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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피안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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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찰만담 - 박용길 1989년 05월 87호
서울행 캐러밴
서울과 춘천을 잇는 블랙 벨트는 때아닌 더위로 후끈 달아 있었다. 제법 일렁거리는 포도(鋪道) 위의 아지랑이. 그 너머로 신기루처럼 다가서는 산기슭의 진달래밭, 아파트촌, 호화 갈비집…. 경춘 국도의 가로 풍경은 언제나 부조리한 추상화로 질주한다.
서울로 들어가는 버스엘 오르면 나는 늘 이상한 신열을 느낀다. 타고난 역마살 덕분에 일찍부터 차타기를 좋아했던-심부름으로 바로 이웃 가게에 가도 될 일을 일부러 왕복 두 시간이나 걸리는 유성이나 옥천에 가서 담배 같은 것을 사올 정도였으니까-내가 왜 이렇게 시원찮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생소한 접촉음과 함께 버스 좌석에 몸을 기댈 때마다 잠시 나는 사막을 눈 앞에 둔 옛 캐러밴의 심정으로 돌아가곤 한다.
망우리 고개를 기어 오르는 버스 엔진소음이 한숨을 몰아 쉴 즈음, 차창으로는 이제 메마른 서울의 대기가 정전기로 와 부딪치고, 지친 낙타를 바꾸어 타듯 시내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나는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기 시작한다.
사막화되어가는 도시. 서울도 그 예외는 아니다. 얼마전 매스콤을 통해 보도된 바 있는 주변의 자연 주거지에 대한 서울의 상대 습도는 이 거대도시가 점차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부드러운 대지와 적당한 수분의 증발, 이보다 더 중요한 흙의 심정적인 기(氣)를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두루뭉수리 가로막은 과보라고나 할까?
사막의 길은 멀다. 그리고 권태롭다. 그래서 ‘가도 가도 사막의 길… 꿈속에도 사막의 길’이라는 유행가 가사도 있지 않던가. 사막은 생명을 주눅들게 한다. 그곳의 질서에 복종케 한다, 사막의 생리를 거역하면 삶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사막에 순종하라! 도시에 순종하라!
하지만 사막에도 오아시스는 있다. 석면처럼 무미 건조한 삶을 해면과 같이 한껏 촉촉히 부풀려 주는 곳.
그러면 서울의 오아시스는 어디인가?

오아시스 한강
나라 안에서 압록강 다음으로 드넓은 유역 면적을 거느리고 있는 한강은 그 길이도 또한 만만치 않아서 북한강은 멀리 강원도 금강산을, 그리고 남한강은 강원도 삼척군의 대덕산을 각기 그 발원지로 삼고 있다. 남과 북의 이들 두 강이 이윽고 하나로 마주쳐 한강이라는 이름의 대하로 흐르기 시작하는 곳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물이 인간생활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살림살이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곳임이 분명하다. 최근에 발굴된 수많은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 일찌기 구석기 시대부터 그 유역이 양호한 주거 공간으로 이용되어 왔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접어 들면서부터 한강은 그 정치∙군사∙경제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이들 삼국 세력의 주요 각축장으로 변모하였다. ‘한강을 지배하는 자가 한반도를 지배한다’ 라는 말도있긴 하지만, 어쨌든 한반도에서 이 강이 차지하는 지정학적 위치는 실로 고금을 통하여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접어 들어 이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도 사실은 단순히 풍수지리설에만 의탁한 것이 아닌, 한강 유역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 끝에 이루어진 대결단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시대까지는 국가 경영에 필수적인 수상 운송의 대동맥이었으며, 근대에 들어서는 양질의 생활용수 및 공업 용수의 원천인 동시에 비옥한 평야 지대의 젖줄기 노릇을 해온 것은 물론, 수도시민 개개인에 있어서는 여가 선용 및 정서 함양을 위한 친근한 벗이었으며 사색과 풍류의 대상이 되어온 한강!
서울의 오아시스는 바로 한강이다.

