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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공동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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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채수일 1993년 06월 136호
공동체운동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혈연 중심의 씨족 공동체에서 부족이나 민족, 또는 국가공동체, 혹은 종교, 이념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공동체 운동이 있었고, 지금도 이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공동체운동은 그 공동체를 규정하는 내적 혹은 외적 조건과 목적 의식에 의해 서로 다르게 발전되어 왔으나,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될 수 있다.
그 유형의 하나는 ‘묵시문학적 위기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유형의 운동은 현실에 대한 절망에서 출발한다. 현재의 세계는 전체적으로 타락했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는 인식이 바닥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옛 세계 질서로부터의 과격한 단절과 새로운 세계의 개벽을 통하여 성취된다고 이들은 확신한다. 이런 신념은 공동체를 혁명적 변혁운동으로 인도한다. 유대교 묵시문학, 토마스 믠처의 종교개혁 급진파운동, 동학농민운동 등이 이 유형에 속할 수 있다.
다른 유형은 이른바 ‘유토피아유형’이다. 세계를 타락한 현실로 본디는 점에서 묵시문학적 유형’과 비슷하다. 그러나 ‘유토피아 유형’의 공동체운동은 구원을 역사적 파국과 세계 질서의 혁명적인 변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은 세계를 초월한 어떤 순수한 영역을 향한 내적인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혁명적 행동보다는 자발적인 금욕의 실천, 청빈, 비폭력을 지향한다. 이들은 구조적 변화에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현체제의 밖에서 폐쇄적인 엘리트 공동체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엣세네공동체, 수도원운동 등 종교적 동기에 의해 조직된 공동체들이 이 유형에 속할 수 있다.
또 다른 유형은 ‘진보론적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역사가 파국적 종말을 향하여 나간다고 보지 않고, 긴 진화의 과정을 걷는다고 믿는다. 세계의 악은 존재하지만, 결국 선이 원칙적으로 승리한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세계를 부정하거나 세계로부터 도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세계의 점진적 변화를 지향하고 인간성을 신뢰한다. 이들은 그들을 사로잡은 희망이 공동체적 삶 안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경험된다고 본다.

Ⅱ
공동체운동들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하다. ‘묵시문학적 위기 유형’의 공동체운동은 비록 부분적으로 체제 변혁을 성취했지만, 그 전체주의적 성격과 폭력성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 ‘유토피아 유형’은 문명에 대한 지나치게 소박한 이해와 원역사(낙원) 지향적인 폐쇄성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진보론적 유형’은 체제의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들로부터 개량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리고 역사는 대부분의 공동체운동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공동체운동의 위기는 운동의 이념과 현실 사이의 갈등에서 언제나 관철되는 현실적 조건, 조직의 경직성, 경제적 어려움, 지도력과 인간 관계의 문제, 창립자사후의 분열 번식이나 소멸 등이 지적될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복잡한 기술 과학 문명 시대는 공동체운동의 현실 적합성을 회의적으로 보게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공동체운동이 대부분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수의 사림들에 의해서, 또 종교적 경험이나 신념에 기초하여 전개된다는 페쇄성과 한계 때문에 공동체운동이 구조적 변혁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운동에 대한 평가는 그들의 역사안에서의 성패 여부(존속 기간, 규모, 영향력 동)에 따라서만 결정될 수 없다. 그 까닭은 이들이 공동체운동 자체를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운동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눈에 보이는 결과반으로 평가받는 것을 이들 자신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Ⅲ
그렇다면 공동체운동은 과연 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우리 시대를 전환기라고 말한다. 전환기는 시대 변화의 엄청나게 빠른 속도와 그 변화의 질적 차이, 곧 전통적인 사고와 습관으로는 그 변화에 대응할 수 없는 현실을 의미한다. 우리 시대가 전환기라고 말하는 또 따른 이유는 이런 급격한 변화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환기는 언제나 위기 의식과 관계된다. 역사상의 어떤 전환기도 역사의 양적, 질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은 전환기는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전환기 역시 세계적인 위기를 수반하고 있다. 