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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스님-화엄관(華嚴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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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 김호성 1991년 07월 113호
한암은 선사이다. 이 명제는 스님에 대한 모든 논의의 대전제가 된다. 그러나 앞의 ‘선교관’에서도 살핀 바와 같이 스님은 선만을 고집하고 선과 교의 차이와 우열을 논한 교판론자가 아니라 선과 교의 일치와 겸수를 주장하고 실천한 회통혼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기본적으혹 스님을 선사라고 부르는 것은 회통론 속에서도 교선일치가 아니라 선교일치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일치는 선을 중심으로 교를 포섭하는 주선종교(主禮從敎)로서 보조와 서산(西山, 1520~1604)을 이어 내려오는 한국불교사의 한 특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교선일치는 교를 중심으로 선올 포섭하는 주교종선(主敎從輝)으로서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이 「도서(都序)」에서 주장하고 있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보조 이후 한국의 선불교는 규홍 종밀에게서 벌어온 바도 많으나 그 창조적 극복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할것이다.
스님의 경우 선교일치의 ‘교’는 어떠한 교학올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화엄교학이다. 스님은 화엄에 관한 독자적 저술올 남기고 있지는 않으나 80권 「화엄경」을 현토하였으며, 이통현의 「화엄론」을 현토하고 강의하였다 한다. 특히, 통현의 화엄사상올 강의까지 하였다는 것은 스님의 화엄관이 선적화엄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스님은 보조의 입장을 잘 계숭하고 있다 하겠다.
현존하고 있는 스님의 저술들을 살펴보면「화엄경·론 등에서의 인용임을 직접 밝히고 있는 경우는 6회,그 경론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은 인용은 3회가 확인된다. 필자는 이러한 화염으로부터의 인용구절을 분석, 스님의 화엄관이 선과 화엄의 일치 흙총치와 성기사장을 중심으로 한 실천화엄(實錢華嚴)이라는 측면에서 의상-의상의 직계법손-균여-보조-설잠-유문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해동화엄의 근대적 계숭이라는 점올 논중한 바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중복을 피하고 다만 위의 논문에서 언급하지 못한 측면을 중심으로 스님의 화엄관올 소묘해 보기로 한다.
앞의 심성론에서도 살펴본 바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스님의 화엄관을 살펴보는 데에도 주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소식은 온전히 일체중생의 견문각지하는 지(知)가 아니로되,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서 따
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므로 「화엄론」에 이르사되 ‘인생의 근본무명분 별(根本無明分別)하는 종자(種子)로써 부동지불을 이루어 신진오입(信進惜入)하는 문(門)을 삼는다’하시고, 황벽(賣慶)선사 이르사되 ‘견문각지 상(上)에 본심(本心)을 인(認)한다’하시고, 보조국사 이르사되 ‘교(敎)를 학(學)하고 선(輝)을 학하는 자 비록 묘지를 만나나 다 성경(뿔竟)에 미루고 스스로 겁약을 생(生)함은 지심(自心)의 일용(日用)하는 견문각지의 성(性)이 이 무둥둥대해탈(無等等大解脫)인 줄로 심관(深觀)하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견문각지와 마음의 관계이다. 여기서 ‘마음’은 시비 ·선악·정사 등의 대립이 있는 ‘상대적인 마음’이 아니라 시비 ·선악·정사 둥의 대립이 없는 ‘절대적인 마음으로서 「화엄론」의 부동지불, 황벽의 본심, 그리고 보조가 말하는 바 견문각지의 성(性)인 것이다. 즉 불성 ·진심 ·원각·열반·일심 ·여래장 등을 가리킨다.
견문각지는 육근(六銀)을 통한 육경의 인식을 말한다. 마음이 깨달음이라면 견문각지는 번뇌이다.
육경을 육적(六搬)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마음이 안이라면 견문각지는 밖이다. 마음이 성(性)이라면 견문각지는 상(相)이라고 할수 있다. 이렇게 서로 대조적인 이 양자의 관계가 문제시되는 것은 선원(輝源)으로서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인개 또 참다운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선에 있어서 근본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참다운 마음을 견문각지 그대로도 아니며 견문각지를 떠나서 따로 실재하는 것도 아니라 정의한다. 비록 여기서 인용한 「화엄론」, 황벽(?~850) 그리고 보조의 말씀은 전부 견문각지를 떠나서 절대척인 마음이 따로이 실재하는 것으후 보고 그 절대적인 마음이 찾는 것에 대한 비판만을 말한 것으호 되어 었다. 그러나 실제로 황벽의 「전심법요(鷹心法要)」나 보조의 「절요」등을 살펴보면 즉(郞)과 이(離) 모두에 대한 비판이 셜해져 있는 것이다. 먼저 스님이 인용한 황벽의 말씀은 「전심법요」에서 다옴과 같은 맥락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견문각지에서 본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본심이 견문각지에 속하는 것이 아니며, 견문각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견문각지에서 견해를 일으켜서는 아니되며, 견문각지에서 동념(動念)해도 아니된다. 견문각지를 떠나서 마음을 찾지도 말고, 견문각지를 버리고서 법을 취하지도 말라. 즉하지도 않고 떠나 지도 않으며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셔 종횡으로 자재하면 도량 아념이 없다.”

