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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를 불태우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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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종철 1991년 07월 113호
어느 농촌에서 수확 직전의 보리를 불태워 버렸다는 보도는 지방의회 선거의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거의 묻혀 버렸지만, 그것은 선거보다도 민주주의보다도 본질적으로 더 중대한 차원에 관계된, 형언할 수 없이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 얼마나 극단적인 퇴폐와 비인간화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상징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직접적인 동기는 가뜩이나 부족한 농촌인력을 선거에 빼앗겨 버리고 보리 수확에 필요한 일손을 구하는 것이 지난했던 데 있다고 하지만, 농촌인력의 부족은 이미 만성적으로 누적되어 왔고 농촌경제가 그동안 말할 수 없이 퇴폐해져 왔음을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당연히 예상되던 일이었다. 농촌이 이대로 가면 커다란 재난에 마주치리라는 예감은 별로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만큼 농촌현실은 가속적으로 황폐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오늘의 경제현실에서 농산물을 수확하고, 그것을 상인에게 넘기거나 시장에 팔아보았자 수지가 안맞는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업화 우선에 밀려서 농사는 이 사회에서 가장 보람없는 일이 되었고, 끊임없는 이농현상 끝에 이 나라의 농촌은 어디에서나 극심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거기다가 외국 농사물 수입개방을 목전에 둔 최근의 현실에서 이 땅의 농업은 전면적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실제로 우루과이라운드라는 돌풍이 불기 전에도 조만간 우리의 농업이 심각한 쇠퇴국면에 들어섰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농촌인구는 공동화(空洞化)를 경험하고, 지금 거의 태반이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농촌인구의 현실로 보아, 시간이 흐르면 우리의 농업은 자연히 중단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일할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촌공동체 없이 농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농촌인구의 감소, 혹은 농촌공동체 의 소멸이라는 유례없는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우리 농업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한가지 더 결정적인 요인이 었다. 그것은 농사의 기초언 농토가 끊임없이 소실되고 또 오염되어 왔다는 점이다. 토양소실과 오염의 문제는 일반적인 환경악화와 함께 현재 전 세계적인 생태계 위기를 일으키는 문제인데, 특히 지난 수십년간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산업화의 추진으로 우리의 많은 농토는 거의 회생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많은 농토가 공업단지, 도사화, 상공업시설, 도로, 공항, 아파 리 골프장, 향락시설을 위하여 잠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업화의 전략으로 강요된 저곡가 정책으로 인하여 놓토는 휴심한 착취의 대상이 되고, 그 결과 많은 땅이 그 본래의 풍요한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생산성 증대라는 목표가 농업의 최우선 순위를 점할 때 토지는 꼼 황폐화하게 마련이다. 땅은 그 본성이 존중되고 주의 깊은 보살핍을 받지 못하고, 과다한 화학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는 기계적 ·착취적 농법에 의하여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이미 농업이 아니라 일종의 공업인 셈이다. 거기에는 자연의 순리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농사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가치, 세계관,방법이 적용되는 것이다. 농사에서 생산성이 중요 고려사항이 되는 것은 어떤 시대에나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적인 우선권을 차지할 때 버극이 시작된다. 생산성은 높아지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농토의 자연적인 성질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의 일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화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팽배한 사회에서 가장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자연의 도(道)에 따르려고 하는 태도가 아닌가?