살곶이다리를 건너서
강은 또한 고통과 탄식의 대상이기도 하다. 옛부터 높은 산 깊은 물은 인간의 왕래에 커다란 장애였으며, 특히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별리의 사연은 사람들의 무의식 가운데에서 물이 갖는 비극적인 의미가 상대적으로 더욱 큰 영역을 차지하게 되는 데에 결정적인 잔영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 위에 걸린 다리에 그 만큼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강 위에는 현재 모두 열다섯 개의 다리가 가설되어 있으며 앞으로 다섯 개가 더 가설될 예정이다. 그런데 비록 한강의 본류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강에 놓여진 최초의 다리가 당시로써는 전국에서 가장 크고도 긴 ‘살곶이다리’였다는 것과 이것이 한 스님에 의해 계획되고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 과연 몇이나 될까?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공덕 중에 깊은 물에 다리를 놓아 다니는 이들의 수고를 덜어 주는 것이 으뜸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일찌기 15세기 말에 이와 같은 공덕행을 몸으로 실천해 보인 스님은 과연 누구일까?
조선 중기 성현(成俔)이 쓴「용재총화(傭齊叢話)」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자비승(慈悲僧)이란 중이 있었는데 성격이 곧고 절개를 굽히지 않아 상대가 비록 공경대부일지라도 한결같이 그 이름을 불렀고 사람들이 시주를 하면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고 값 비싼 물건일지라도 사양하는 법이 없었으며 구걸하는 이가 있으면 가진 것을 모두 내주곤 하였다. 찌그러진 갓에 다 해진 옷을 입고 날마다 저자거리에서 탁발로 허기를 메우면서도 정작 먹을 것을 주면 먹고 않으면 굶었으며,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맛이 있네 없네 하지 않고 밥 한술이라도 결코 많네 적네 하는 법이 없었다.
……가운데 줄임……
어느 날 내가 고관들과 어울린 자리에 마침 그가 온 적이 있었다. 좌중의 사람들이 ‘그대는 왜 산에 들어가 수도는 하지 않고 매일 속인들 사는 곳에서 다리나 길, 또는 우물 등을 고치는 하찮은 일로 고생을 하며 지내는 거요?’ 하고 묻자 이에 그 중은 ‘일찌기 나의 스승이 훈계하여 말하기를, 산에 틀어가서 십년을 고행하면 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해서 그 말대로 금강산에 오년, 오대산에서 오년을 부지런히 공부하며 도를 닦았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다시 화엄경을 백번 읽으면 도를 깨칠 것이다라는 스승의 말을 그대로 실행해 보았지만, 역시 소득이 없어 비로소 불교가 허망되고 믿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하지만 내 처지로는 달리 나라에 이바지할 길이 없어 다만 다리나 길, 또는 우물 등을 고치는일로 사람들에게 공덕을 베풀고 있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솔직함을 가상히 여기었다.

이상이「용재총화」제 칠권에 나오는, 살곶이다리를 놓은 스님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유생들 앞에서 짐짓 자신의 수행 이력을 애써 비하시키고 있는 스님의 말 가운데에서, 당시 불교가 처해 있던 상황을 눈 앞에 보는 것 같아 새삼 가슴이 뭉클해 온다.
당시 스님의 손으로 축조된 살곶이다리를 통해 이어지는 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광나루를 건너 강릉으로 가는 길이 그 하나이고, 신천과 잠실 윗쪽의 하중도(河中島}를 통해 송파로 건너가는 길이 그 둘이며 나머지 세번째는 뚝섬나루를 건너 지금의 삼성동에 이르는 길로써 이는 다시 제 9대 성종의 선종과 제 11대 중종의 정릉에 이르는 것은 물론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로 애용되었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도 그 거주 사찰이 알려지지 않은 자비승이란 스님은 강건너 봉은사와는 대체 어떤 관계에 있었던 것일까? 어떤 이유로 스님은 당시 도성에서 봉은사로 나아가는 길목에 살곶이다리를 놓았던 것일까?
하지만 옛 기록만을 가지고는 위의 의문을 풀 길이 전혀 없다. 그냥 한번 봉은사를 가볼 수 밖에…

수도산 봉은사
절을 찾아갈 때 이용하는 교통 수단이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마는, 봉은사를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하고 강이라면 사실 배로 건너야 하는 것이 제법 그럴싸하지 않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彼岸)은 분명히 생사와 고해(苦海)인 사바세계 저 건너 반야선(槃若船)을 타야만 이를 수 있는 곳 일 터인데, 그렇다면 이 시대의 반야선은 네 바퀴로 영동교를 달리는 저 버스란 말인가?
