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최측을 포함한 모든 참가지들이 참가 횟수에 관계없이 모두 나름대로의 동사섭 관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이 정도면 객관적이지 않을까’하는 주관적인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동사섭’ 이름이 동사섭이다. 오박육일의 일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종의 Training Group운동이다. Encounter운동의 영향을 받은 심성 개발프로그램에 일정한 근거를 두고 출발하여 끊임없이 정견의 눈으로 궁구하고 궁구하여 발전 성숙, 오늘에 이르렀다. 올해에 들어 백 회를 넘었고 햇수로는 십 년 넘었다. 전주 근교의 국신사에 주하시는 용타스님과 몇 분의 돕는 이들이 일구어 온 새로운 문화 흐름이요 활活불교적 공부 운동이다.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공동체운동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공동체운동이 이상이나 신념을 함께 한 이들이 조직을 만들어 경제나 문화 등 생활 전반을 같이하는 지역공동체의 성격을 갖는다면 동사섭운동은 특정한 조직이나 지역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적 토대를 기초로 히는 것이 일반의 공동체의 형태라면 동사섭은 고정되고 보수화된 관념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이 정견의 눈으로 함께 하고자 하는 운동이기에 넓은 의미의 공동체로서 깊은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오박 육일의 동사섭 장場은 크게 두 장으로 나뉘어진다. 초반 부분은 마음 나눔의 장이요 후반 부분은 마음 관리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 나눔의 장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것은 지, 정, 의에서 정(가슴) 부분이며, 마음 관리 장에서 다루어지는 부분은 지(머리) 부분이다.
마음 나눔의 장에서 주된 촛점은 가슴(감정)이다. 즉, 심정 교류이다. 동사섭 현장 내에서 서로가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꾸준한 관심을 의지적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기울이면서 처해지는 상황마다 일어나는 심정(감정, 욕구)을 교류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심이란 더불어 하는 이가 어떠한 마음 상태일까? 마음 기울여 함께 하고픔이요, 나아가 기원하고 축복함이요, 찬사하고 찬탄함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전 인격이 되어 줌이다. 끝내는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우주적으로 확산해 일화一和의 상태로 나아감이다.
동사섭 현장내에서는 상대방이 어떠한 마음 상태인가로 시작되는 궁금 상태에서 출발하여 관심이 깊어짐에 따라서 상대에게 예배하고 안부를 묻고, 기원하고, 감사 드리며, 찬란하면서 일화의 상태로 나아가는 구체적 행위들이 있다. 이러한 관심의 대 지평 위에서 모두가 모두의 이 때 이 자리의 정서(감정)를 함께 교류, 체험하는 것이다.
그 구조랄까, 원리는 간단하다. 자신의 가슴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표현을 이해 공감하여 반응하는 것이다.
보기를 들면 그 말씀을 들으니 기쁩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충분히 화가 날만하네요. 이해됩니다 등등... 그런데 이 반응도 표현에 속하므로 보여지는 모습으론 말하고 듣고가 전부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 인간관계가 말하는것, 듣는것 이 두가지로 이루어져있다 하겠다. 동사섭 현장내에서는 말하고 듣고를 관심과 표현, 공감, 관용으로 구분하여 이 사대 구조의 자연스런 이해와 필요성의 자각을 거치면서 역할을 실습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은 모두 자연스런 흐름 위에서 스스로 체험되어진다.
우리가 평상시에 끊임없이 말하고 들으면서 인간 관계를 맺어 나가지만 무엇을 어떻게 제대로 표현하고 듣는가에 대한 관심과 시각 부족으로 생기는 숱한 갈등, 오해, 삭막함을 이 동사섭 현장내 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풀어 나가는 것이다.
스스로 의식의 흐름을 낱낱이 포착하여 낱낱의 의식(감정 포함)에 매임 없이 하나의 흘러가는 현상임을 자각하고 객관화하여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상대방의 표정이나 행동, 말을 적극적으로 읽고 그 속에 담긴 의미나 감정을 포착하여 그것에 알맞은 반응을 보인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더욱 깊게 관심해 나간다.
아마도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 간단한 구조 속에서 전개되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다. 지금 그가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을 나의 생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또 지금의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의 가슴을 뿌듯하게 하며 활동의 자유를 얻게 하여 변화하고 성장하여 무한한 내부의 능력을 자각, 발휘하게끔 한다.
많은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모모님” 하고 부름을 받는 찰라 마음이 부르는 자의 가슴속으로 쑥 들어가는 재미. 그리하여 나의 감정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통한 사랑과 해탈을 체험하게 된다.
