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詮에서 顯으로-本性論的 敎體論
능전의 4법을 둘러싼 소송교체론의 전개는 유식교학에 이르러 파국을 맞는다. 4법의 한계가 밝혀지고 그 기능과 특성은 唯識이라는 새 원칙 위에 재정립된다. 가르침의 내용 자체를 놓고 벌어지는 교학상의 논쟁과는 달리 교체론의 전개는 그 요구와 양상에 있어 항상 구체성을 띠어 왔다. 그러나 유식교학은 그 교학적 특성으로 인해 교체론의 구체성을 一心이나 心性 따위의 보편논쟁 속에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그 자세한 내용은 현담에서 다시 第六攝境唯心體로 통합되고 있다) 四法을 통한 가르침의 가능성과 또 이를 통한 가르침의 재현 가능성을 선결과제로 중시하던 전통은 이제 본성론적 교학의 한 부분으로 종속되고 만다. 唯心의 보편성이 확증되기만 하면 교체문제는 그 보편성에 의존, 자연히 해결될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해진다. 당연히 유식교학 안에는 교체론이 독립되어 있지 않다. 다만 합리적으로 萬法唯識을 논증해 가는 과정 속에 맞물려 있을 뿐이다. 화엄교학은 중국의 교학이 봉착했던 동일성 위기라는 일반적인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같은 태도 변화를 민감하게 수용한다. 詮의 문제를 顯의 문제로 바꿔 독자적인 교체론을 전개하는 현담의 의도는 화엄교학이 처했던 난제들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준다. 앞서 “가르침에 대한 본성론적 태도”라고 규정했던 새로운 시각의 교체론은 중국교학의 특수상황, 전통교학에 대한 해석, 중국 특유의 접근방식들로 인해 점차 관념적인 형태로 심화한다.
현담의 교체론은 4법을 중시하던 전통적인 논점을 所詮義로 옮겨 놓는다. 이같은 관점의 수정은 본성론적 교체론을 구축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 된다. 능전을 통해 소전을 획득하는 과정이 가르침이며, 가르침은 이 양자의 결합으로 구성되므로 교체론은 의당 소전이 되는 의미를 포함하여한다. 나아가 이 소전이야말로 가르침의 진정한 목적인 까닭에 능전중심의 교체론은 의당 소전 중심의 교체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능적 태도의 교체론에서는 소전의를 구태여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의사전달과 해석의 근거만 교체론에서 해결하면 내용의 해석은 교체론을 바탕으로 저절로 해결될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담에서 문제의 중심을 소전으로 옮겨 놓는 이유도 교체문제를 소전에서 해결하자는 것만은 아니다. 교체론의 난점을 소전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어차피 경전해석의 근거를 해석된 경전의 의미로 확증하려는 순환론 속으로 몰고갈 뿐이다. 현담의 의도는 다만(끝내 성공적인 것도, 이러한 오류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지만) 가르침의 수행과 해석의 근거를 義
의 보편성과 그 인식가능성에서 확보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 문제의 초점을 소전의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詮이라는 행위의 매개자로서의 四法은 그 한계가 명백해진 이상, 교체론도 이 불완전한 매개자에게만 의존할 수 없는 국면에 놓이게 되었다. 詮이라는 행위를 통해 연결되던 부처님과의 관계가 능전의 한계로 말미암아 그 확실성이 부정되고 말았으니 더 이상 詮을 통해 가르침을 수행할 근거도 무너진 셈이다.
그런데 구조적 분석을 통해 詮의 목적이 義를 중계하자는 데 있었음을 착안해 보면, 그 義의 중계가능성이 능전이라는 매개자 없이도 보증될 수만 있다면 부처님과의 관계는 회복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교체론을 詮의 행위구조에서 顯義의 보편성 문제로 옮겨 놓는 현담의 진짜 의도가 바로 이것이다. 義의 전달가능성은 부처님과의 대화라는 구체적인 문제에 더 이상 속박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法性과 覺性,그리고 顯이라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통해 확고하게 보장된다. (이 본성의 보편성을 통해 四法은 다시 구제를 받고 詮의 의미는 새롭게 조명된다. 四法에 대한 無礙와 圓融이라는 체계적인 재구성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다) 顯義를 논증하는 현담의 방식과 특징
현담에서는 ‘義理를 能顯하는 一切의 諸法이 모두가 敎体’라는 표제 아래 몇 종류의 경전귀절을 敎證으로 제시하고, 곧바로 이 귀절들의 大意를 자신의 결론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방식은 소위 理證을 결여한 것으로 경전해석 자체에도 무리가 있다. 또한 주장을 세우고 그 주장을 해석된 경전의 입장으로 입증하고, 그 해석의 근거를 다시 자기 주장으로 재입증하는 순환론의 전형을 보여줄 뿐이다.
