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I . 들어가는 말
II. 조선낭인(朝鮮浪人) 다께다 한지(武田範之)
Ⅲ. 원종(圓宗)에 대한 재검토
①다께다와 원종의 성립
②다께다와 원종의 명칭
③원종과 조동종의 연합
IV. 원종에 대한 임제종
①원종의 성격과 임제종의 성립
②임제종 운동의 의의
V. 맺음말
①문제의 정리
②역사적 교훈
참고 문헌
I.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 민족이 겪고있는 모든 민족사적 고난과 부조리(不條理)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피지배를 경험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민족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지배를 당하던 시대에 대한 준엄한 반성과 극복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문제는 불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조선불교에 대한책략을 자행하여 불교의 참된 면목[眞面目]을 왜곡했다. 외견적(外見的)으로 나마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거의 반세기가 가까워오는 오늘날 과연 한국불교는 식민지의 유제(遺制)와 의식(意識)을 완전히 청산했는가 아니면, 일본 제국주의가 결과한 모순의 연장선 위에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가.
한국불교의 현실적인 모습은 식민지의 유제와 의식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음1)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그와 같은 모순을 극복하여, 민족의 삶 속에 굳건히 뿌리내리는 불교로 새롭게 나기 위해서는 더욱 냉철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불교가 앞으로 계승해야 할 올바른 전통을 확립할 수 있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근대불교사에서 조선불교가 일본 제국주의와 직접 대면한 중요한 사건은 원종(圓宗)과 조동종(曹洞宗)의 연합시도이다. 그러나, 아직 학계에서는 원종과 조동종의 연합과 그 성격 등에 대해서 깊이있게 연구한 논문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다른 주제 속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능화(李能和)2)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다까하시(高橋亨)의 「이조불교(李朝佛敎)」정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원종의 성립과 성격, 그리고 그에 대응한 임제종(臨濟宗) 운동의 의의 들과 같은 중요한 관건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능화와 다까하시의 자료에 의존하는 한, 조선인 [李容九, 李晦光] 들이 자발적으로 ‘친일’하기 위해서 일본불교에 연합(종속)하고자 했을 뿔이라는 결론만 있을 것이며, 일본제국주의의 집요한 동화(同化) 정책에 의한 꼭둑각시 집단으로서의 원종의 성격은 밝히지 못한 채, 원종과 임제종의 대립은 그러한 불교계 내부의 알력 정도의 문제로서 사사화(私事化)3)되고 말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와 같은 자료의 한계를 극복, 원종의 배후인 일본인 고문 다께다 한지(武田範之, 이하 다께다로 약칭함)라는 자가 있었다는 점을 중시하여, 그의 서간문과 일기와 그에 대한 평전(評傳), 연구 등을 이용하여 원종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를 함과 동시에, 특히 다음 몇 가지 사항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첫째, 원종의 일본인 고문 다께다는 어떠한 인물이며, 단순히 한 조동종 승려일 뿐이었
는가?
둘째, 다께다는 원종성립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원종 성립 이후에 비로소 고문으로 취임, 원종과 관계를 가졌던 것인가?
셋째, ‘원종’이란 명칭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으며, 다께다와는 이무런 관련도 없는 것인
가?
넷째, 원종과 조동종의 연합 추진은 이회광(李降光)을 중심으로 한 조선불교가 살아 남기 위한 계산에서 행한 자발적인 친일행위 일 뿐인가? 그 이면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책략은 없었던가?
다섯째, 원종은 ‘시대 상황 속에서 조선승려들 스스로의 자Z1에 의해 이루어진 자발적 인 종단’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과연 내릴 수 있는가? 원종은 성립 당시에는 지주적인 종단이었으나, 한일합병으로 인해서 친일로 선회한 것인가?
여섯째, 원종과 조동종의 연합을 반대하고 나섰던 한용운 등의 임제종 운동은 그저 조동종∙임제종 사이의 선종 내적 문파의식의 소산인가? 아니라면 임제종 운동의 의의는 무엇인가?
IL 조선낭인 다께다 한지(武田障之)
다께다는I863년 11월 23일큐우슈우〔九州) 후꾸오까(福間)의 구류미(久留米)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과 성장배경은 뒷날 조선낭인4)으로서 그의 삶과 사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요건이 된다.
