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치평산 기늙에 자리한 향림사의 아침은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새벽 4시, 스님들의 아침예불과 함께 시작된다.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이지나면 국민학생이 빠진삼십여 명의 중고등학교 학생과 몇몇 대학생들의 아침예불이 다시열린다. 아침예불이 끝나면 자신들이 자고 일어난 방을 청소하고 아침공양을 한 다음 등교하기 전 그날의 차비와용돈을 타기 위해 어느 한스님의 방문을 노크한다. 이유고 일흔 명 가까이 되는
자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난 다음 방에 호젓이 앉아 차 한잔을 마시며 바로소 그날을 여는 분, 그이가 바로 찰십 명의 자식을 보듬어 안고 키우는 천운스님이시다.
적여도 60년대에 접어들기 전 우리사회는 대가족제도 속에서 삼대 혹은 사대가 함께 살며 그속에서 효와 우애를 악하며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오면서 경제성장과 함께 산업사회가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산업사회는 우리에게 물절적 풍요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핵가족제도라는 폐해도 남겼다.
가정에서 어른들을 슬그머니 밀어내었던 핵가족제도는 젊은이들에게 어른을 모시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주에 환호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미혼모와 이혼가정을 만들어냈다.
부모에게서 버려진 아이들.어쩌면 그들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산업사회를 껴안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사회가 낳은 기아일는지도 모른다.
이 사회와 부모가 함께 버린 그 아이들이 바로 천운스님의 자식들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23년 전, 스님은 화순 화엄사 주지를 끝으로 단돈 5천원을 가지고 지금 향림사가 있는 자리 광주시 치평동으로 왔다. 지금은 향림사 밑으로 집들이 꽉 들어차 았지만, 스님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허허벌판, 집 하나 보아지 않았었다. 빈 터에 천막 하나 첫고 ‘서러운 사람부터 구제하자’라는 원을 설천해나가기 시작했다.
스님이 그러한 원을 세운 것은 스님이 속한 사회와 젤 밖의 사회에서 벌어졌던 어떤 어긋남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스님이 푸른 눈빛으로 수행정전에 몰두해 있던 시절인 저 50년대와 60년대에는 전라도를 곱게 보져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라도 출신의 스님에게 법문을 듣고 돌아서면서 ‘전라도 개땅쇠놈이 뭘…’이라고 내뱉는 일이 허다했고, 조영암이라는 소설가는 각도의 장단점을 열거하는 과정에서 ‘전라도 개땅쇠’라는 표현을 써 문단을 떠나야 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만큼 그 시대는 타도의 전라도에 대한 반목은 컸었다. 그 당시 스님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절에서 수행을 하고 있으면서 조그만 나라에서 네것 내것을 찾으며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켜 보겠다는 원을 세웠다.
또 불가의 스님네들이 선이 옳으니 하는 소리만 높일 뿐, 일목요연하게 부처님의 본 뜻을 그대로 내놓지 못하고 중생구제를 못하는 것에 비에를 느껴 ‘선사가 되는 것은 그만두고 나만이라도 부처님의 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것이 옳겠다’ 싶어 시정으로 내려올 결심을 했다. 결국 지연간의 갈등해소와 중생구제에 대한 원이스님을 선방에서 향림사로 끌어낸 셈이 됐고, 또 그것을 스님이 칠십여 명의 자식을 가지게 된 인연을 만들었다.
그 두 가지 원인으로 향림사를 일귀 사회의 혼란 속에서 중생을 잃은 사람들이 버린 아이들을 하나둘씩 데려다 기른 것이 지금은 칠십명의 대식구가 되었다. 처음엔 전라도에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후 소문이 꼬리를 물어 전국 모여들었고, 출신보다는 아이들이 많으니 지역간의 갈등을 해소시키겠다는 원이 얼마만큼은 이뤄진 셈이다.
향림사의 스님네 식구는 국민학생이 30여 명, 중고등학생이 20여명, 대학생 몇 명과 대여섯 분의 스님, 그리고 공양주보살이 전부인데 스님의 아이들 중엔 여자아이가 없다. 혹 여자아이가 오면 스님은 당신의 수계상좌인 각 절의 비구니스님에게 보내 거기에서 키우게 했다.
저녁 여섯시 반이면 식구들 모두가 참석한 저녁 예불 뒤 그들도 각기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가 아우들은 더러 형의 도움을 받으며 숮제를 끝마친다.