현담에서는 교증으로 유마경과 능가경의 귀절을 인용한다. 인용한 유마경에서는 言說뿐만 아니라 냄새, 음식, 허공 등의 다양한 방법들을 활용하여 佛事인 가르침이 수행될 수 있다는 점, 이는 중생들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부처님의 대응하는 방식이 자유자재한 때문이라는 점, 따라서 보살들은 그 가르침마다 선입견 없이 유연하게 적응해야 한다는 점들을 설명하고 있다. 또 능가경의 인용문에서는 言說이라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 (言說을 作相이요 無性), 이 한계에도 불구하고 언설을 통한가르침이 가능하다는 점, 이 언설이 갖는 한계를 벗어나 가르침을 적절하게 수용해야 한다는 점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절들을 나열한 뒤 현담은 엉뚱하게도 대뜸 諸法이 顯法하면 見聞覺知가 바로 이를 획득한다(得法)는 결론으로 이끌어 첫째, 事物이 스스로 法을 說함, 둘째, 事物 그대로가 바로 法, 셋째, 事物 그대로가 說法하는 주체(能說人)라는 一乘圓宗의 교리와 동일시해 버린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화엄경의 구절들을 화엄교학의 통상적인 방식으로 인용, 해석하여 이를 다시 입증한다.
물론 인용한 유마경과 능가경의 귀절들이 言說의 한계를 인정하고, 가르침을 좀더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그릇된 집착을 부정해가는 부처님과의 대화라는 점에서 현담의 목적과 부합되는 점이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현담이 의도하는 ‘言說의 한계를 넘어선 義의 보편적 획득가능성’에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현담의 결론은 지나친 비약이다.
현담의 선구가 되는 「探玄記」에서조차 이런 의도가 이렇게 성급하고 조잡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다양한 수단(언어명구만이 아닌)을 통해서도 이해와 실천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諸法을 표현수단으로써(能詮) 교체 문제에 포함해 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諸法을 통해, 이를 활용하여 설법한다(부처님께서)는 것과 諸法이 직접 說法한다는 것은아주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탐현기」에서는 諸法顯義라는 표현도 쓰질 않는다. 「탐현기」는 顯이라는 표현에 대해 文을 통해 해석이 완료되어 해석자의 인식 상에 知解가 나타났을 때 義가 顯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현담의 주장대로 제법이 직접 현의한다고 하는 것은 제법과 인식주관 사이에 확실한 인식의 보편적인 가능성이 의사전달의 의도 여부와는 상관없이 본성적으로 본유되어 있다는 것을 의도한다. 우리는 諸法의 본성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근거를 본성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탐현기」의 목적 또한 결과적으로는 현담과 같은 본성론적 교체론의 구성애 있지만, 현담의 이같은 단계를 무시한 비약적인 논증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그들의 의도가 드러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제까지 나타났던 교체론의 주제들을 본성론적인 태도로 변화시켜가는 현담의 전개과정을 구조적으로 도식화해 보면 오른쪽 위와 같다. (물론 현담은 이 전체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모두 긍정한다)
초기의 교체론에서는 가르침을 詮이라는 행위로 보고 詮의 매개자로서의 四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주목한다. 그러다가 四法의 기능은 의미와의 지시관계라는 분석이 나타나게 되고 그러한 기능은 四法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현담은 四法의 기능인 의미와의 지시관계를 독립시켜 이를 諸法과 認識의 본성에 결부시킴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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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說이나 詮이라는 행위와 연관된 복잡한 난제들을 한꺼번에 해소시켜 버린다. 그러나 說, 聽 , 詮 따위의 실제적인 대화에 관련된 동사들을 인식주관과 인식대상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顯이라는 형용사로 바꿔 놓음으로써 일종의 의사전달이론을 본성론적 인식론으로 바꿔 버렸다. 義를 매개로 하는 인식론이 교체론의 제반문제를 대행하게 된 것이다 (본성론적 교체론과 唯心, 唯識 따위의 인식론에 근접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같은 태도 변화의 근거가 무엇이며, 그 보편성을 확립시켜 주는 방식이 얼마나 정당한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현담은 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를 거꾸로 통상적인 화엄교학의 해석된 교리로 넘겨 버린다. 해석된 교리의 확실성을 보증해 줄 근거로서의 교체론을 본성의 문제로 바꿔, 역으로 교리체계에 종속시킴으로써 교리체계 자체가 기반을 상실한 채 공허하고 신비한 이념체계로 남게 된 것이다. 현담교체론의 첫머리에서 体와 性을 구별하고 이 이후의 교체론을 敎性論으로 규정한 의도는 충분히 입증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최후의 근거가 되는 本性을 입증해 줄 아무런 방편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근거를 확인하기 위하여는 다시 현담의 앞부분인 義理分齊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교체론을 복잡한 교리상의 해석문제에 포함시켜 버리는 일은 전통적인 교체론의 목적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현담은 교체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체론을 본성론적 교학으로 수정 종속시킴으로써 전통적인 교체론이 갖고 있던 중요한 의의를 폐기시켜 버리고 말았다. 아울러서 교학체계의 선결과제인 교체론의 난제들을 본성으로 얼버무림으로써 자신의 교학체계에 치명적인 약점을 남겨 놓았다. 화려한 화엄교학의 교리체계는 시작에서부터 스스로를 설명할 길 없는 공허한 토대 위에 구축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