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에 중생계와 이 세계를 두루 관찰하시고 모두가 다 인연을 따라 소생하고 소멸해 감올 관찰하셨다. 이러한 생멸의 가운데에 인간은 고뇌를 느끼고 그로 인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감각기관의 쓰임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인연법올 저 12인연의 순관과 역관을 통하여 여실히 살펴 아시고 이 중생의 고뇌를 구제하시고자 여러 가지 방편을 실시하였다.
그 중에 사제법이며 삼법인 퉁은 현실의 관찰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더욱이 12인연의 바탕에 깔린 업감연기(業感緣起)는 모든 인연법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법성게에서, 이 앞에 두 구절은 부처님께서 중득하신 내용올 밝힌 부분이라면 이 한 구철의 참된 성품은 심히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누구나 알기가 쉽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어렵다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것올 알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쉽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하여 가면 될 수 있고 또 항상 관심올 강지 않으면 쉽게 물러나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어떤 문제나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자신이 가장 그일에 대해서 자세히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 사실을 자세히 물어보면 구체적으로 그 현상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 그 현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원인도 살펴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사 현상올 파악하고 있다고 하고 원인을 살펴 안다고 해도 그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무엇올 지향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못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인생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인생은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연기법에 의해서 변화하고 발전하거나 퇴보되는 것이다. 신의 의지나 어떤 절대자의 속성에 의하여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우리는 확실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참된 성품이란 법성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며 이진성은 바로 모든 중생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올곧고 바르며, 가이없고, 마침과 시작이 없는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이렇게 미묘하다고 하는가 하면 변화를 수용하지 않을 것 같은 진리 자체가 바로 변화에 적응하기 때문이며 이차적으로는 변화하는 것은 무엇이다 소멸하는데 이것만은 소멸올 따르지 않는다는 데 그 미묘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때로는 진속의 이제라고 말해지기도 하는데 이 이제라고 하는 것은 참다운 불변의 진제와 변화에 따르는 속제의 들을 말하는 것이다.
「대지도론」은 반야부를 논리적으로 자세히 풀이한 용수보살의 저서로 구마라습이 한역한 것인데 이 이제에 대하여 셜명하기를 불법 중에 이제가 있으니 첫째는 세제(世諸)요, 두번째는 제일의채(第一製帝)이다. 세제를 위하기 때문에 중생이 있다고 말하고 제일의제를 위하기 때문에 중생의 소유가 없다고 설한다고 하였다.
현재 우리의 눈이나 감각기관을 통하여 살펴보면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엄연히 나열되어 있고 또한 인간의 생활에 나타나는 어질고 어리석음과 부유와 가난함이 농촌과 도시 퉁퉁 천차만별의 현실올 누구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현실의 여러 가지 관계를 심히 깊고 깊어 지극하며 미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살펴보면 이 우주의 현상은 무엇에서 발생하였는지 아무도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현상이 자연허 나타난 것이 아니요 한 사람이 나 그 어떤 절대자의 창조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러 가지 인연들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현상계의 모든 법은 중연의 소생(所生)이므로 만물의 근본원인은 모두 인연에 속하는 까닭에 삼라만상
의 그 어느 것 하나도 자성 즉 자체의 특별한 성품이 없는 것이라고 발한다.
이와 같이 자성이 없는 것은 무상한 것이요 빈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성품올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서 새로운 것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무자성인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공한 것이므로 없다고 해도 맞는 말일 수가 없다. 유무를 모두 떠나 있으므로 여러 가지 인연을 화합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만약에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면 여럿의 인연이 없이도 그것은 존재해야 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온 어떤 하나에 의지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환경이 오염되는 것은 어떤·한 사랍의 잘못일 수만은 없다. 뭇 인연의 소산이라면 바로 우리 모두의 책임이 함께 있는 것이다.
만물의 법이 본래 자성이 없고 비어 있지만 이 비어 었다는 것올 잘못 알아서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러한 인연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가지기 때문에 항상 좋은 면 긍정적인 면으후 생각하며 생활하고 개선하여 나가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업(業)에는 선업, 악업이 있어서 그 업에 따라 과보를 스스로 받게 되는 것이다. 자기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올 따르는 것은 개선되고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물론 퇴보하고 물러서며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고집과 집착이 있올 수도 있다. 이것올 사견망집이라고 하며 이 인연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업자득이란 바로 우리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과보를 말한다. 이 업올 결과로 받는 데에도 현재에 받고 미래에 받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은 그 요건에 관한 것이므로 그 중요한 조건의 강화에 따라서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거짓으로 있는 것즉 가유(假有)라고 한다. 이것은 현상이 임시로 잠깐 인연에 의한 것으로 시간에 따라 조건의 변화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때문이다. 이것이 영원하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생각아다.
그렇다고 해서 법칙으로 존재하는 인연법이 없다는 말이 아님을 지억할 일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은 분명히 알아야 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법성게의 이 부분이라고 하겠다.
무관스님은 월정사로 출가하여 해인강원을 나왔다. 대구 은적사 부설 룸비니 유치원장을 거쳐 강주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월간해인의 편집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