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늉과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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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진각
1993년 06월 136호
영국의 런던 시내에 있는 그리니치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본초 차오선이라고 하는데, 여기를 기준으로 해서 시간이 결정되는 경도가 동경과 서경으로 나뉜다.
기계 문명이 발달한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을 서양이라 하고 정신 문화가 발달한 아시아권을 통상 동양이라 한다. 동양 사람과 서양 사람은 신체적 조건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의 의식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와 많은 차이가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계문명의 합리적 과학을 앞세운 서양 문화는 이 땅에서도 단연 위력을 발휘했다. 미국은 약간의 군정 기간과 서쪽 문물의 신봉자인 이승만을 통해서, 일본 사람들이 삼십육 년 동안 바꾸어 보려 해도 바꾸지 못한 민족 문화를 미신과 고루한 것으로 매도하여 뭉턱뭉턱 한묶음으로 밀어 냈다. 결국 자연과 인간의 순환적 관계를 중요시해 온 우리문화는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기만 하는 일차적 관계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일어난 육이오 전쟁은 우리 모두를 정신과 육체, 물질적으로 더욱 더 피폐하게 해서 깡통문화로 일컬어지는 즉석 문화에 휩쓸리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서양의 문화가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서 들어오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국민 생활에 막대한 후유증을 남길 말초 문화가 미군 막사를 통해서 여과 없이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자유당 시대의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지금 무엇을 안겨 주고 있으며, 공화당 시대의 새마을운동은 우리의 농촌 경제를 어떻게 변모시켰으며, 가정의례 준칙이라는 것은 우리의 결혼 관습을 한꺼번에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이렇듯 국민 경제와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화 개조 작업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 왔는가.
신생아에게 모유 대신 소젖을 먹인다거나, 국가를 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가 되는 가정 대신 사회에 뛰어들어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직장생활을 해야만이 페미니스트인 양 의기양양해 하는 것이 요즈음 세태이다. 그러나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여성으로서 맡겨진 소임을 충실하게 해내 자손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튼튼하게 해서 나라의 곳곳에서 톱니바퀴 돌아가듯 하게 하는 사람이며. 이것이야말로 여성의 특권이 아닌가 싶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저급한 차원의 경제적 잘살기 운동과 물량주의적 경제 성장 촉진 정책은 물질 숭상의 가치관만을 양산시켜 상층부의 졸부들만을 키워 놓고 거드름 피우게 만들었다. 국민 문화에 대한 비전이 없이 수단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경쟁하도록 해서 피라미드형 약육 강식의 정서만 키워 놓았다. 너와 내가 서로 도와서 정당하게 벌고 쓰는 범절을 익히기 전에 찾아든 기회마다 눈앞의 이익으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에 곳곳에서 졸부 현상을 빚고 부패와 퇴폐 문화를 쫓게 되었다. 물질적 풍요의 터전에서 문화의 빈곤과 피난민 세대의 쫓기는 심리는 남보다 더 잘 살아남기 위해서 거대한 먹이 사슬의 국가적인 부패를 형성시켰다.
육십 년 이후의 잘살기 위한 탁상 행정이 추구한 경제 성장주의는 부패의 기름진 터전을 본격적으로 넓혀 주었던 것이다.
어느 곳에 가치 기준을 매기는지의 여부에 따라 국가의 흥망 성쇠까지도 이토록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동양인들은 문화유적을 자연이 최대한 존중되면서 슬기롭게 보존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우리 선조들은 팔만대장경을 콜라 한 잔 하고 글 한 자 파고, 커피 한 잔 훌쩍하고 글 하나 새기고 하면서 조성하지는 않았다. 그런 인스탄트 문화가 그 당시 들어왔었다면 만드는 데 많은 인내심이 필요한 팔만대장경은 이 땅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음식 문화는 인공적인 것은 사용치 않은 점이 특색이고 최대한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고 거기에 맞게 음식을 조리했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우리는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화 민족이다. 눈에 보이는 형이하학적인 측면보다 보이지 않은 정신적인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자연과 조화롭게 더불어서 살아온 것이다.
우리 이제 편리함만 쫓아 멀리했던 전통문화, 인내심을 필요로 하지만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유익함을 주는 우리 문화를 쉬운것부터 하나씩 찾아가자.
식사 후에 서양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고 우리는 숭늉을 마신다.
우리 것이 바로 세계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