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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성거사 원효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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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김남선 1993년 06월 136호
복정거사
일체무애인
화쟁국사
구룡
원효보살 원효성사
원효스님에게 이름지어진 호칭은 그 분의 다양한 삶만큼이나 많다. 모두 일맥 상통한 의미를 포함하는 호칭들이지만 여기서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는 이름의 원효스님을 주제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원효스님이 출가를 한 동기는 문헌에 명확하게 명기되어 있지 않아 당시 사회 상황을 중심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당시는 고구려 ,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성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각축전을 전개하던 시대이다. 전쟁터에서의 수많은 주검들을 보며 전쟁의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백성과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없는 신분제 사회를 바라보며 신라 말단 귀족 출신인 그는 그 시대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 싶다. 전쟁과 신분제 사회의 질곡을 헤쳐 가는 청년 원효의 고통은 컸을 터이고, 당시 새로이 유입된 불교사상은 이러한 고통에 해갈의 기쁨을 제공했으리라. 그는 마침내 “부처를 크게 빛나게 하리라”는 결심을 하고 이십구세의 나이로 출가 사문의 길을 가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 탄생시의 일성이 무엇이었던가?
“하늘과 땅 위에 나 훌로 존귀하네.
이 세상이 다 고통 속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라고 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청년 원효의 출가 원력은 부처님 출생의 의미에 비견되는 지중한 의미가 확인된다.
원효스님의 수행과 구법 행각은 당나라 유학을 떠나는 과정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절친한 도반 의상스님과 함께 머나먼 유학의 길에서 한밤중에 퍼마신 해골바가지의 물은 지금까지 원효를 무명 속에 있게 한 어둠을 단박에 밀어 내고 광명의 세계를 보게 한다.
이제 그가 돌아갈 곳이 어디인가. 부처의 제자라면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실현할 깨침을 얻기 위하여 세상을 나갔다가 세상속으로 다시 오시었다. 그리고 화택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십여 년의 세월을 가르침 없는 가르침을 베푸셨다.
진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설하시며 비틀어진 주관을 바로잡기 위해 십이 년에 걸쳐 아함경을 설하시고,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객관 세계를 바로 보게 하고자 반야경을 이십일 년 동안을 설하셨으며, 주관과 객관을 바로잡고 철학적으로 완성된 이치를 어떻게 사회 속에서 그리고 뭇 삶들의 생활 속에서 구현할 것인가 하는 법화경의 이치를 팔년 동안이나 설하셨다고 한다.
진리를 체달한 자가 있을 곳은 신중의 절이 아니라 뭇 삶들이 있는 곳이기에 그는 세존의 행과 같이 대중 곁으로 돌아왔다.

복성거사卜性居士로 사람들 속에 온 원효
원효스님이 초분 옆에서 깨달음을 얻어 경주 땅에 돌아온 뒤 그의 거처는 웅장한 절간이 아니었다. 술집에서 기생들과 놀기도 하고 도살장을 찾아가기도 하고 미치광이처럼 장터와 촌락을 두루 누비고 다닌다. 때로는 화엄경의 소疏를 지어 강의하고 또 산속에서 좌선을 하는 등 그의 행각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는 요석공주를 만나 불음행 계를 파하고 아래 가운데 더 이래인 인간이라 하여 자신을 복정거사라 일컬었다. 그리고 그는 승복을 벗어던지고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 대중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른바 파계’라고 말한 것은 이름이 파계지 본래 청정한 자리에서의 파계는 아니라고 보았음이요, 그가 오히려 한 지아비요 아버지가 된 것은 뭇 중생의 지아비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중생의 마음과 하나되기 위해선 그들의 피부를 파고들어 심장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당시 신라의 기득권자와 승려의 모습으로서는 물위의 기름이었을 것이다.
원효의 만행은 “보살은 오직 대비방편으로 모든 세간에 들어가 갖가지 형상으로 모습을 나투어 중생을 성불하도록 돕는다”는 화엄경에서 설한 세존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인 셈이다.
