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략했다가 올지문덕에게 참패하여 돌아오니 수는 이 싸움으로 국력을 탕진한 바 되어 건국 서른여덟 해 만에 나라까지 망하였다.”
우리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할 터이니 출병하라”고 수 양제를 부추긴 신라의 사대 외교가 한몫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성읍 국가는 화친올 맺고 있었으나. 같은 말을 쓰는 동족으로서 통일정부수립이라는 숙원을 갖고 있었기에 서로 다투는 일이 잦었다. 특히 혈족인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립된 신라에게는 제삼세력의 도움이 절실한 처지였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은 미개한 민족일 뿔 아니라 탐욕이 많아 믿을 수 없었고 중국과의 교류를 바랬지만 오늘의 경인 지방이 고구려 영토여서 너무 멀었다. 따라서 신라의 절실한 당면 과제는 경인 지방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로서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면 그 틈을 타서 경인 지방을 공략하리라는 계획으로 수 양제의 고구려 출병을 부추겼던 것이다. 이 계획은 맞아 떨어져 고구려가 살수 싸움에 온 국력을 기울이는 틈을 타서 오늘의 경인 지방을 점령하고 대망의 황해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이는 곧 나당연합의 시초가 된다.
수나라는 고구려와 몇 번 싸움에 국력이 쇠진하여 결국 망하고 말았지만 고구려도 그만큼 출혈이 커서 신라에 경인 평야의 곡창지대를 잃고도 이를 다시 뺏을 염도 못하고 있는 사이 나당 연합국의 백제 침공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고, 오랜 맹방을 잃고 남북 양면 공격을 맞아 결국 나라가 망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를 당나라에 내준 꼴이어서 국토의 대부분을 잃은 뒤에 당나라 문물까지 받아들임으로써 귀족이라는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아울러 평민과의 계급적 층을 짓는 따위로 겨레 공동체마저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이 땅에 귀족 문화의 등장은 민족공동체의 와해를 가져왔다. 귀족은 평민이라는 기층민중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계층이므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데서 형성한다. 따라서 민중의 정서에서 도피한 속성을 지니며 이 속성은 사대사상을 통해 충족감을 추구함으로써 어차피 민중 정서와 동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위 아래가 없이 어울려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던 따뜻한 마음씨가 제 한몸의 안위를 해아리는 이기성으로 굳어지고 굳건하고 활달했던 결기가 나약
한, 소극적인 비겁성으로 시들어 간다. 말은 있되 글이 없던 우리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한자를 빌어 썼으나 통일 이후는 중국 유학으로 형성된 지식 계층에 의해 빌어 쓴다는 수준을 넘어 문화적 예속으로까지 치달았다.
이들은 모든 것을 중국으로부터 배웠고 생활 양식까지 중국 것을 본받았다. 왕은 스스로 몸을 낮추어 왕손을 볼모로 잡히고 중국의 속국으로 안주하기를 바랬으며 해마다 엄청난 공물을 바치기 위해서 민중에 대한 착취를 강화해 나갔다. 이들은 계급성을 굳히기 위해 말씨까지 바꾸어 썼다. 이 버릇이 고려를 거쳐 이조에 이르러 사대부라는 지식 계층을 키워 냄으로써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결과 민중의 빈곤은 한계를 넘어 기아의 사선을 헤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사대부의 사랑방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한문이 갖는 특징은 배우기 어려운 데 있다. 천자문으로 입문하여 사서삼경을 떼기까지는 십 년 공부도 모자란다. 한 사람이 십 년을 공부하려면 열 사람이 십 년을 굶주리며 피땀을 흘려 일 해야 한다. 열 사람의 노동력을 바쳐만들어 내는 한 사람의 사대부란 비겁과 위선을 덕목으로 이는 착취자일 뿐 우리 본래의 따뜻하고 해맑은 얼을 지닌 겨레는 아닌 교육을 통해서 개조된 새로운 인격체인 것이다.
