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불교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치고 원효(元鏡) 스님올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그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 전국의 여러 곳에 많아서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그가 남긴 수많은 저 술서에 담긴 심오한 사상이나 대중교화시 남긴 족적이 너무냐 위대하고 컸기 때문일 것이다.
원효스님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후에 활동하신 고승이시다. 그는 한때 의상스님과 함께 중국의 요동성올 향해서 불법을 연구하러 가려고 떠났다. 그러나 변산반도의 어느 한 포구의 근처에 있는 무텀가에서 당(庸)의 불법유학의 꿈을 꺾어 버린다. 그가 유학의 길올 포기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삼국유사」나 「송고승전」에 전해지고 았다.
원효와 의상이 당주항구(庸빠曉미에서 중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배를 구하는 동안에 큰비가 왔다. 비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폭풍우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토총에서 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지난 밤에 해골과 함께 토분에서 잠을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날씨는 그들이 무덤을 떠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나쨌다. 그날 밤에는 갑자기 귀신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괴롭혔다. 이때 원효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난 밤 이곳이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는 마음이 편안했는데, 오늘 밤에는 무덤이라고 생각하니 윗것이 생겨 괴롭히는구나’라고 말하였다. 이때 원효는 문득 ‘마음이 일어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미음이 멸하니 흙집과 무덤이 둘이 아니구나’라고 말하면서 깨달았다. 그는 이어서 ‘삼계가 오직 마음이며 모든 법이 식(識)에 기초한다. 따라서 마음 밖에는 법이 었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왜 마음 밖에서 진리를 얻으려고만 하는개 그러므로 냐는 절대로 중국에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원효는 갑자기 짐을 꾸려서 귀국하였으나, 의상은 홀로 상선을 타고 당 둥주 땅에 도착하였다.
원효스님은 의상과 함께 지낸 토분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불교학 전반에 관한 폭넓은 연구를 하여 수많은 저술서를 남겼다. 그가 남긴 저서는 86부라고 전하고 었으나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은 22부이다.
절에만 있으면서 교학에 관한 연구만을 하지 않고, 원효는 깨달음 이후 대중교화를 위한 적극적인 중생구제 활동을 한다. 그는 「화엄경소」를 찬술하다가 제40회향품에 이르러 붓을 꺾어버리고 대중교화의 길에 나선다.
대중교화를 하는 그의 모습을 「삼국유사」 원효불초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연히 광대들이 형상이 이상한 큰 표주박을 갖고 뛰어 노는 모습을 보고 그 모양올본따 도구를 제작하여 「화엄경」의 ‘일체무애인’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무애라고 이름짓고, 노래를 만들어 세상에 유포케하고 천촌만락(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하였는데, 가난뱅이나 코흘리개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모두 ‘나무(南無)’의 칭호를 할 수 있게 하여 교화의 힘을 보여주었다.” 라교 우리는 근자에 불교모 이제는 대중들 사이에 들어가 포교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음올 본다. 다른 종교와 같이 거리에 나셔서 그 가르침을 전하고 었지는 않자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알차게 포교당을 중심으로 하여 부처님의 고귀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포교와 관련하여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대중포교외 효율화 문제이다. 대중을 위한 포교는 양적으로만 거대하게 한다고 해서 포교가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대중들의 삶 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과 함께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상호간에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동사섭’올 강조하신 것을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원효에 이르랴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로 실천되고 있음을 본다 그는 그야말로 중생이 겪는 모든 기쁨과 슬픔을 이해하며 표거운 애정으로 보듬은 위대한 보살이었다. 그는 유식학과 정토학 등 깊은 불교사상을 연구한 위대한 학숭이기도 하지만 그가 중생의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같이 고민을 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교당을 우리 주변에 많이 세우고, 값진 불사를 많이 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대중들의 삶을 저버리지 않고 그들을 이해하며 깨달음의 저 언덕을 향해 가는 모습이 진정한 불교의 모습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