이러한 교화의 방편은 묘법연회경의 장자와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적절한 비유의 말씀이 된다. “돈이 많은 장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어릴 때 집을 나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유랑하는 몸이 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거지로 떠돌아다니다가 아버지 장자의 집에 이르렀다. 장자는 꿈에도 그리던 아들이 나타난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다가 집이 너무 호화 찬란해서 겁을 먹고 발길을 돌렸다. 장지는 아들을 급히 데려와라 하였지만 자기를 잡아다가 죽이려는 줄 알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와서는 공포심으로 기절해 버렸다. 이에 장자는 한 방편을 생각하였으니 이들과 비슷한 두명의 하인을 시켜 장자의 집에서 그 아들이 할 수 있는 똥 푸는 일부터 시작하게 하였고 자신도 비슷한 행색으로 아들에게 접근하여 말도 불이면서, 점차 아들의 공포증을 제거하고 마침내 장자의 아들로서 모든 가재家財를 맡도록 하였다.
원효 역시 바로 이 같은 방편으로 부처의 아들인 백성에게 무리 없이 다가 그들 자신이 누구임을 깨우쳐 주어 행복을 찾도록 한 것이다. 복성거사의 만행은 일체 중생이 제불의 본원에 안주해 있음에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중생들에게 원래의 그들 자리로 돌아가도록 힘이 되기 위한 그의 실천행 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원효스님의 실천행은 엄격한 교사로서의 태도가 아닌, 같이 웃고 슬픔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모습이다. 무애의 노래를 부르고 무애의 춤을 추는 전교의 방법은 왕권에 힘입어 지배의 논리를 제공하던 당시 불교 의 권위적 모습과는 판이하다.

대중 속에 스며드는 원효의 무애행
원효는 복성거사가 되어 당시의 백성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자세를 낮추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대중 교화를 위해 그들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들을 가르치고자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같이 살면서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면서 이야기도 하고 춤도 추었다.
사심을 갖지 않는 일심의 자리는 광대무변한 거울과 같은 것이니, 그의 무애행은 인연 있어 만나는 이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하는 인도자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원효스님의 대승기신大乘起信의 구현 방법은 무애가 무애무라는 독특한 형태로 나타난다.
무애무는 불보살의 공덕을 찬양하며 무루복을 향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백성들의 말로써 그들 수준에 맞는 진리의 말을 노래한 것이었다. 농부는 농부에게 맞게, 아이는 아이에게 맞게, 또 여인은 여인에게 맞게 불법의 노래를 들려 주었다. 불교의 진리를 혜안으로 파헤쳐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장소와 시간과 대상에 맞게 행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어디에도 구애됨이 없는 관세음보실의 화신으로 모습을 나투어 백성들 앞에 다가선 것이다. 그 자신이 재미있는 장난감 소가 되고 장난감 사슴이 되어 광대놀음을 하기도 한다. 대중에 대한 그의 자비행이 폐부에 새겨지는 모습이다.
원효스님의 세계는 넓다. 대승기신론소를 비롯한 수많은 논서와 유심안락도 등과 같은 종횡무진한 방대한 저술은 지금도 한국불교의 사상적 자양이 되고 있다.
토굴과 암자 등의 작은 절에서 못살고 고통받는 백성들과 함께 한 원효스님의 흔적은 이 땅의 곳곳에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그의 사상의 주체인 화쟁사상은 통일 전쟁으로 분열된 백성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좋은 처방전이었고, 지금도 한국불교의 주된 흐름으로 전승되어 오늘날 통불교의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원효스님의 위대성은 대도大道를 성취한 자가 누릴 수 있는 온갖 명예를 버리고 가장 비천한 백성들과 함께하며 고통의 삶을 스스로 찾아나선 데 있다 하겠다.
오늘의 분열되고 억압된 사회 현실에 복성거사 원효스님이 던지는 진리의 불빛은 더욱 찬란하다. 분열된 민족, 나누어진 지역적, 종교적 편견을 화쟁의 넓은 세계로 감싸 안으라는 호령이 쟁쟁한 듯하다. 종교적 권위에 안주한 성직자들에겐 더 낮은 곳으로 임하라는 무애의 노래가 들려 온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나무 새를 파는 노파의 얼굴에 원효스님의 얼굴이 겹치는 것은 나만의 감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