위협받는 지구환경, 인구의 폭발과 경작지의 사막화, 진화되어 가는 기아와 빈곤의 실업, 새로운 민족주의 대두와 민족 갈등, 종교적 근본주의, 세계 경제 질서의 삼극 체제로의 재편과 예상되는 경제 전쟁(차가운 평화), 기술 과학의 가능성과 한계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전환기의 위기의 뿌리에는 ‘발전 자체를 위한 발전’, ‘성장 자체를 위한 성장’의 추구를 정당화해 온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또 성장과 발전을 위해 지구의 미래와 다른 민족의 생존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나라의 이익만을 추구해 온 분열된 세계, 특히 선진 산업국가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전환기의 위기가 극복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새로운 경제 질서의 모색과 계속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대안은 지금도 이른바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구 인구 5분의 3의 구조적 희생과 자연의 파괴를 댓가로 치루어야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많은 문명 비판가들은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질적 변화만이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이 스스로 개인적 자유와 욕망 충족의 욕구를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높아진 생활수준, 소비형태, 확대된 욕망을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낮추고 절제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적 자유시장 경제 체제 안에서 자유와 욕망의 절제 요구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또 절제해야 할 것도 없는, 생존권마저 박탈당한 가난한 민중은 “배부른 뒤에야 도덕이 온다” 는 브레히트의 지적대로, 환경과 관련된 전환기 위기론의 계급성을 폭로한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은 자발적으로 절제를 배울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인간을 각성시켜 공동의 대응을 모색하도록 강요한 것은 지구적 차원에서의 대 파국이었다. 인도 보필시의 가스 폭발, 체르노빌 원전 사고, 오존층의 파괴, 페르시아만 전쟁, 유조선의 난파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 인간을 각성시키기 위해 그런 대 재난이 계속 일어나야 한단 말일까? 눈에 띄게, 그리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파멸이 지극히 가까이 오고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의 치유적 효과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려움해서 가 아니라, 적극적인 결단에 의해 인간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 전환기의 위기를 정신적 테러의 수단으로 삼아 사람을 협박하거나 현혹시킨 ‘휴거파 종말론자’들 과는 달리, 전환기의 위기를 더욱 인간적인 세계의 창조와 생존 능력이 있는 미래의 인류 공동체 모색의 가능성으로 볼 수는 없을까?


Ⅳ
나는 공동체운동이 새로운 문명 모델의 모색에 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공동체운동을 통하여 인간이 자유와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인류를 지배해 온 성장의 종국에서 우리는 부르주아적 자유를 재고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명제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의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물질적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개인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실험이 공동체운동에서 실천된다는 점에서 공동체운동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공동체운동은 무한한 소유와 소비를 인간의 존재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지 않는다. 자발적인 청빈, 낮은 소득과 높은 삶의 질, 노동과 영성의 일치 모색, 자연으로의 귀환, 참여민주주의 원칙 등은 지금까지 인류와 다수를 지배해 온 문명과 구별된다. 시장 경제가 생산력의 향상과 물질적 풍요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시장 경제의 물신 숭배적 성격은 인간의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고 계급 갈등을 조장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오직 신분과 권력을 증명하는 데 기여하는 물질적 소유는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이해와 나눔의 기쁨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나뉘어진 고난은 인간을 단결시키고, 나뉘어진 밥은 모두를 배부르게 한다”는 것은 공동체운동의 기본신념이다.
그러나 공동체운동이 새로운 문명 모델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인류가 직면한 전환기적 위기가 구조적이고 지구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운동은 현실을 다분히 낭만적으로 파악하는 시대 역행적인 운동이며, 구조적 개혁을 이루기에는 지나치게 지역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아무런 체제 대안이나 이념이 아직까지 없다는 데 있다. 또한 개인과 집단, 지역과 세계, 개인의 삶과 구조사이의 이원론적 구별은 자기 정당화의 도구일 뿐, 엄격하게 말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느 시대에서든지 공동체운동은 언제나 인간성에 대한 실험이었다. 시대상황을 위기로 받아들이고,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고 실천하려는 이들에게 공동체운동은 오늘도 여전히 실험적 대안 운동이다. 공동체운동은 역사의 미래가 책임감 있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런 확신은 지구적인 사고와 지역적인 실천을 결합한 공동체운동으로 구체화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