격세지감! 하기야 마하야나(Mahayana)란 곧 대승(大乘)이고 대승은 곧 큰 수레, 즉 버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봉은사는 신라제 38대 원성왕 때 창건되어 천여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조계종 유수의 사찰이다. 최초로 절을 창건한 이는 당시 원성왕의 왕사(王師)였던 연희대사(緣會大師)였으며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은 견성사(見性寺)였다. 오늘날의 봉은사로 절 이름이 다시 바뀐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선릉(宣陵)을 위하여 절을 크게 중창한 이후부터이며, 이때부터 사명(寺名)이 사방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신라 및 고려 대에는 숭불정책으로 인하여 불교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대대로 억불정책이 계속되어 많은 사찰이 강제로 철폐되었다. 하지만 봉은사만큼은 왕실의 두터운 보호 속에서 계속 사세를 확장해 나아갈 수 있었다.
현재의 위치로 봉은사를 다시 옮겨 지은 것은 명종 17년의 일이었는데, 당시 신축했던 건물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하여 모두 불타 없어지고, 이후 인조 15년(1637)에 선화경림(禪華敬林)에 재건하여 내려오다가 l939년 다시 불타 버린 것을 1941년에 태욱(泰旭)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건 이래 고승대덕이 다수 배출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현종의 왕사였던 법경(法鏡)스님, 조선 중종과 명종 년간(年間)의 허응당(虛応堂) 보우(普雨)선사, 임진란 당시의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사명대사 유정(推靜) 그리고 벽암, 청호, 한암선사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오늘날 봉은사 맞은 편에 들어서 있는 한국 무역전시장 자리를 옛날에는 ‘중의 벌’ 곧 ‘승과평(僧科坪)’ 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문정왕후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당시의 주지 보우대사가 조선 개국 이래 폐지된 승과를 다시 설치하고 그 해(明宗 七年) 8월 과거를 실시하자, 수천명의 승려가 이에 응시하여 절 앞의 벌판을 가득 메웠던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승과에 합격한 인물 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서산대사이며, 훗날 그는 보우대사의 뒤를 이어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다.
지금 다락 누각의 대도량(大道場)이라는 현액은 위창(韋滄) 오세창의 휘호이며, 대웅전 현액은 완당 김정희의 휘호이다. 대웅전 서쪽의 판전(板殿) 현액 역시 완당의 절필로 전하며 그 안에는 화엄경을 비롯한 귀중한 경판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왔는데, 근래에 입적하신 운허(耘虛)스님을 중심으로 이곳에서 한글 역경사업이 시작되었던 것도 이와 같은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세세생생 자비행을
봉은사 일주문을 들어 서면 길 오른쪽으로 주지나청호대선사수해공덕비(住持羅靑湖大輝師水害功德碑)란 석물이 유달리 크게 눈에 띈다. 말 그대로 전대미문의 을축년 홍수로 잠실 일대가 물에 잠겨 뽕밭이 망망대해로 변했을 때,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청호스님 이하 사내대중(寺內大衆)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708명에 은덕을 기리기 위한 불망비(不忘碑)인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청호스님은 당시 손수 뗏목을 저어 많은 사람을 구해 냈으며 또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기 위해 봉은사의 곳간을 모두 헐었다고 한다.
청호스님의 면모에 대해서는 오늘날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속명은 학밀(學密)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 9세에 출가하여 명주사(明珠寺)에서 득도하였다고 한다. 그후 금강산에 들어가 오랫동안 수도정진한 뒤, 1924년 이곳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여 이윽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을축년 대홍수를 맞아 크나큰 자비행을 몸소 실행하였던 것이다.
(苦海)의 활불 청호스님 ! 그는 어쩌면 조선 중기 살곶이다리 역사로 자비공덕을 실현한 자비승의 환생인지도 모른다. 사바세계의 질곡을 차마 여윌 수 없어 고해를 맴도는 보살의 원력이 살아 숨쉬는 곳.
오늘날 봉은사를 찾는 이들 부디 이로부터 큰 감응 있기를 바라며 총총 일주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