이들은 우선 말씨부터가 다르다. 높낮이가 분명한 우리 본디의 목소리는 글을 읽는 동안 순치 되어 부드러운 중음으로 바뀌었다. 기뻐도 왁자하게 웃지 않으며 슬퍼도 큰 소리로 울지 않는다. 입을 열면 문자가 아니어선 위신이 서지 않고 이웃과 말을 나눌 때에도 증인을 사이에 두어 “여쭈어라” 식의 격을 갖추며 상민을 상대로는 아예 입을 열지 않는다.
말씨가 이럴 뿐 아니라 일상 행동거지도 유별나서 한 여름에도 살갗을 드러내내지 않으며 버선에 대님을 동아고 이웃나들이에도 갓과 두루마기가 아니어선 점잖지 못하며, 길에 나서면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활개를 휘저으므로 좁은 길에서 사대부를 만난 상민은 우선 멀찌감치 길을 피해야 한다. 길을 가다가 물을 만나면 신을 벗고 건너려고 하지 않고 하인의 등에 업히며, 말을 타면 반드시 경마를 잡힌다. 연장을 손에 드는 일을 천하다 하여 활과 창칼을 멀리하니 전란을 당하여도 싸울 줄 모르고 피난이 고작인데 워낙 걸음이 느리다 보니 적군의 손에 사로잡히기가 일쑤이지만, 사대부가 적의 칼에 무참하게 죽는 일이 드문 것은 자기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처첩을 바치기를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땅을 휩쓸고 간 전란이 어디 한 두 번인가. 온통 나라가 초토화되기를 거듭했지만 지금도 고을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게 남아 용마루를 꿈틀거리는 자취는 바로 사대부들이 치욕스럽게 살아남은 증거이지만 누구 하나 이 모멸의 유적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한자 문화의 뿌리가 오늘도 이 땅에 든든하게 뿌리 내리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3
나라의 수난은 그대로 겨레의 수난으로 나타나며, 겨레의 수난은 말의 수난
사로 이어진다. 일제의 조선어말살책에서도 보듯이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 말이기에 말을 없애지 아니하고는 나라를 없앨 수 없다. 그래서 이러한 바탕에서 이루어진 조선어말살책은 가슴 섬뜻한 겨레뿌리뽑기 정책이었던 것이다. 해방은 우리에게 겨레되살이 날이지만 결국 국토 분단이라는 새로운 시련을 안겨주었으니, 나라말을 업수히 여겨 스스로 말을 죽여 온 겨레의 업보가 큼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역시 그랬다. 분단은 겨레를 가르고 말 길을 막아 남북이 서로 다른 어법을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분단된 지 마흔 여덟 해, 오늘의 실태는 남북 언어의 이질화라는 외형적인 특징을 드러냄도 있지만 더욱 큰 문제는 말이 가꾸는 정서적인 뿌리가 전혀 엉뚱한 데로 뻗어 나가는 데에 있다.
언어의 이질화가 실생활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오늘의 영호남 지역 감정
이 그 말씨에서 자란 결과라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호남의 일부에선 신 백제국 건설을 주장하는 말이 공공연히 떠도는 사태에서도 확인되듯이 언어공동체의 결집력은 무서운 것이다. 경상도 말씨와 전라도 말씨가 이럴진대 문화어로 발전된 서북 사투리가 통일 이후에 어떤 지역 감정으로 나타날지 걱정이 안될 수 없는 일이다.
한나라 안에 다른 말떼가 섞여 살 때에 어떤 갈등이 일어나는지는 최근의 국제 사회가 증거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몰락을 틈타서 체코슬로바키아가 체
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독립된 보기라든가, 캐나다 퀘벡주의 경우처럼 특정
언어권의 분리주의가 지배권을 압도하는 따위의 지배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어떤 체제의 힘도 언어공동체의 독립 회귀성을 영원히 지배하기는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오늘은 분단이 한스러워서도 남이 북을 부르고 북아 남을 찾지만, 이질화된
분단 언어의 골을 좁히지 못한 채 단순한 국토 통일만 이룩할 때에는 고장 말 무리끼리 모여 길러 내는 지역 감정이 신 삼국의 분리 독립으로 치닫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바라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통일을 서둘러야 하며, 한 겨레가 하나의 말씨로 어울릴 때라야 비로소 언어공동체로서의 겨레의 얼이 되살아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