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개항과 더불어 한국의 ι근대사가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혼미를 거듭하다가 급기야는 나라마저 잃는 뼈 아픈 시대적 난관에 처해 있었으므로, 근대불교사 역시 어쩔 수 없는 역사의 격랑속에서 부침할 수밤에 없었고, 온갖 수모와 변화속에서도 한국불교의 면목을 지켜 나아가려는 인고의 세월이 곧 이 시기의 불교적 상황이었다.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대륙진출의 야망올 품고, 마치 서양 제국주의의 열강들이 선교사를 먼저 파견했 것처럼, 일본불교의 각 종파에서는 다투어 우리나라에 진출을 꾀하였다.
특히 부산과 원산 동 항구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종교적 전교(傳敎)는 일본불교뿐 아니라 서양선교사들도 이미 서울을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각기 전도와 포교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특히 일본 일련종의 숭려 사노가 다른 나라 종교인들은 마음대로 나다니는 서울을 제나라 숭려들이 들어올 수 없는 모순을 보고 우리나라 숭려도 입생(入城)을 허락해 줄 것을 김홍집 총리대신에게 상서한 것을 김용집이 고종에게 상주(上奏)해서 허가를 받아 이루어졌다. 이때자 바로 1895년 고종32년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다시 광무 1년 1897년에는 대원군에 의해 다시 숭려의 입성재금령(入城再禁令)이 실시되었지만 아무튼 한국의 승려라면 누구나 갈망하던 도성출입금지령(都城出入禁止令)의 혜제가 한국 승려의 본의(本意)든 아니든 일본의 한국침략의 전초라고 활 일본 송려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은 한국불교 근세의 동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불교의 내적인 변화도 컸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부가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포한 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불교배척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불교계에서도 전국 사암의 통일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광무 3년인 서기 1899년에는 동대문 밖(지금의 창신 국민학교 자리)에 원홍(사(元興寺)를 세워 국내 수사찰, 즉 한국불교의 총종무소로 삼고 전국 13도에 각각 하나적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의 사무를 총괄하였다. 그리고 숭직으로서 도섭리 1인과 내산섭리 1인을 두었는데, 도섭리는 종무원 장과 같은 것으로서 전국 승려의 총대표자이며 내산 섭리는 서울 부근 사찰의 총독자이었다. 또 각 수사 (首寺)에는 1인의 섭리를 두어 도내 사찰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찰통일의 취지를 관찰하고 나아가서 국가적 관리로 하기 위하여 광무 6년 서기 1902년에는 궁내부(宮內付) 소속으로 관리서를 설치하였다. 이에 관리서에서는 사찰관리세칙을 사찰령 36조를 발포하고 전국 사찰 및 숭려에 관한 일체 사무를 맡아보았다. 이리하여 관리서에서는 대법산(大法山)과 중법산 제도를 실시하여 전국 사찰을 통할하였다. 대법산은 국내 수사찰(首츄利)로서 원홍사로 삼고 중법산은 도내 수사찰로서 16개 사찰로 삼았다.
이로써 오랫동안 전혀 관심 밖으로 방치되었던 국내의 사찰 및 승려는 이제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 들게 되어 보호받게 되었다. 관리서는 궁내부에 소속된 정부의 한 관서였기 때문에 국가 공무원인 관리가 사무직에 엄명되어 제반 서무를 맡아 하였다.
그러나 관리서와 대법산제도 오래가지 못하고 광무8년인 1904년 1월에 폐지되고 말았다. 관리서의 소관사무는 내부관방(內部官房)에 옮겼다가 동년 2월에 칙령 제15호로써 사사(촉社)에 관한 사무는 내부지방관의 주관으로 하였다.
관리사가 폐지되고도 스님들은 원홍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들 스스로 승단의 운영을 맡아 하였는데 광무 10년인 서기 1906에 봉원사의 이보담(李寶置)과 화계사의 홍월초(洪月初) 등이 원홍사에다 ‘불교연구회’를 설립하였다.이 ‘불교연구회’는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으로서 정토종올 종지로 하였는데 초대 회장은 홍월초였으며 이보담이 곧 그 뒤를 이어 회장이 되고 명진(明進)학교 교장까지 겸직하였다.
