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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서禪書를 읽자(3)―「마조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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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해설 - 신규탁 1993년 06월 136호
Ⅰ
혜능스님에 이어 이번에는 마조도일馬祖道一스님(709∼788)에 관한 선서를 읽어 보도록 하자. 마조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책 속에서 전해지고 있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선림고경총서11 마조록·백장록」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고, 「마조의 어록」(고려원, 박용길역), 그리고 「한글대장경-경덕전등록」,「한글대장경-조당집」의 마조조馬祖條를 들 수 있다.
마조스님은 남악 회양南嶽懷讓(677∼744)스님의 법을 이었는데, 이 남악스님은 바로 선문의 슈퍼스타 혜능스님의 상수上首 제자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남악스님은 혜능스님을 만나기 전에 숭악 혜인崇岳慧安(582∼709)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혜능스님과의 관계를 중시한 당시의 교단에서는 이 면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것은 마조스님 내지는 마조 이후의 그 후계자들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인데, 역사적 사실은 아닐지라도 사상사적 사실이므로 버려서는 안 된다. 이는 당시 교단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런 당시의 의식 속에서 마조스님의 정맥은 백장, 황벽, 임제스님을 거쳐 임제종으로 형성되기에 이른다.

Ⅱ
「마조록」은 행록行錄, 시중示衆, 감변勘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행록은 이 스님의 특징적인 이력을 소개한 부분이고, 시중은 대중스님을 상대로 한 설법이고, 그리고 감변은 수행자를 상대로 한 짤막한 대화들이다.
행록을 보면 대개 스님의 내력을 알 수 있다. 마조스님의 행록에는 유명한 ‘벽돌이야기’가 있어 이 집안의 가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악 회양스님과 마조스님이 처음 대면할 때의 일이다. 돠선을 하는 마조를 보고 “무엇하느냐?”는 회양스님의 질문에 “부처가 되려 합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악스님이 벽돌을 집어들어 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조스님쪽에서 묻기를 “무엇하십니까?” 하자, 희양스님 왈 “거울을 만들려 하네”했다. 이렇게 첫 대면이 시작되어, 가르침을 받고 마음이 활짝 열렸던 사건이 있다.
그 뒤 마조스님은 남악스님의 슬하를 떠나 홍주洪州로 가서 그곳 개원사開元寺 주지를 했다. 회양스님은 마조스님이 강서 지방에서 교화를 널리 편다는 소문을 듣고 대중에게 물었다.
“도일道一이 대중에게 설법을 하느냐?”
대중들이 대답했다.
“벌써 하고있습니다?”
회양스님은 말했다.
“도대체 (그쪽)소식을 전해 오는 사람이 없구나?”
그래서 스님 한 명을 그곳으로 보내며 말했다.
“그가 상당上堂하였을 때 ‘(요즈음 지내시기가) 어떻습니까?’ 하고만 묻게 , 그리고 무슨 말을 하거든 기억해 오게.
그 스님은 분부대로 가서 물었다. 마조스님이 대답했다.
“난리통 삼 십 년에 소금과 장은 줄여본 적이 없다.”
그 스님이 돌아와 회양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회양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 문장의 밑줄 친 부분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간다. 이 이야기는 「한글대장경-경덕전등록」(196쪽197쪽)에도 나온다. 그곳에서는 ‘난리를 겪은 지 삼십 년 동안 한번도 염장 먹는일을 폐지 한 적이 없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래도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원문을 보면 “自從胡亂後, 三十年少鹽醬”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胡亂’을 ‘난리’로, 해석한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말은 당대唐代의 속어로서 ‘멋대로’라는 뜻이다. 이 대화에는 앞의 ‘벽돌’이야기가 바탕에 깔려 있다.
곧 ‘胡亂’이란 바로 회양스님이 지적한 좌선해서 부처가 되려는 ‘멋대로 된 수행’, ‘엉터리 수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삼십 년은 수행에 필요한 기본 년 수로 세간의 한 세대에 해당하니 평생 정도로 번역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생활 필수품으로 땔나무, 쌀, 기름, 소금, 장, 식초, 차등의 일곱 가지를 들고 있는데, ‘鹽醬’은 바로 그 생활필수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엉터리 수행하다가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아 마음에 활짝 열리고 난) 뒤로 평생 먹을 것 줄이지 않고 살았습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아무튼 필자는 이렇게 읽었다. 이는 스승에 대한 감사의 정이 깃 든 말이다. 오래 전에 시집간 딸이 사람을 통해, ‘길러 주신 덕분에 굶지 않고 살아요’하고 친정에 전하는 말이다. 부자로 잘살면서도, 이 겸손한 표현에 말하는 이의 사람 됨됨이도 물신 풍기고 있다. 선서에는 스승과 제자사이의 은혜로운 말들이 참 많다. 천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Ⅲ
시중은 이렇게 시작된다.

汝等諸人 名信自心是佛 此心卽佛.
여러분, 각각 자기의 마음이 부처이며 이 마음이 부처임을 믿으시오.

