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는 이 공(空)의 문제를 과학과 대비해서 생각해 보자.
현대물리학의 〈물질의 장(楊) 이론〉에 의하연, 전자(電子)와 같은 물리적 입자(粒子)란 단지 장력(場力)이 엄청나게 높이 집중되어 있는 전기장(電氣場)의 한 좁은 영역에 불과하며, 이것은 비교적 큰 장(場)에너지가 매우 좁은 공간에 결집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여도 좋은 것이다. 에너지가 다량으로 축척되고 있는 장소가 물체이고 에너지의 축적이 척은 장소가 장(場) 이라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물체와 장(場)과의 차이는 성질적인 것이 이니라, 오히려 수량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물체와 장(場)을 서로 성질을 전적으로 달리하는 두 개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따라서 장(場)과 물체를 분명히 분리하는 일정한 표면을 생각할 수도 없다. 이런 견해들이 불교의 공관(空觀)에 얼마나 접근해오고 있는가는 앞에서의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되리라고 믿는다.
이와 관련해서 고전적 의미의 절대진공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부정되었다. 즉 이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도 아니고, 에테르라 불리는 매개질에 의해 채워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공간은 모든 물질을 낳고 그것에 변화를 주는 〈힘의 장〉인 것이다. 조금도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의미로는 확실히 <무〉인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떨어져 있는 물체를 서로 끌어당기거나, 빛과 같은 전자파를 전하거나, 때로는 새로운 물질을 낳게 하는 작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유(有)〉에 대한 단순한 〈무〉가 아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인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공간〉이라는 말 가운데는 실은 이와 같은 깊은 철학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색(色=물질)과 공(空)과의 관계는 서로 배타적인 대립의 상태로서 생각될 수가 없으며 다만 동일실재(同一實在)의 양면상으로서 공존하면서 연속적인 협력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반야경 (般若經) 의 색은 곧 공이요. 공은 곧 색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라는 유명한 명제를 연상케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불교와 과학이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는 없다. 空의 이론은 불교의 원리이고, 장(場)이론이나 공간의 개념은 물리학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의 입장을 보다 확고히 해 줄 수 있다는데 대해서는 많은 시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해 온 공(空)을 종합적으로 결론지어 말한다면, 공(空), 그것은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서 사물과 현상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원리이며, 공(空) 자체가 바로 연기이자 중도인 것이다. 또한 공(空)은 이 우주에 충만한 창조적이며 역동적인 가능성이며, 만물의 근원이요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공〉의 이치가 있기에
온갖 법이 이루어지지만
〈공〉의 이치가 없다면
온갖 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는 나가르쥬나의 노래는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의 언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은 이와 같은 공(空)의 원리는 불교적 모든 행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로 언어나 논리에 의해서는 파악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나 논리는 그것 자체의 한계나 모순으로 인해 끊임없이 언어와 논리를 낳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空)은 언어와 논리를 초월한 종교적 체험에 의해 우리에게 감득되어지며 실천되어 지는 것이다.
* 이 글은 한글대장경 126권의 해제와 중론(中論), 황산덕박사의 〈여래장〉, 김용정 교수의 〈과학과 불교〉, 카푸라 교수의 〈Tao of physics〉의 번역본인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등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였으나, 지면 사정상 일일이 주(註)를 달아 출처를 밝히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