보조 역시 「절요」에서 즉함과 떠남, 둘 다를 비판하고 있다.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요즘 처음으로 마음을 낸 사람들은 날마다 활용하는 견문각지를 떠나서는 마침내 실천하는 길을 얻지 못하며, 또 마음의 본체는 생각을 떠났다는 것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침내 견문각지에 굴림을 당하게 된다.”

여기서 앞의 내용은 ‘떠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으며, 뒤의 내용은 ‘즉하지 않음(不聊)’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본체’는 절대적 마음이며 ‘생각’은 견문각지를 말한다. 보조 역시 황벽과 같은 입장임을 나타내주고 있마. 이처럼 황벽과 보조의 견해를 모두 받아들이고 있는 스님은 황벽을 통한 ‘마조선-임제선의 전통’과 ‘보조선의 전통’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양자의 선전통(輝傳統)은 ‘견문각지와 마음의 관계’에 대해서는 견해를 같이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같다.「화엄론」에 이르는 바 ‘무명분별의 종자가 곧 부동지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성기(性起)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진성(眞性)의 자재로운 현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일체가 오직 마음이 지은 바이다.
이때 마음은 절대적 마음이다. 절대적 마음이 나타난 것이 모든 존재이다. 따라서 비록 그 겉모습은 다르고 얼굴〔相〕은 천차만별이어서 부처가 있고 중생이 있지만 그 속마음(性)은 하나이며 모두 진실하다. 그것이 진지(률知)이고 부처의 경계〔佛境界〕 이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위의 인용구를 이어서 ‘알음알이職로서 알 바가 아니며 다른 사랍이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성이 청정하여 중생에게 열어 보인다’라고 한 「화엄경」 보살문명품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 직접 깨닫지 아니한 중생들이 알음알이를 통해서 혜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옷속의 구슬〔衣內明珠〕’과 ‘집속의 보물’이 본래 구족되어 있음올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신(信)이 능히 여래지에 이르며 신이 능히 지혜와 공덕을 주장한다”고 한 「화엄경」의 말씀도 성기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승의 신인데, 조문의 신과 동일하다고 함으로써 스님은 선엄일치의 화엄관을 스스로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견문각지에서 본심을 인정하는 것이 성기이며, 견문각지가 상이고 본심이 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양자의 관계가 부즉불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성상무애(性相無碍)의 입장을 나타낸다고 보아서 무리가 없을 줄로 생각된다. 보조는 위에서 인용한 ‘졀요’에서 견문각지와 마음의 관계를 규명한 뒤에 곧 바로 즉함과 떠남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긍정과 부정에 자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성상무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올말하고 있다〔보조.전서, pp.147~149.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성상무애를 우리는 한암 화엄관의 세번째 측면으로 볼 수 있으리라.


김호성씨는 보조사상연구원 간사로 있으면서 동국대박사과정 재학 중에 있고 대전대 철학과와 한국불교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붓다차리티에 나타난 초기 상키야사상연구」「보조선의 실제론적 경향과 그 극복」「보조의 정토 수용에 대한 제 고찰」「일본제국주의의 원종 설치」등의 논문과 번역서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