복장낭 한 개를 확인하였다. 복장낭은 오곡과 약재가 행엽형杏葉形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어 습기와 미생물의 오염을 막을 수 있게 하는 방습, 방충효과를 위해 탱화(괘불) 제작시 필수적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다.

금년 초파일에도 괘불은 목합속에 잠자
죽림사는 무등산의 서남쪽에 있는 해발 283.8m의 얕으막한 중봉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풍림리 산 1번지에 속하며 나주 평야에 인접한 곳이다. 「朝鮮寺刹史料」에 실려있는 ‘竹林寺記’‘中奉山竹林寺事蹟’을 보면 죽림사는 신라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한다. 戊振(1868) 오월에 태곡산인笞谷散人 진찰晉札이 판각한 두 기록에서는 아도와 묵호자墨胡子를 동일인시하는 서술 태도를 보이는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아도阿道 관계 기사와도 그 기본 줄거리가 유사하다. 「삼국유사」‘아도기아阿道基羅’조條에서 언급한 ‘본비本碑’의 내용과 매우 홉사하여 주목되나 죽림사에 주석하던 승 진찰晉札이 도리사桃利寺를 찾아가 그 사찰의 소장문헌을 섭렵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죽림사를 영남 도리사와 같은 명찰名刹로 부상시키려는 현실적인 의도가 다분히 배어 있다. 죽림사는 사적기의 유래가 갖는 의미인 만큼이나 인도의 초대사원인 죽림정사에서 따온 절 이름이다. 죽림정사는 중인도 마가다국 최초의 사원으로 인도 오대 정사의 하나이며 석가 교단의 기초를 다진 승단의 시초로 손꼽히기도 한다.
현재 죽림사에는 괘불 말고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유물에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92호로 지정된 대웅전(현재는 극락보전)에 18세기 후불탱화 한 점이 봉안되어 있다. 그 앞에는 같은 연대이면서 새로 개금한 목불 좌상이 있고, 이 대웅전 내부에는 벽면과 목조에 칠해진 단청과 벽화의 보존이 양호한 편이다. 또한 정방형 육면체 탑신에 옥개석이 얹혀진 방형의 월하당月河堂 부도를 비롯해서 다섯 기의 부도가 있다. 그밖에 대형 연자방아와 마멸이 심한 고려 시대 석불 좌상도 죽림사의 사력寺歷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1983년에 대웅전을 수리할 때 발견된 사리 열여섯 과와 청동불두는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참으로 안타깝다.
극락보전(1983년 이전에는 대웅전임)의 주존불은 안치된 방향이 보통의 경우와 다르다. 대개의 경우 주존불이 법당 문을 열면 바로 맞은편에 자리하는 횡 방향이나, 죽림사에는 왼쪽측면, 즉 종 방향으로 봉안되어 있다. 이러한 예는 영광 불갑사와 영주부석사 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극락보전의 후불탱화는 제작 연대와 조성처를 기록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찢어 버려 아쉽다. 대선사 학헌學憲 각행覺行 비구가 증명하였고 필영弼英, 이한怡漢, 숙조寂照 비구 외 3인이 금어金魚로 참여하였다. 시주자는 부분적으로만 남아있으나 잘 알 수 없고, 당시 주지 소임을 맡은 이는 신한信閔 비구였다. 삼베 바탕에 청홍색조가 주로 사용된 이 후불탱화는 석가모니의 영산회상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항마촉지인簡摩觸地印의 수인手印과 편단우견便袒右肩의 가장袈裝 착의법着衣去, 정상 계주와 큼직한 옥계, 나발, 길상좌를 한 석가모니 조상과 주변의 군상 구성, 그리고 색채 감각은 18세기 불화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크기는 길이 264cm이며 너비 173cm이다. 또한 죽림사에는 1917년에 제작된 지장탱화가 괘불과 함께 보관되어 있는데, 괘불과 후불탱화가 일제 시기 지장불사 때 옮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중봉산 자락에 너른 들판을 끼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면서도 현재의 죽림사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트인 마당의 축대 위에 극락전과 요사채만이 댕그라니 남은 썰렁한 분위기의 죽림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석가모니 괘불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금년의 부처님 오신날 역시 야단법석할 엄두를 못낸 채 지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