일회적이고 일시적이라 할 수 있는 흘러 변해 가는 감정에 매임 없이 내보임에 자유롭고 상대방의 어떠한 말이라도 적극적으로 경청하며 이해, 공감을 통한 하나됨의 체험, 여기에서 이루어져 가는 마당들은 실험실 안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현 사회에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하나의 이상 사회의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가족 공동체를 비롯한 어떠한 공동체 안에서도 이러한 원리를 기초로 하여 실천해 나간다면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더욱 깊은 성숙, 빠른 발전을 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Ⅱ
이제부터 후반부의 마음관리의 장을 알아 보자. 마음 관리의 장에서 수련 하는 것은 한마디로 정견正見의 구체적인 체득體得이다. 전반부에서는 가슴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면 이 마음 관리 부분에서는 바른 견해의 중요성이 이야기되며 이를 체득하기 위한 관행(명상)이 함께 행해진다.
먼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긍정과 명상을 통해 일체 만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열어 간다. “구나, 겠지, 감사”(∼하는구나, 여차 여차한 이유가 있겠지, 그래도 그만하니 감사하다)의 집중적 실습을 통해 즉卽한 순간 깨어 있을 수 있는 힘을 기른다. 일어난 현상을 한 생각 일찍 잡음 없이 단지 그냥 그대로 바라보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보기를 들면(한방 때리는구나, 여차 여차한 이유가 있겠지, 그래도 두 방 때리지 않으니 감사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이쪽 가슴이 흔들리는 상황마다 이 “구나”, “겠지”, “감사“를 적용시켜 보면 놀라울 정도의 경계를 수용하는 힘이 생겨나 곧, 웬만한 경계엔 흔들리지 않는 가슴을 가지게 된다. 이 “구나”를 통해 내 마음은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겠지”를 통해 인간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세상에 수용 못할 일이 없어지며 “감사”를 통해 이 우주 만물이 어느 순간 감사 덩어리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감사” 부분은 “세상 만사 내게서 나가 내게로 돌아온다”는 인과의 법칙으로 상황 상황을 비추어 보면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쉬 가슴에 와 닿는다.
언제, 어디선가 제가 뿌린 씨앗을 이렇게 거두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선께서 거울이 되어 제 모습 비추어 완전한 본디 모습을 들어낼 수 있게 하여 감사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거부함이 없이 “예”하고 받아들이며 다음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이 “구나, 겠지, 감사”는 멋진 사다리가 된다.
주어진 상황에 “예” 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만큼의 자기 아집을 바라보게 하며 그 순간 “잡고 있음”을 놓게 하는 멋진 사다리로 “사슬이라고 아는 순간, 끊어라”는 멋진 사슬 끊기 명상이 동사섭 현장 내에서 다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사슬 끊기 명상 주제는 다채롭게 시설될 수 있다. “00할 수 있는가?” 어떠한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지금 여기서 죽을 수 있는가? 가족을 떠나 아프리카오지에서 평생을 살수 있는가? 저 거지를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무조건 “예” 하며 살 수 있는가?
실제로 해보자. 기꺼이 “예”할 수 없는 이유들을 바라보자. 자유로움을 막고 있는 스스로 만든 사슬들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끊음의 논리를 명상해 보자. 막연히 언젠가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머리 속의 자유로움에서 벗어나 실제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진짜 나를 볼 일이다.
이러한 명상기법을 통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 메고 있는 사슬을 바라보고 끊어 봄으로써 느껴지는 자유로움을 통해 ‘이러한 것이 구체적인 공부이구나’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예”하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는 그 매임들을 지금 놓을 일이다. 긍정의 바탕 위에 “구나, 겠지, 감사’하고 사슬이라고 아는 순간 끊어버리는 과정을 통해 끝내 우리에게 남는 마지막 질문은 이러한 것을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이다.
“나는 누구입니까?” 화두식으로 끊임없이 물어 봄으로써 의심을 불러일으켜 큰 의문 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방법도 있지만 여기서 하는 것은 나 아닌 것들을 낱낱이 놓아 가는 명상법이다. 우선 나로부터 가장 벌어 보이는 듯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동일시하고 있는 것들, 곧 환경,-가족, 돈, 권력, 명예 등을 명상 속에서 뚜렷하게 관하여 놓아 가는 것이다. 가족-가족은 가족일 뿐 내가 아니다. 돈-돈이 나일 순 없다.
몸은 어떠한가 정자 한 마리, 난자 한 마리로 이루어진 몸은 어떠한가. 내일 모레면 한줌 흙으로 변할 이 몸은 나인가 아닌가. 생각은 어떠한가. 감정은 또 어떠한가. 저절로 일어났다 저절로 꺼져 가는 구름 같은 생각, 감정은 나인가 아닌가. 이와같이 나 아닌 것을 낱낱이 부정하다 보면 현전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겠는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자유로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듯한 충만한 생명력…
이러한 동사섭 전 과정을 통해 생각되는 것을 한 마디로 한다면 구체성이다. 머리 속의 삶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실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념적이며 미래지향적인 현 종교의 흐름에 비추어 본다면 마땅히 일어나야 할 바람직한 운동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동사섭의 전 과정이 지식체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의 장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특히 전반부의 마음 나눔의 장은 그 원리나 방법은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 흐름이 어떠한 양상을 띄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직접 참석하여 체험할 일이다.
구체적인 삶으로서의 동사섭 실현지實現地를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