그들의 일과를 들여다보면 여느 집 아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듯 보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스님의 마음 한구석은 저리기만 하다. 저희들끼리 엉켜 잠자리에 들면 혹 어딘가에 있을 아이들이 마음에 남기 때문이다. 스님이 아무리 잘해줘도 부모가 나타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제 부모를 따라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얼마나 깊이 모정을 그리워했는지를 스님은 그간의 체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 비정한 사람 들이지요. 내가 이 사회의 혼란 속에서 중생을 잃은 일을 처음 서작할 무렵엔 생활여 사람들이 버린 아이들을 하나둘씩 어려워 부모가 직접 아이들을 데려다 기른 것이 지금은 칠십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미혼모의 아이나 부모와 헤어져 온 아이들이 대부분인데 자신들은 다시 결혼해 제대로 살면서 아이들을 여기에 맡기는 겁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부모가 없으면 할머니나 숙모들이 키워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일가친척이 아무리 많아도 이리로 데려옵니다.”
스님은 이십여 년 넘게 아이들을 받아 키워오면서 세상의 인심이 바늘 끝이나 들어갈 구멍 없이 뻑뻑해지고, 병든 가정이 많아짐을 보며 인간이 가장 근본적으로 지켜야 할 효가 무너지고 있는 것을 절감하다.
세상의 그러한 각박함 때문일까.
스님은 그들에게 맞지않는 이야기를 하거나 일을 시키면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아이들을 보며 그리고 낭비가 몸에 밴 그들을 대하며 세태의 변화를 실감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사실이 스님은 못내 언짢기만 하다.
60년대 말, 천막 하나 치고 시작해 대웅전을 짓고 회관과 몇 채의 요사채를 지으며 오늘까지 오는 동안 누구에게 권선문을 돌리거나 저자에게 나가 탁발 한번 함이 없이 어려운 줄 모르는 불사를 치뤄냈다. 그런데 정작 어려움은 아이들을 키우며 스님 스스로가 그들에게 내주어야 할 마음과 버려야 할 마음을 구별하는 데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는데 밉고 고운 마음을 가지면 키울 수가 없어요. 그냥 자연에서 낳았다니까 자연으로 살다가 자연으로 살다가 자연으로 간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대하니까 키우는 거지요. 더 이상 신경쓰면 못 키웁니다.”
그래서 스님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기대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스님처럼 불도를 닦겠다고 나서는 아이가 있길 바라지만 한번도 그들에게 그런 마음을 소리내어 말해 본 적이 없다.
“난 아이들한테 공부하라는 소리 안합니다. 다만 자신이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 지조있는 생활을 하라고 이르지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은 밖에 나가 욕하고 싸운다거나 밖에서 욕먹는 짓은 안해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아이들은 하나둘씩 스님의 품안을 떠나기 시작하는데 스님은 그것도 자연스럽게 놓아둔다. 남아서 더 공부하고 싶으면 하고, 공부보다도 취업을 하고 싶어하면 그대로 떠나게 한다. 고둥학교를 졸업하고 더러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들도 있고, 일년에 한두 명은 머리를 깎겠다고 나선다.
자연에 맡기는 교육방법을 택한 스님은 일년에 이삼십 명씩 들어오고 나가는 자식들을 이젠 담담하게 그리고 자연스런 일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스님의 출가와의 인연은 국민학교를 졸업하면서 맞은 해방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곧 과거제도가 부활될 것이라며 그에 대비해 한문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마음에 박아두었던 스님은 서울에 가 공부를 계속할 요량으로 전라북도 고창군 홍덕의 집을 나섰다.
집안이 빈한하지 않았던 터라 장롱에 수북이 쌓여 있는 돈을 몇 장이라도 집어가지고 나왔으면 서울로 가는 길이 그리 고생스럽지 않았으련만 어른의 허락없이 돈에 손을 댈 수 없어 무일푼으로 그냥 집을 나선 것여 불가와의 인연이 되었다.