이는 혜능스님도 누누히 강조하는 말로 선문의 근본 입장이다. 이것은 대매법상大梅法常(752∼839)스님이 처음 마조스님을 뵙고, “부처란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마조스님의 대답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 대답은「경덕전등록」에는 ‘卽心是佛’라고 기록했고, 「조당집」에서는 ‘卽汝心是’이라고 했고, 「사기어록」에서는 ‘卽心卽佛’이라했다. 내용만 말하자면 “마음이 부처이다” 인데, 그 생생한 뉴앙스는 역시「조당집」이 단연 으뜸이다.
문장의 의미하는 내용은 늘 그 표현 양식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문자로 정착시키는가는 문학뿐만 아니라, 선서 해독에서도 매우 중요하다.「조당집」의 표현이 좀더 노골적이다. ‘卽汝心是’, 곧 이렇게 내 앞에서 질문하는 바로 너, 그 너의 마음이 부처이다. 라고 했다. 「조당집」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같은 등사燈史로서 비록 「전등록」이, 「조당집」보다는 문장은 매끄럽지만, 생생한 대화들이 심할 정도로 개념화 내지는 일반화 또는 관념화되어 있다. 「조당집」은 그 진솔함이 그대로 문장으로 정착되어, 천 년의 세월도 그 감동을 가로막지 않는다. 윗 부분만 보더라도 그렇다. 「전등록」의 언어는 심心이라는 개념이 앞서 있다. 유생儒生 양억楊億의 손을 거친「전등록」은 아무래도 맛이 없다. 이는「구당서」의 진솔함이 「신당서」에서는 이념화되고 대의 명분에 가려 읽는 이로 하여금 껄끄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관념화시키기를 좋아하는 유생의 손을 거쳐서 된 「전등록」이나 「신당서」는, 생생함이라는 면에서 「조당집」과 「구당서」와는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구체적인 각자의 마음이 부처라는 마조선의 맥박은 수행에 대한 입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어찌해야 도를 깨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마조스님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僧問, 如何是修道. 曰, 道不屬修. 若言修得, 修成還壤, 卽同聲門. 若言不修, 卽同凡夫.
어떤 스님이 “도를 닦는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대답 왈, 도는(수행한다느니 또는 안 한다느니 하는)그 수修의 범주에 속하는 게다. 만약 도를 닦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도는 완성되고 나면 다시 파괴되기 마련이니 성문聲問과 다를 게 없다. (반면에 도는) 수행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결국은 범부이다.”

여기에서 道不屬修’는 잘못 읽으면 수행의 부정으로 오독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규봉 종밀스님이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마조스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문장은 수修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수修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悟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근기가 좋은 사람은 선지식의 가르침을 듣고는 얼른 알아차려, 수행의 결과로 얻는 지위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본성本性을 돈오頓悟한다고 한다.
도道와 수修에 대한 문제에 대해 마조스님의 설법은 계속된다.

道不用修, 但莫汚染. 何謂汚染. 但有生死心, 造作趣向, 皆是汚染. 若欲會其道, 平常心是道. 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
도는 닦아서 되는게 아니다.다만 더러움에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물든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만약생生하느니 사死하느니 하는 생각이 있어, 무언가를 해 보려고 한다든지 의도함이 있으면 이것이 더러움에 물드는 것이다. (만일 거두절미하고) 도를 만나려면 일상에 늘 쓰는마음이 도이다. (내가 말한) 일상에 늘 쓰는 마음이란 무엇인고 하니, 무엇인지를 해야겠다는 의도를 내지 말고, 가치 평가를 하지 말고, 마음에 드니 안드니 따지지 말고, 단견斷見이 나 상견常見을 갖지 말고,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평상심平常心을 절대화 내지는 일반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무전제로서의 우리의 멀쩡한 마음이다. 이것은 평상심을 설명하는 마조스님 자신의 말속에서 증명되는 것이다. 곧, 조작취향造作趣向(괜히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는 마음이다.
멀쩡한 눈에는 공화空花(갑자기 현기증 등이 날 때에 보이는 반짝거리는 허상)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멀쩡한 눈으로 더 잘 보려고 괜한 기력을 쓰다 보면 공화가 보인다고 한다. 「능염경」의 이 말씀이 바로 평상심에서 일탈되는 우리들의 조작취향造作趣向을 경계하시는 말씀일 것이다. 저 유명한 “본래가 청정하거늘 어찌 산하대지가 생겼냐本然淸淨, 云何忽生山河大地”는 강사스님의 질문에, “어찌 산하대지가 홀연히 생겼습니까?”하고 맞받아치는 선사스님의 심정을 독자들은 어떻게 읽으실까?

Ⅳ
보기를 들어 보자. 어떤 고교생이 학교에서 제 집으로 돌아왔지만, 괜히 이곳이 제 집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제 엄마를 보아도 남의 엄마 같고, 날마다 출입하던 제 방도 남의 방으로 여겨져, 마침내는 제 집을 찾으러 나섰다고 하자. 이리 저리 궁리하면 할수록 제 집 찾는 일은 멀어지기만 한다. 즉 조작취항造作趣向하면 할수록 제 집은 멀어진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이 사람아 여기가 바로 자네 집이네”라고 하는 말끝에 단박에 알아차리면, 만사 요케이다. 그 다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멀쩡한 마음으로 주인 노릇하고 살면 된다. 그러나, 이게 사실 어렵다.
단적으로 말하면 돈오頓悟해서 무심無心히 불행佛行을 하면 될 것이다. 「마조록」의 문장을 통해서, 이론적으로 핵심을 추려 보면 마조스님의 기본 입장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