산업주의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인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재편성하고 묻어 맞추려는 매우 오만불손한 자기중심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욕망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것이며, 그것을 무제한적으로 충족시키는 메커니즘이다. 여기서는 어떤 종류의 윤리적 판단이나 정신적 요구도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우리와 같이 오랫동안 식민지 또는 준식민지 상황에서 서구적 생활문화에 대한 깊은 열둥감과 션망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산업주의의 가치는 거의 아무런 근본적인 비판 없이 진보·선진화라는 명분으로 수용되어 온 것이다. 근대화나 개발이라는 것은 따져보면 변형된 식민주의에 불과하다. 그것은 토착문화와 생활방식에 대한 경멸과 공격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며, 근대화나 개발이 추진되면 될수록 민중생활은 깊은 소외와 비인간화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러나 산업화가 제공하는 갖가지 물질생활의 편의와 산업문화의 헤게 모니에 지배되고 중독된 상황에서 이것을 깨닫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오늘날 다수 민중이 자기도 모르게 무조건적인 안정을 희구하고, 반 생명적이고 낭비적이며 폭력적인 산업생활의 일상적인 구촉를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것을 지지하게 만드는데 독재적인 권력의 강제수단이 필요하지 않다. 전자미디어와 상업광고와 백화점 챈열장의 옹강 화려한 모양의 물건만요로 충분한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토지가 한갖 생산 수단이거나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 우리들 때부분에게 집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편하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과 평화와 신비의 보금자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나 땅에 대하여 거룩한 감각, 신령스러운 느낌을 가지고 사는 가? 맺그제 우리 농촌에서 불태워진 보리밭은 오늘의 산업체제 속의 우리의 삶이 극단적으로 소외되고 비인간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정신적인 교섭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문화를 포기하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지 정말 심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공업화의 확대를 통해서, 외국 농산물에 의존해서 우리의 삶이 보장될 수 있을까?
많은 생각 있는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식량을 외국 곡물상에 의존함으로 써 거의 분명하게 밀어닥칠 재난, 즉 식량안보의 문제는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식량안보 문제와 같은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으나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살기 위해서는 절대로 배제될 수 없는 필수적인 차원이 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상호관계의 흐름 없이는 인간성이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자연 생태계에 존재하는 만물은 서로 빈틈없는 상호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에너지와 정신을 교류하고 있다. 이것을 무시하고, 이러한 관계를 파피할 때, 인간은 스스로 파멸을 준비하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성을 유지하고 산다는 것은 생물계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신도 생물권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만물이 인간의 먹이로 봉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먹이가 되기 위한 것 뿐이라면 이 세상의 꽃들과 나무와 온갖 살아 있는 자연의 형상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으로 살아있어야 할 까닭이 없다. 자연이 이미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단순한 공리주의적 관계만이 아닌 좀더 근원적이고 정신적인 교감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농업은 문명사회의 인간이 이와 같은 인간생존의 근원적인 테두리를 늘의식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생활방식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이 겸손하고 소박한 생활을 가장 행복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게한다.
참다운 문화는 흙을 가꾸고, 땅을 경작하는 경험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경작행위는 단순히 농작물올 얻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땅과 인간의 대화의 형식이다. 모든 대화가 그렇듯이 여기서도 대화가 진정한 것이 되려면 오랜 세대에 걸쳐 축적된 인간의 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경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와 존경을 통해서 땅으로부터 인간은 먹을 거리를 얻는 것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교육되고 풍부한 인간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생존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순간순간의 기적에 의해서, 자연의 선물과 하늘의 은혜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의식하는 문화 속에서 낭비적이고 파괴적인 생활방식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온 땅의 가치률 이해하고, 땅을 존경으로 대하며, 주의깊게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귀하고, 그나마도 급속도로 줄어 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땅을 이해하고 존경하고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이란 다름 아닌 진정한 사랑의 능력이며, 그런 점에서 오늘날 농업문화의 사실상 포기라는 현실은 우리들 사이에 사랑의 능력이 현저하게 고갈되어 가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루과이라운드 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지금 정부나 학자들이 내놓는 처방은 대개 문채가 농산물의 국제간 가격경쟁에 있다고 보면서 국내 농업을 대규모 영농화, 기계화로 확대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날 지배적인 산업주의 문화를 움직일 수 없는 삶의 원리로 받아들일 때, 이것은 당연한 반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왜 보리밭에 불이 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비극 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무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아니라 인깐으로 살아 남아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생활, 다시 말하여 스스로 겸손을 배우려는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