광무 10년 서기 1906년 6월 14일에 경무사 박숭조가 교칙(敎勳)올 받들고 원홍사에 와서 섭리 및 기타 승려를 해산하고 원홍사를 명진학교에 위탁하여 학생을 교육하게 하였으므로 이보담과 홍월초가 원홍사를 잘 보호 관리하였다.
이듬해 6월 25일에 각 도의 사찰 대표자 50여 명이 총회를 열었을 때 이보담이 ‘불교연구회’장직과 명진 학교장직을 사입하였으므로 이회광이 그 후임으로 뽑히게 되었다.
이회광 ! 친일파의 거두(巨頭)로서 일세를 풍미했던 그에 대한 행적과 출생신분, 출가본사나 사승등 모든 것이 역사 속에 묻혀버려 잘 나타나 있지않다.
한때 원종의 설립과 해인사의 섭리로써 해인사를 주름잡았을 그의 음성은 이제 아무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일제(日帝)의 주구로서 상당히 위세를 떨쳤을 법한 그의 행적은 다만 친일에서 친일로 이어져 결국은 추한 이름만을 불교사와 민족사에 남겼을 뿐 그의 위세와 권승으로서의 행적과 그 생의 말로마저 단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역사란 얼마나 무상하며 냉엄한 것인가를 잘 알려준다 하겠다.
융희(隆熙) 2년인 서기 1908년 3월 6일에 전국 숭려 대표자 52명이 원홍사에 모여 회의하고 원종 종무원을 세웠다. 이는 전년에 이회광을 회장으로 선출한바 있는 ‘불교연구회’가 정토종 일색을 탈피하고 거국적인 교단올 형성코자 하는 요망들에 의하여 불교 연구회로 지양하고 국가적인 새로운 교단인 원종을 세운 것이라 볼 수 있다.
원종 설치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된 바 있으나 최근 해인사에 웅모하여 가작으로 뽑힌 바 있는 김호성의 원종 설치에 관한 논문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생략하고 다만 여기에서는 이회광의 생애를 좀더 추적해 보기로 하자.
이리하여 원종 종무원은 이회광을 대종정으로 추대하였으며, 이회광은 대표적인 친일단체 일진회(日進會) 회장 이용구의 “조선불교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일본 불교의 원조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설득을 받고 이용구가 추천하는 일본 조동종 승려 다께다(武日範之)를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다께다는 전부터 한국 불교를 조동종에 귀속시켜 일본화하는 계획을 꾸준히 추진해 온 인물로 친일숭 이회광을 만나자 곧 한 ·일불교의 합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밖에도 일본의 여러 종단 정토종이나 진종(륨宗) 퉁이 이회광이 이끄는 원종과의 합병올 제안해 왔으나 이회광은 종지가 맞지 않다는 구실로 그들의 제안을 거부하고서 오직 다께다와 함께 조동종과의 합병을 추진시키는 한편, 전국의 사찰을 원종의 관할하에 통일시켜 자기 세력을 키우는 일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1910년 9월 한일합방이 되자 이회광은 다께다와 함께 조동종 관장 이시가와(石川素童)를 만나 합병문제
를 논의했다.
이회광으로부터 연합에 관한 제의를 받은 이시가와 조동종 관장온 “조동종이 필요에 따라 한국의 불교를 응원해 줄 수는 있으나 연합은 승닥할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연합이란 문제를 두고 일본 조동종 측은 부속을 원했고, 이회광은 연합만을 고집하자 이시가와는 일본 정부의 내락(|서諾)올 받고서 연합에 찬성하고 7개 조항의 연합조약을 체결했다.
이회광은 국내의 교단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연합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때가 1910년 10월 6일 한일합방이 된 지 불과 1개월 뒤의 일이며, 그와 조약을 체결한 상대방은 조동종 관장 이시가와가’ 아니라 조동종 종무원의 총무 히로쓰(弘律說三)였다.
이회광은 이뿐만 아니라 계속 친일행위와 매교(賣敎)행위를 자행하였는데, 그의 생각은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와 연합하지 않으면 장래에 존립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생각은 한일합방이 되어야 우리나라가 살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 일진회 둥친일 정치인들의 생각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회광의 조동종과 연합조약의 내용과 그 이후의 행적은 다음 호에 계속할 예정이다.
시명스님은 통도사 극릭암에서 출가하였다. 일찍이 통도시와 해인사에서 교무 소임과 월간 「해인」 편집장을 맡은 바 있으며, 지금은 해인사 포교국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