정읍쯤에서 허기진 배렐 채우려 절에서 우연히 만난 비구니스님을 따라 간 곳이 정읍 내장사.그 길로 머리깎고 내장사 주지스님인 내곡스님의 안내를 받아 그 당시 그곳에 주석하고 계시던 박한영스님을 시봉하게 되었다. 그때 스님의 나이 18세였다. 철학과 과학에 어긋난 비현실적인 말씀을 하지 않고 한없이 인자하셨던 박한영스님, 그분에 대한 추억은 남달리 따뜻하고 깊게 스님의 마음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그때 한영스님은 여든에 가까운 나이셨는데 밤 12시가 되면 꼭 용변을 보는 버릇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장사의 변소가 좀 멀어야지. 그래서 꼭 내가 그분을 모시고 변소에가 호롱불을 켜들고 밖에서 스님 용변 끝나기를 기다리곤 했지요. 밤 12시이면 곤하게 잘 시간이고 또 새벽 3시면 일어나야 되는데 매일 그러려니까 철없는 마음에 꾀가 났어요. 그래서 하루는 스님에게 매일 이렇게 강아지마냥 쪼그리고 앉아 스님 똥누는 것을 기다려야 되겠느냐며 볼벤소리를 했지요 그 소리에 아무려면 네가 강아지 신세가 되어서야 쓰겠느냐며 스님이 껄걸 웃으시더군요.”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한영스님은 저녁공양을 들지 않으셨고, 저녁을 거르시니 물론 밤 12시의 용변도 보지 않으셨다. 연유를 안 주지스님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지만, 스님은 철없는 사봉에까지도 내주었던 한영스님의 자비로움올 잊지 못한다.
계를 받고 불도를 향혜 용맹정잔하고 있을 무렵 6 ·25가 일어났다. 5년 남짓 생사가 넘나드는 전장터에서 스님은 인간의 이기심과 비인간성을 수없이 보며 역시 자신이 설 곳은 절임을 확인했다.
전쟁 후의 우리의 불교계는 바구 대처간의 싸움으로 얼룩져 공부하고자 하는 스님네들이 설자리가 없었다. 해서 스님은 제대 뒤 곧 선운사 도솔암으로 들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경전을 3년 동안 보았다. 그리고 바로 화순 용암사에 머물며 7년간 오후 불식하며 묵언정진에 들었다.
아침 한차례 죽 한그릇을 먹으며 수행에 힘썼고, 도토리와 상수리에 고구마와 밤을 집어넣어 가루를 낸 것으로 3년을 나기도했다.
참선시간 외에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종교학, 철학, 문학 동의책을 하루에 한권씩 읽었다. 심지어 국민운동에 대한 책까지 읽어치웠으니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출판되었던 책은 다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때의 독서는 시정에 내려와 살면서 속가 사람들의 심리를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읽었던 수천권의 책은 더러 제자들과 아는 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지만 나머지의 책들은 지금 향림사내방 세 개를 가득 채우고 있다.
3년간의 경전공부와 7년 동안의묵언 속에서 행한 참선, 그리고 수 천권의 독서에서 스님이 얻은 한소식은 어떤 걸까?
“한소식요? 난 소식을 모릅니다. 다만 부처님의 뜻을 알았을 뿐이지요”
서너해 전, 향림사 주지에서 물러났지만 스님은 늘 바쁘기만 하다. 아이들을 보살펴는 일 이외에도 늘상 찾아오는 2백여 호의 신도들을 맞아 그들의 얘기에 귀기울여야 함은 물론, 향림사의 각종 법회에 참석법문도 해야 하고, 때로는 멸리다른 지방에 나가 법문을들려줘야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스님은 이런 바쁜 일상에서도 일년에 몇 차례 존경하는 스님을 찾아 떠나는 여유를 가지기도 한다. 몇 년에 한번 법는 성철스님은 “네 수행은 않고 날마다 아이들만 끌어 안고 있을 거냐”며 혼을 내사지만 스님은 그분의 선법문이 좋아 그 꾸짖음이 혼연하기만 하다. 향림사에서 멀지 않은 백양사에 주석하고 계시는 서용스님을 찾아뵙는 일 또한 편안하고 즐겁다. 생사를 해탈한 분상에서 생활하시는 선지식을 가까이에서 벌 수 있는 인연에 스님은 언제나 마음이 따습다.
예순과 일흔살 사이에 서 계신 스님은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광주에 노언당과 2년제 불교대학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데 향림사 주지를 다른 스님에게 내어주었듯, 노인당이나 불교대학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그렬 작정이다. 그러한 의욕 때문일까? 스님의 얼굴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차고 맑다. 스님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다 본절 마당의 풀갚에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메뚜기를 잡고 있는 전경은 6월의 명정한 햇살과 함께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절 안의 놀이터에서 저희들끼리 어울려 놀고 있는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여남은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한참 대답이 없다. 어딘지 모르게그늘이 드리워 었는 얼굴을 바라보다 까맣게 탄 아이의 팔을 놓고 돌아서던 기자는 웬지 눈서울이 뜨거워옴을 느꼈다.
아마도 그것은 기자가 한 아이를 기르고 있는 어머니여서이기도 했겠지만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할 우리 시대의 아픔을 스님에게 떠맡간 데서 오는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향림사를 나서는 기자의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던 것은 절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너머로 스님의 너른 동판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