그의 성장지인 후꾸오까는 일본의 다른 어느지역보다도 아시아주의5)와 대륙팽창정책을 열망한 국권주의자들을 많이 배출한곳이다. 즉, 도야마 미Wm루(頭山滿), 히로오까 고따로(平間浩太郞), 스기야마 시게마루들과 같은 급진적인 국가주의자들을 배출한 제국주의의 정신적 고향이었다7)
다께다의 이버지는 명치 신정부 전복사건인 이른바 ‘명사사천(明四事件)’에 깊이 관련, 투옥되어 가문이 몰락하게 된다. 이 명사사건은 ‘천황’을 옹호하는 근황파(動皇波)의 보수적 책동이었다. 그와 같은 보수적 가문과 환경으로 인해서, 흔히 당시의 정치적 청년들에게서 보이는 자유민권(自由民權) 운동의 영향은 다께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7)
가문의 몰락과 함께 방량생활에 들어간 다께다는 2I세 때인 1883년에 조동종의 대찰(大刹)이었던 현성사(顧뿔좋)로 출가, 대장경을 열람하게 된다. 승려로서의 전문객인 수업(修業)에만 열중하던 다께다가 현실적인 정치문제로 관심을 전환하게 된 것은 출가 이전인 방랑시대의 친구였던 관상길(關常吉)의 권유에 의해서이다. 그는 다께다와 같은 인물이 승려로서만 일생을 보내게 될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거의 사흘 밤낮에 걸쳐서 조선의 풍운(鳳쫓)을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8)
이처럼 다께다가 판상길의 권유에 의해서 조선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낭인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무렵, 일본dpt서는 두갈래의 사상적 조류가 부상하게 된다. 그 하나는, 후꾸자와(福홉詢吉)로 대표되는 탈아론(脫亞論)으로서 일본은 아시아 이웃나라-조선, 중국-와의 관계를 단절하고서 서구적인 근대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다루이 도끼씨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이다. 대동합방론은 일본과 조선이 ‘대동(大東)’이라는 나라로 합방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9) 물론, 탈아론이나 대동합방론의 근저에는 일본의 지도적 역할과 함께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우월성에 대한 자기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며,1O) 겉으로는 그 양자(兩者)가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실상은 서로 보완적으로 아시아에의 침략을 정당화하였던 것이다.11)
이 중에서도 대동아합방론과 같은 아시아주의가 침략과 지배의 논리로서 정책의 기조(基홉)가 된 것은 I890년 국회개설, 헌법재정 등을 요구한 민권론(民홈論)이 좌절하고 민권론에 반(反)하는 국권론(國樓讀)이 정부권력과 결합하면서부터였다.I2)
이처럼 시대의 대세로서 자리하게 된 아시아주의와 다게다의 관계가 형성된 것은, 다께다의 고향 후꾸오끼에서 결성된 우익결사 현양사(玄洋社)의 출범에 의해서이다.
현양사는 정한론(征韓論)의 흐름을 이은 후꾸오까 지방의 신도 기헤이따이, 하꾸다 로꾸스께(箱田六輪), 히로오까고따로(平間浩太郞), 도야마 미쯔루(頭山홈) 등에 의하여 I881년 2월에 창립된다.l3)
현양사가 뜻한 바는 다음과 같은 「현양사사(玄洋社史)」의 기록에 의해서 잘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조선의 침략이 그 목적이라는 것이다.
“현양사의 뜻은 본래 내국(內園)의 정치투쟁에 있지 않고 청한(淸韓)에 있으며, 그 뜻을 청한에 펴고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I4)
조선 침략의 첨병으로 막후에서 활동하고자 현 조선낭언들의 집단 현양사는 갑오농민 전쟁이 일어나자 청일전쟁의 구실을 마련키위하여 유격대인 천우협(天佑俠)을 조직해서 조선에 침투시키게 되는데, 다께다는 천우협의 단원15)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천우협은 갑오농민전쟁의 와중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조장하기 위해 씨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放火] 역할을 담당했다.l6)
다께다는 이 천우협에 참가함으로써 우찌다 료혜이(內田良平)를 만나게 되며, 우찌다가 뒷날 천우협의 참가자들을 규합하여 흑룡회(黑龍會.)를 결성하자, 흑룡회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리하여, 다께다는 정치적으로 흑룡회파(派)에 소속하며, 여기서 우찌다의 지도를 받게 된다.l7)
1895년 다께다는 민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에 관여한다. 그런 연유로 해서, 미우라(三浦) 공사 등과 함께 히로시마 감옥에 잠시 투옥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된다. 이후, I897년 동림사(東林寺)의 주지가된 그는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서 미우라 공사와 결탁한 우범선(禹範善)등 4명18)의 도망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보호해 준다.l9)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본은 다음해 2월부터 통감부를 설치, 통감정치를 시행하게 된다. 이때 이또오(伊훌傳文)가 초대 통감이 되는데, 그는 부임에 앞서 스기야마(#Z山훌九)가 추천한 우찌다를 그의 참모로 데리고 온다.20)이 이때 우찌다의 흑룡회에 소속되어 있던 다께다도 함께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다깨다는 이때부터 우찌다와 일심동체가 되어서 친일 꼭둑각시 단체인 이용구의 일진회를 이변에서 조종하고 회유하는 업무를 맡는21) 한편, 불교에 대한 공작(工作)도 행하는데, 이용구와 이회광(李臨光)을 통하여 원종(圓宗)을 설립하고 고문이 되어 조선불교의 친일화를 지도하게 된다.22)
이렇게 볼 때, 이회광을 조종하여 일본 조동종파 연합하도록 획책한 것도, 조동종 승려로서의 다게다가 아니라 조선의 지배를 위해 활약한 조선낭인으로서의 다께다가 행한 책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의 정체(正體, identity)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조선낭인으로서가 아닌 단순한 조동종의 한 승려로서만 보고자 할 때에는, 원종을 조동종에 연합시키고자 한 그의 시도도 불교계 내부의 문제23)로 사사화(私事化)되고 말 것이다.
다께다를, 조동종의 한 승려로서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전위(前衝)인 조선남인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논자의 입장은 다께다 이전의 다른 일본 승려들의 경우와를 구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 역시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조선 민족의 정신을 지배24)하는데 봉사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본국 불교의 그와 같은 성격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신불분리(神佛分農)와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위기23) 앞에서 일본불교계가 새로운 국가권력 및 이를 지탱해주고 있는 지배에 자진하여 영합함으로써 폐불훼석에 의한 타격을 극복하고 살아남고자 했던 데에서 비롯하는 것이었다.26) 그리하여 불교교단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보수성과 어용성을 자기성격으로 갖게 되었다27)
개항 여후, 조선으로 건너와서 포교를 통해 세력확장을 꾀하던 정토진종(淨土眞宗)등 많은 경우는 이와 같은 일본불교의 체제봉사적 성격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대체로 그와 같은 체제봉사의 차원에서 승려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협조를 한 정도였을 뿐, 다께다처람 조선낭인으로서 침략의 전위에 직접 뛰어들었던 것은 아니었다28)
다께다의 경우에도 명치 37년(1904) 2월, 비록 조동종 조선포교사로 임명되기29)는 했으나, 그것은 조선낭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그를 이용하여 여타 종파에 대한 우위를 확보 하고자 한 조동종의 의도에 의해서였다고 보아야 한다.
다께다가 단순히 한 승려로서가 아니라 조선낭인의 입장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다른 일본 승려들과는 달랐음을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에 의해서도 잘 알 수 있다.
“ 우리 포교승들이 조선에 건너온 것은 조선민족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함인가? 아니면 조선의 가람을 빼앗으로 온 것인가?”30)
그의 목적은 조선의 가람이나 빼앗는 종교적인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에게 은혜(합병의 성취로 인한 천황의 은혜)’를 베풀기 위한 정치적인 데에 있었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정체가 조동종의 한승려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위한 전위(前衝)인 조선 낭인으로서 현양사, 천우협, 흑룡희로 이어지는 우익결사에 소속되어 있음을 정확히 인식할 때, 원종에 대한 그의 위상(位相)도 분명하게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